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핫하게 이야기 된 동정 관련 글을 쭉 봤는데 처음 글을 올렸던 작성자가 첨부한 이미지에 관심이 갔어.
사진이 첨부 된 블로그에 가서 확인을 해보니 애초에 동정에 관련해 첨부된 이미지가 아니고 고려양을 설명하는 부분에 첨부된 이미지더라고.
나는 고려양 부분을 제대로 알아야 우리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거 같아서 이 부분에 대해 중점적으로 봤고 논문 찾아보며 공부하던 와중에 함께 보면 좋을거 같아서 정리해봤어.
어제부터 자료 찾고, 읽고, 내용 정리했는데 하루만에 급하게 요약하느라 많이 부족하지만 재밌게 봐줘! 줄이고 줄여도 이게 능력의 한계였어.
혹시 틀린 부분이 있거나 추가로 알면 유익한 정보 있으면 말해주라. 같이 공부하자.
아래가 작성자가 첨부했던 이미지야.
블로그의 해당 사진 밑에 '원말명초에 새롭게 등장한 아오췬'이라고 되어 있던데 아오췬 자체가 고려양의 영향을 받은 의복이야.
아오췬은 한복의 특징인 상유하고(위는 저고리, 아래는 바지)의 형태가 나타나는 옷이라고 해. 한복은 남성, 여성 할 것 없이 기본적으로 바지와 저고리를 입고 그 위에 포(겉옷)나 치마를 입는 형식이야. 반대로 중국 고장극을 떠올려보면 대부분 긴 치마를 입고 겉에도 긴 상의를 입고 다니잖아. 이건 상의하상(상의와 치마)이야. 긴 치마가 기본이고 그 위에 상의를 입는 원피스 형식이 중국식 한푸야. 우리식인 한복은 저고리와 바지가 구분된 투피스 형식이고, 과거부터 지금까지 벗어난 적이 없어.
"우리나라의 저고리는 삼국시대에 유(褕), 삼(衫), 의사포 (衣似袍), 또는 위해(尉解) 등으로 사용되었으며 ‘위해’는 ‘위에’ 옷 이라는 소리로 표기된 것으로 본다. 한복은 남녀 모두 하의 위에 다 상의를 입는 형식이지만, 한푸는 남녀가 모두 원피스 형태를 둘러매는 형식, 치마위에 긴 겉옷을 입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는 상의 위로 치마를 입는 방식으로 변하기도 하였는데, 치마위에 상의를 입는 우리나라의 한복과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한푸의 한 종류라는 의상제(衣裳制, yīshang zhì)는 우리나라의 복식과 닮은 짧은 상의와 치마로 구 성된 투피스 형태의 복식이다. 그런데 이 복식의 형태가 고려양이 유행하던 명나라 시기의 풍속도와 흡사하다는 점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한푸의 형태는 본래 매우 긴 상의와 치마, 혹은 원피스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투피스 형식은 고려때 건너 가 고려양의 유행으로 확산되었다가 홍치제의 고려양 금지로 점차 사라졌으나, 현재도 많은 한푸 형식은 긴 상의와 치마, 또는 원 피스의 형태이다. 이는 남북조시대, 오호십육국시대 등 북방민족 이 중원을 차지한 시기가 한족이 차지한 시기보다 더 길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 다른 차이점이 있는데 실루엣이야.
"한복은 치마가 풍성한 형태를 띠며 볼륨감이 크다. 이는 한복 치마의 풍성한 볼륨감 실루엣은 주름이 많이 들어있기 때문인데 여러 폭의 옷감을 연결하여 풍성하게 만든다. 이와는 반대로 한푸는 옷을 휘감아서 착용하게 되므로 일자로 떨어지는 실루엣을 가지며 몸매가 비교적 드러나는 슬림한 형태를 이룬다. 고대부터 중국 한족의 미의식이 가느다랗고 슬림한 것에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각 민족의 미적 기준이 가 장 잘 드러나는 의복에서 실루엣은 중요한 요소이다. 중국은 슬림 한 실루엣을 고수해 왔으며, 현 중국에서도 가장 선호하는 미인상 은 건강을 해칠 정도로 마른 몸매의 여성이다. 한국은 고구려 벽화에서 볼 수 있듯이 치마를 풍성히 착용했고, 겹겹이 착용하는 속옷의 문화가 발달하였다. 속속곳 → 바지 → 단속곳 순으로 속바지를 적어도 2개 이상 입었고 겉옷인 단속 곳만을 착용하기도 하였으며, 여기에 속치마를 입고 겉치마를 착 용하였는데, 본래 이렇게 일곱 겹을 갖춰 입 은 후 겉치마를 입는 것이 고위층의 정식적인 옷차림이었다. 따라서 한복은 자연히 풍성한 실루엣을 가질 수밖에 없다. 치마는 신분과 지위에 따라 6폭부터 시작하여 넓게는 12폭까지 연결하여 치마를 풍성하게 제작하여 넓게 착용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 한복은 치마와 저고리를 착용하면 전체적으로 풍성한 종 모양의 실루엣을 형성하고, 한푸의 슬림한 실루엣과는 육안으로도 확연히 구분된다."
