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도천에서(연과 아음)
연(硯, 緣, 戀)
나는 어찌하여 검을 더디 들어 올렸던가.
나는 어찌하여 그대의 이름을 불러 그대가 나를 막아서게 했던가.
나는 어찌하여 그대의 은혜로 얻은 삶을 그대에게 되돌릴 수 없었던가.
아음 그대는 나의 모든 처음과 마지막이었다.
아음 그대는 내게 이름이 무어냐고 물어준 첫 사람이었다.
이름은 존재의 본질이니 갈고 닦아온 삶 속에 마음 뉠 곳 없었겠노라 하였다.
그대는 아음이니 그대의 높은 소리는 흐드러져 충만하였다.
그대의 의연한 소리에 벼린 마음 비로소 기대어 누울 수 있었다.
그리하여 아음 그대는 끊임없이 솟아나는 내 첫 마음 샘의 근원이었다.
샘에 비친 하늘과 구름과 해와 달, 샘에 스치는 바람은 온통 아음 그대였다.
헌데 아음 그대는 홀로 어디로 가려 하는가.
더 이상 그대의 청아한 목소리 들리지 않아 기대어 뉠 곳 없는 나의 마음은 정처 없이 흩어져 스러져간다.
아음 그대는 나의 모든 낮과 밤이었다.
아음 그대가 불러주는 나의 이름으로 하루가 시작되고 하루가 마무리되었다.
나의 이름은 불러주는 그대로 인하여 삶의 의미가 더하여졌다.
길을 따라 올라오는 그대의 명랑한 미소에 나는 떠오르는 해를 보았다.
길을 따라 내려가는 그대의 쓸쓸한 미소에 나는 차오르는 달을 보았다.
그리하여 아음 그대의 영롱한 눈길은 햇빛을 따라 마중하고, 달빛을 따라 배웅하는 내 길의 길라잡이였다.
낮을 인도하는 인연이 해이듯이, 밤을 인도하는 인연이 달이듯이 나의 인연은 오로지 아음 그대였다.
헌데 아음 그대는 어찌 나를 홀로 남겨두는가.
더 이상 그대의 맑은 눈동자 보이지 않아 햇빛과 달빛 깃들지 않는 어둠 속에서 나의 마음은 길을 잃었다.
내 삶의 처음과 마지막이여, 내 삶의 낮과 밤이여
그러니 언제고 다시 태어나 주오.
내 삶의 마지막까지 함께 하기 위하여 내 모든 낮과 밤을 건너 그대를 찾아갈 것이니.
아음(峨音)
단 하나뿐인 나의 연인이여
그대를 만나기 전 내 삶의 유일한 목표는 세상을 온통 어지럽히는 자, 그리하여 세상을 어둠 속으로 내몰려는 자의 숨통을 끊는 것이었소.
그러나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만난 그대는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는 자, 그리하여 세상을 각기 본디 저마다의 색으로서 넉넉하도록 살아 숨 쉬게 하는 이였소.
그런 그대를 어찌 연모하지 않을 수 있었으랴.
칼날 위의 위태한 운명을 짊어진 나의 활에 바람의 길을 열어준 그대여
살얼음 위에 내던져진 아비와 딸의 운명에 속절없이 흘리는 눈물을 말없이 다독여준 그대여
이리 작디작고 보잘 것 없는 나를 위해 어찌 세상의 질서를 해하는 자에게 천하보다 귀한 목숨 내주려 하였소.
목숨 다 바쳐 그대를 지킴으로 내 간절히 바라는 바 세상을 구했으니 그것은 곧 그대가 나를 구함이라.
이 광활한 세상 속 흉포한 삶의 끝에서 나를 구원한 이여
그대와 나, 우리 서로를 구원하였으니 이제 더는 그대, 나를 위해 울지 마오.
그대의 원대로 나 다시 태어나 그대를 기다릴 것이니 이제 그대, 그때까지 부디 그대를 위한 삶을 사오.
삼도천에서(연과 지아)
연
너 없이 홀로 떠도는 이곳은 나의 지옥이다.
삶도 죽음도 아닌, 시작과 끝도 알 수 없는, 낮과 밤의 경계도 없는 심연에서 나는 한줄기 유일한 빛 너를 그린다.
첫눈은 내렸을까. 너 혼자 술잔을 기울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크리스마스는 지났을까. 너 혼자 바닷바람을 맞으며 걷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새해 첫날은 언제쯤일까. 너와 함께 부모님을 뵙고 떡국을 먹고 어머님과 바둑을 두고 아버님과 김밥을 싸고 낚시도 갔어야 하는데.
찰나였으나 전부였던 우리의 시간 가운데 너를 만나고 한 번도 함께 해보지 못한 너의 생일이 나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헤집는다.
태어나줘서 고맙다고, 이 넓고 넓은 고단한 세상 속 이 많고 많은 이들 가운데서 나를 찾아내주어 고맙다고 말해줘야 하는데. 내 손으로 직접 선물을 건네야 하는데.
삼도천 앞을 떠나지 못하고 애원하는 너의 울음소리가 들려.
그러면 안 돼, 지아야. 거기서 그러고 있으면 안 돼.
그리움은 나의 몫이니 나에게 다 안기고 너는 너의 자리로 돌아가야만 해, 지아야.
나는 너의 일상을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란다.
그러나 이제 다시는 닿지 못할 우리의 연, 그 두려움이 해일처럼 덮쳐와 지독하게 나를 할퀸다. 미지의 때를 기약할 수 있는 기다림은 차라리 달콤한 형벌이었다.
사실 나는 너무 무서워, 지아야. 결코 다시는 볼 수 없는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보고 싶어 미치겠어, 지아야.
지아
나는 왜 좀 더 빨리 겨눈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였을까.
나는 왜 좀 더 빠르게 너의 손에 들린 비늘을 막아내지 못하였을까.
나는 왜 뒷걸음치는 너의 손을 잡지 못하여 너 홀로 외로이 떠나게 하였을까.
함께일 수 없는 우리의 절망을 딛고 세상은 희망을 되찾았어.
제자리를 찾아가는 세상 한가운데서 내 삶의 유일한 결계였던 너의 세상을 잃은 나는 갈 길을 찾지 못해 오늘도 이곳에 서 있어.
오롯이 나를 향한 올곧은 너의 시선을 기억해.
나를 떠나면서도 마지막 이별의 인사를 건네지 않은 너를 기억해.
그래서 나는 고마워, 이연.
‘잘 있어, 안녕히’라는 인사를 하지 않아줘서 고마워.
너 없이 나는 잘 있을 수 없을 테니, 너 없는 날들이 안녕할 리 없을 테니.
마침표를 찍는 인사 없이 떠났으므로 너는 내게 반드시 돌아올 테니.
이제 기다림은 나의 몫이니 나는 기다리고 또 기다릴 거야. 잊지 않고 또렷이 기억할 거야.
그러니 너는 언제라도 내게 돌아와야만 해, 이연.
돌아와서 우리 생애 끝나지 않을 인사를 건네줘.
나와 눈 맞추고 내 이야기를 들어줘. 네 목소리를 들려줘.
아무리 귀를 막아 봐도 흘러넘치는 나의 눈물을 네 손으로 닦아줘.
너를 찾아 헤매느라 해어진 내 마음을 두 팔 벌려 품에 안아줘.
세상에 쏟아져 내리는 그 비를 나 혼자 맞게 하지 말아줘. 나에게 너의 우산을 씌워줘, 이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