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일하느라 연본 브이앱은 못 보고 카테만 슬쩍슬쩍 훔쳐보다가 공원씬 딸 아니라는 글들 올라오는데 너무 충격 받아서 이제까지 상플 올린 거며 요청받아서 쓰고 있던 것까지 다 삭제해 버리고 이무기처럼 소멸할 뻔
그치만 12회, 16회 연지아 대화 내용 보면 2세에 대한 의지가 있는 게 너무 보여서 언젠간 낳겠지, 시즌2에서 보여주겠지 하는 마음으로 요청받은 거 이어서 쓰기는 했는데... 근데 왜 자꾸 눈물이 나냐.
참 이상한 일이었다. 아니, 이상한 일이라기보다 무언가 이상하게 눈에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 지아 퇴근 시간보다 한참 일찍 도착한 이연은 방송국 근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민트초코 칩을 먹는 중이었다.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은 사람이 둘 뿐이라 가게 안은 한산했다. ‘저건 대체 뭐야. 저 좀 알아봐 달라고 일부러 저러는 거야 뭐야.’ 테이크아웃 위주의 홀도 작은 매장에서 저런 노골적인 시선이라니. 여자는 교차로 꼬리물기 하듯 뒤를 밀고 들어왔을 때부터 언짢게 하더니 쌩하니 앞질러 주문을 하고는 가장 안쪽에 자리를 잡은 이후로 내내 이연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더는 모르는 척 할 수가 없어 팔짱을 낀 채 보란 듯 시선을 받아내던 이연의 입에서 실소가 터짐과 동시에 물고 있던 숟가락이 떨어졌다. 이연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본 여자의 입꼬리가 한껏 솟아올랐다. 여자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이연이 건들대며 다가오는 모양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올려다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여자는 도무지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보이는 각도에 따라 지아보다 더 어려보이기도 하고, 중년 그 이상으로 보이기도 하는, 여러 나이대의 얼굴이 녹아든 여자였다.
“이봐, 할망구.”
여자와 마주 앉은 이연이 대뜸 삿대질을 했다.
“인간이 됐다기에 못돼 처먹은 성질머리 좀 죽었나 했더니 예나 지금이나 시건방진 녀석.”
미소를 거두고 여자는 이연의 손가락을 무심하게 쳐냈다.
“며칠 전부터 찜찜하다 했어. 내 뒤 밟은 거 할망구 맞지.”
“영영 눈치 못 챌 줄 알았더니만 아예 감을 잃진 않았나 보구나.”
“감을 잃은 게 아니라 할망구 얼굴이 좀 변했어야 말이지. 없던 주름 생기는 건 봤어도 자글자글 그 많던 주름 다 어디로 갔나 몰라.”
차라리 둔갑을 했더라면 좀 더 일찍 알아챘을 거였다. 이렇게나 세월을 역행한 비주얼로 수백 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어리둥절했을 수밖에.
“위아래 없는 말버릇도 여전하고.”
“뭐 얼굴만 보면 나보다도 한참 어려보이시는데 위아래를 따지시나. 할망구 덕분에 능력 좋은 병원장 건물주 되셨겠어.”
“삼도천에 빠져서도 가라앉지 않고 살아 돌아온 게 그 주둥이 때문이라는 소리가 영 헛말은 아니었던 것 같구나.”
별일 아닌 양 가벼운 농으로 후벼 파는 말에도 이연은 그저 피식 웃어보였다. 드러내 보이지는 않았으나 600년 세월을 건너 이제야 제대로 된 상처치료제 만나 본래의 저답게 사는구나 싶어 삼신은 퍽 기꺼웠다.
“됐고. 삼신이 내 뒤는 왜 밟아. 왜 시술 말고는 통 할 일이 없어 무료하신가. 근데 그럴 때가 아니지 않나. 저출산 시대에 명백한 근무태만. 안 그래?”
“입은 삐뚤어졌어도 선후 관계는 바로 잡고 넘어가자. 내 근무태만으로 이 꼬라지가 된 게 아니라 다들 안 낳으려고 아등바등 애를 쓰는 통에 점지하는 일이 더 신중해질 수밖에 없는 게야. 허고, 나 방금까지도 산후조리원 순회 중이었어, 이 녀석아.”
“아아~, 그러시구나.”
시답지 않은 변명이라는 듯 귓등으로 흘린 이연이 남은 아이스크림 통을 손에 들고 냠냠 맛나게도 떠먹었다. 이게 지금 누구 놀리나.