김지수, 나영주 선생님의 한복과 한푸의 차이점 분석에 관한 연구
한복과 한푸의 차이를 약간은 알겠지??
그런데 문득 저 그림은 어디서 온 그림일까가 궁금하더라고.
제대로 된 그림을 보고 싶어서 조사를 했고 아래의 이미지를 찾을 수 있게 됐어.
아래 이미지는 내가 학회지에서 찾아왔는데 “Petticoat Fever” Driven by Chosŏn Korea Garments: Exploring a “fad” in Early Ming China and Its Implications for Regional Interactions between the Chosŏn and Ming Dynasties.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에서 출간하는 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History에 2022년에 실린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인 구도영 선생님의 학술논문이야. 영문으로 된 논문이고 관심있는 덬은 찾아봐.
간단하게 요약하면 의복을 통한 한중 교류에 대해 고찰한 내용이야.
위의 그림은 아래의 그림에서 좌측 상단에 있는 일부분이었어.
아래 그림은 중국국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명나라 황제의 등불축제라는 그림의 일부분이며 이름은 '명헌종원소행락도'야. (해당 논문 11p에 첨부)
그리고 이 그림은 원말명초 시기의 한중 교류를 잘 알 수 있는 증거이며 고려양의 증거라고 해.
Partial Images of Ming Emperor Xianzong’s Tour of the Lantern Festival (明 憲宗元宵行樂圖), Collection of the National Museum of China
Ming Emperor Xianzong’s Tour of the Lantern Festival is a long scroll drawing of 37 cm [14.5 inches] in length and 624 cm [245.7 inches] in width. Figure 1 consists of partial images of the scroll. The National Museum of China, which has ownership of this painting, explains that it depicts Emperor Chenghua enjoying the first full moon of the lunar year in the imperial palace in 1485. In the images, eunuchs and palace maids are portrayed wearing skirts that look like umbrellas spread out. They are in fact wearing mamigun. Using this painting as evidence, the National Museum of China stated that mamigun were in fashion in Beijing.13 It seems indisputable that mamigun were popular in the years of Emperor Chenghua, as can be confirmed in the two literary accounts (a and b) and a painting dated from the fifteenth century, all examined above.
-> 대충 요약하자면 명나라 현종의 등불축제라는 두루마기로 구성된 그림이며, 청화황제사 1485년에 황궁에서 정월대보름을 즐기는 그림이다. 환관과 궁녀들이 우산처럼 펴진 치마를 입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마미군'이라는 치마다. 마미군은 청화황제 시대에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위의 '명헌종원소행락도' 속 궁녀들이 궁에서 고려양 옷(마미군)을 입고 그림에 그려질 정도면 저 시대에 얼마나 고려풍이 유행을 했는지 상징적으로 알 수 있을거 같아.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마미군이 뭔데?
마미군을 알기 위해서는 고려양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어.
나도 지금 이해하느라 머리가 아픈데 조금만 더 힘내보자!!!!
고려양이라는 풍습이 생기게 된 원인은 다양하지만 주요 경로는 고려와 조선전기에 외적의 침략을 막기 위해 시행된 회유정책의 하나인 공녀제도에서 비롯됐어.
이 제도는 비록 고려와 조선에 악영향을 끼쳤으나 중국에 큰 영향을 미쳐 "고려양(高麗樣)”, “고려풍(高麗風)”이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였다고 해.
단순히 의복에만 영향을 준 게 아닌 생활 전반적인 부분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어.
아래에 열거할 내용들은 박은옥 선생님의 한·중 문화교류에서 공녀(貢女)의 역할 ― 복식(服飾)·음식(飮食)·음악(音樂)을 중심으로 라는 논문에서 아래 내용들을 복식부분 위주로 발췌해 왔어.
그리고 해당 논문만이 아니라 다른 논문에서도 공통적으로 고려양의 증거로써 내 놓는 부분이라 신뢰도가 높다고 판단 돼.
"공녀의 대량 유입으로 궁중과 상류층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으며, 심지어 고려의 여인을 얻은 후에야 비로소 명가(名家)17)가 될 수 있다는 설까지 있을 정도였다. 한반도의 여인들이 중국에서 많은 총애를 받고, 많은 인기를 얻었던 이유는 아마도 이들이 온유하고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사람도 잘 섬겼기 때문이다.18) 심지어 상류층의 집에는 반드시 한반도에서 온 여자 아이를 여종으로 삼아야 비로소 벼슬아치로 간주하였다는 기록도 있다.19) 이는 당시의 중국 사회에 한반도 여인에 대한 수요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간접적으로 설명한 부분이며, 반 대로 한반도의 여인이 중국 사회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한반도 여인의 인기와 수요에 따라 이들의 복식에 대한 관심도 자연스럽게 높아지게 되었으며, 이는 궁중의 여인들이 고려 여인의 복식을 따라하고 모방하는 모습을 통해서도 확인 할 수 있다."
● 張昱, 宮中詞 : “宮衣新尚高麗樣, 方領過腰半臂裁. 連夜內家爭借看, 爲曾著過禦前來.”
