창문에 손가락으로 쓱쓱 쓰는 글자에
어멍의 눈이, 아기처럼 반짝인다.
그저, 이름들, 글자일 뿐인데.
어멍의 어멍. 어멍의 아방. 짜장면. 한라산.
어멍이 좋아하는 것들.
어멍이 살아온 그 긴 시간동안, 누구도 글자 하나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누구도, 어멍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떻게 살고 싶었는지, 묻지 않았다.
어멍은 그저, 속으로 꾹꾹, 미친 듯이 널뛰는 감정들을 꾹 다문 입으로 눌러가면서
자식새끼 묻은 바다를 보며, 파도처럼 밀려오는 슬픔에 수시로 철썩이는 그 아픔에서,
죽고 싶은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버텨서,
그렇게 삶이 지도록, 살아왔다.
그렇게 살고 나니, 뼈와 가죽밖에, 그 가벼운 무게만 남아서,
내 등에서 그렇게 날아갈 듯이.
남은 삶도, 바람처럼 스치려고. 그렇게.
어멍이 미웠다.
다 큰 어른이, 고슴도치도 함함하다는 제 새끼를 버려두는데,
미워서 견딜 수 없었다.
그 시절, 나는 어멍을 미워함으로 살았다.
끝까지, 미워하려 했다.
하지만, 이제야 안다.
어멍은, 어른이 될 수 없었다.
강옥동.
한창 부모의 사랑이 고픈 나이에, 부모를 잃었다.
한창 남편과 사랑할 나이에, 남편을 잃었다.
한창 자식을 사랑할 나이에, 자식을 잃었다.
너무 많은 슬픔이 여물지 않은 마음을 갈갈이 찢으며 쏟아져서,
어멍은 인생에서 내리는 비를 피하지도 못한채
늘 우산없는 아이처럼,
그렇게 움조차 트지 못했다.
용서하고,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꼭 그렇게, 다다라서야, 후회를 한다.
설산을 오르는 어멍의 뒷모습을 본다.
흰 머리가 섞인, 작은 체구.
한 평생, 받고 싶은 사랑도 제대로 못 받고, 주고 싶은 사랑도 제대로 주면서 살지 못했던,
삶에 고팠던, 어멍의 뒷모습을 본다.
-살면서 언제가 가장 좋았어?
-지금. 너랑 한라산 가는, 지금.
수십년을 그렇게 꾹꾹 담아온, 소원.
너랑. 너랑.
어멍. 내 어멍.
나는 솟아오르는 눈물을 꾹 눌러담는다.
나는 설산을 오른다.
추위가 뺨을 때리고, 안에서는 숨찬 열기가 뻗어오르지만,
그럼에도 산을 오른다.
내가 어멍을 위해, 어쩌면 처음으로 하는 일이다.
산을 오르며 빈다.
마지막은 아니어라.
제발, 내가 어멍을 위해서 하는 일이
이게 마지막은 아니어라.
앞으로도,
꽃잎이 날리는 봄에 어머니를 업어줄 것이다.
짜장면집에서 탕수육도 같이 시켜줄 것이다.
한 방에 누워, 주름진 손을 꼭 잡고 잘 것이다.
우리의 삶에, 수많은 나중을…
그저, 함께.
다음날, 어멍이 차려놓은 된장찌개를 먹으러 갔다.
아주 오래 그리워했던, 어멍의 밥상.
그 옆에, 피곤한 듯 잠든 어멍을 보았다.
-어멍?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밥상을 보며 모로 누워,
한 쪽 손을 그렇게 펴고,
어멍은, 긴 잠에 들었다.
나는 어멍에게 팔베개를 해주었다.
그 작은 얼굴을 쓰다듬다가,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그 얼굴을 쓰다듬다가,
어멍의 온 몸을 꼭 안는다.
엄마…엄마…
더 이상 그 무엇도, 엄마의 밤을 무섭게 하지 못할 것이다.
세상 그 어떤 것도, 엄마의 맘을 아프게 하지 못할 것이다.
-어멍 다시 태어나면 나랑 또 어멍 아들로 만나 살까?
우리는 안다.
어멍이 싫다고 해도, 내가 싫다고 해도,
만일에, 정말 만일에 다음이 있다면,
우리는 만날 것이다.
어멍과 아덜로.
마음껏 사랑하고, 마음껏 사랑받고.
열나게 싸우고, 버릇처럼 화해하고.
하루종일 재잘재잘 떠들고.
그러고는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하면서.
때로는 울겠지만,
훨씬 더 많이 웃으면서.
반드시.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