“넌 어째 변한 게 하나 없니. 내 하는 일이 우스워?”
“그럴 리가. 근데 하는 일은 우습지 않은데 점지를 그 따위로 하시니까.”
“그 따위? 새파랗게 어린놈이 말본새 하고는.”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 전, 점지하러 가는 길에 웬 어린놈 하나가 제 흉을 보기에 그 이마에 냅다 꿀밤을 먹였더랬다. 그러나 녀석은 움츠러들기는커녕 되레 큰소리를 쳤다.
“자식 없이 사는 삶이 그 얼마나 애간장 끊어질 일이면 예까지 와서 죽을 둥 살 둥 빌고 있겠소. 피죽 한 그릇도 못 먹은 양 저 휘청거리는 것 좀 보오. 저이는 벌써 백 일째란 말이오. 저런 이들에게나 점지할 일이지 그러게 입이 열도 넘어 건사하기도 빠듯한 이에겐 왜 또 점지를 하는 것이며, 딸만 줄줄이 아들자식 원하는 집에 딸자식이 또 웬 말이란 말이오. 성미 고약할 것으로 따질 적에 둘째가라면 서러울 이가 삼신 할망구요.”
이놈은 삼신을 대체 무엇으로 아는 겐가. 정녕 두렵지도 않은 겐가. 백두대간 지나며 마주칠 적마다 훈계조에 말이 짧아지던 녀석은 그러나, 제 하나뿐인 짝을 잃어버린 날로부터 귀를 막고 입을 닫아버렸다. 세상천지 홀로인 듯 어둠 속으로 스며든 이연의 운명이 삼신은 제 탓인가 하였다. 햇살같이 어여쁜 아이를 궁에 점지하지 말 것을. 세상 어지럽힐 기회만 노리던 음흉한 이무기 놈이 인간사 최고 권력의 태중 아이를 엿보아 제 것으로 탐할 줄 알았으랴. 삼신은 살아있으되 살아있는 것이 아닌 이연을 차마 위로할 수 없어 이후로 부러 더는 찾지 아니하였다.
“무시당하기 싫음 제대로 좀 점지를 하시든가.”
저는 몰랐을 테지만 오며가며 귓속을 파고드는 이연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면 삼신은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고는 했다. ‘저 버르장머리 없는 주둥이’ 싶으면서도 그간 탈의파가 단속을 제대로 하였구나 싶어 안도하였다.
“내 것도 먹어 볼 테냐.”
손도 대지 않은 아이스크림을 삼신은 이연 앞으로 밀었다. 미심쩍은 듯 이연이 눈썹을 치켜들었다.
“이건 무슨 맛인데.”
“무슨 맛인지는 모르겠고 이름은 확실히 맛난 것이다. 아빠는 딸바봉.”
마주 앉고 처음으로 이연이 소리 내어 웃었다. 예상치 못한 이름 때문이기도 했지만 삼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콧소리 때문이었다.
“왜 엄마는 외계인도 드시지 않고.”
“그것도 좋지. 제 자식 한없이 귀애하여 정신 못 차리는 아비에 자식 일이라면 없던 괴력도 생겨나 구해낼 줄 아는 어미라. 이상적이지 않으냐. 부모 될 자격 차고 넘치는구나.”
너와 네 각시도 이제 때가 되었느니. 삼신이 이연을 찾은 이유였다.
“아이스크림 이름에 의미부여 한 번 거창하네.”
“내 오늘밤 네게 선물 하나 보낼 참이니 즐거이, 정답게 받아보아라.”
말을 마친 삼신이 이연이 뭐라 할 새도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매장을 빠져나갔다. ‘네 놈 입에서 두 번 다시 근무태만 소리 안 나오게 일하러 가련다.’
그날 밤, 벨이 울렸다. 현관 앞에는 사람 대신 붉은 비단보에 싸인 제법 묵직해 보이는 물건 하나가 놓여 있었다. 삼신이 보낸다던 선물인가. 조심스레 비단보를 풀자 바구니 가득 담겨있던 앵두가 그 수를 부풀리기 시작했다. 다급해진 이연이 앞치마로 그것을 받아내었다. 이연의 앞치마에 붉디붉은 앵두가 금세 한 가득이었다. 번쩍 눈을 뜬 이연 곁에 지아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태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