장욱(張昱), “궁중사(宮中詞)”: “궁중 의복 새로이 고려 양식 숭상하니 허리 지난 모난 깃에 짤막한 옷소매네. 밤마다 궁중 에서 앞 다투어 구경하니 전에 이 옷을 입고 어전에 왔기 때문이라네.”
● 可閑老人集 권2 : “緋國宮人直女工, 衾禂載得內門中. 當番女伴能包袱, 要學高麗頂入宮.”
가한노인집(可閑老人集)권2: “붉은 비단 나라 궁녀들 직공에 능하여 궐문 안에서 이불을 수레에 실어서 간다네. 당번이 된 여자 짝이 보자기를 잘 만드니 고려 여인을 흉내 내어 머리로 (보자기를) 받쳐 입궁한다네.
-> 2가지의 중국시에 알 수 있는건 다음과 같아. 첫번째 시는 원나라 한림학사의 장욱이라는 인물이 궁중의 일을 읊은 노래야. 원나라 궁중에서는 고려식의 복식이 매우 유행하였다는 걸 기술했으며, 앞 다투어 고려여인의 의복을 구경할 정도로 유행이었다는 거야. 그리고 모난 깃이라고 표현된 부분의 한자를 보면 方領이라고 되어있는데 방령(네모난 깃)이야. 원나라 궁중에서 유행한 고려의 복식 양식이 "방령과요반비재"라는 걸 확인 할 수 있어. 중알못이지만 한자를 하나씩 풀어보자면, 오늘날 복식사학계에서 ‘방령(方領)’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모가 나게 만들어서 붙인 깃’을 뜻한대. 그리고 "과요", "반비" 짧은 허리에 팔이 반인(반소매)의 옷! 즉 한복의 저고리 형식과 반비 저고리가 중국 사람들이 원래 착용하던 긴 원피스 형태와는 확연히 구분된다는 걸 알 수 있어. 고려양이 들어오기 전에는 중국에서는 짧은 상의와 반소매 옷을 입지 않았다는 뜻이며, 고려양식의 의복을 입고 있다는 사실이 중국문서에 기록된 셈이야. 그리고 고려 여인들의 의복은 몰론이고 행동까지 흉내냈다고 적혀있어. 이런 현상은 우연이 아니라 궁중에서 매우 보편적인 현상이라 설명되어있어. 실제로 당시 궁에서 일하는 급사와 사령이 대부분 고려인이어서 그들이 사용하는 의복, 신발, 모자, 물건등이 유행했다고해.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는 원말명초에 공녀로 꼽힌 조선여인들을 소개하면서 고려말 원나라 궁중에서 고려여인들이 일으킨 ‘고려패션’을 전하고 있다.
중국 내몽골(內蒙古·네이멍구) 적봉(赤峯·츠펑)에서 발굴된 원나라 시대 무덤 벽화(왼쪽 사진)와 원나라 시대 방령(나란히 마주보는 깃·오른쪽 사진). 나란히 마주 보는 깃을 달고 허리까지 오는 짧은 소매의 덧옷(반비)이 몽골(원) 궁정에서 대유행한 고려풍의 옷이었다고 한다.|김윤정 서울역사편찬원 전임연구원의 논문에서
대전 목달동의 송효상(1430~1490?) 묘에서 출토된 방령(나란히 마주보는 깃 상의). 고려말 원나라 궁정에서 유행한 고려양의 패션이다. |대전역사박물관 소장·김윤정 전임연구원의 설명
이게 고려양인 '방령과요반비재'를 뜻하는 옷이야.
방령과 관련해서 더 궁금하면 아래의 세 논문 찾아봐봐. 방령에 대해 심도있게 알 수 있어. 매우 어려움주의.
백금현 선생님의 옷깃과 옷섶의 形態變化에 대한 硏究 -朝鮮時代의 저고리와 袍-
이민주, 최은수 선생님의 조선시대 방령의 확산과 그 의미
김숙아, 최규순 선생님의 조선시대 방령옷 형태 연구
애초에 방령은 중국에도 없는건 아니었어서 한국의 방령과 비교해서 구별하는 능력이 필요해 보여.
동정 글 설명해 준 덬이 쉽게 설명해준 게 있으니 그 글을 확인해줘!
이어서 고려양에 대해 보자면,
● 元史 권78, 輿服志一:“百官質孫, 冬之服凡九等, … 夏之服凡十四等, 秦納石失一, 聚線寶裏納石失一, 棗褐渾金間絲蛤珠一, 大紅官素寶裏一, 大紅明珠答子一, 桃紅、藍、綠、銀褐各一, 高麗鴉青雲袖羅一, 駝褐、茜紅、白毛子各一, 鴉青官素帶寶裏一.”
원사(元史) 권78 “여복지(輿服志)”: “백관의 질손복은 겨울에 모두 9등급으로 나눈다. … 여름의 질손복은 모두 14 등급으로 나 눈다. 진(秦)의 금금(金錦: 실크의 한 종류)하나, 보리(寶裏)를 장식한 금금(金錦) 하나, 진주를 장식한 대추 갈색 혼금간사(渾金間絲: 실크의 한 종류) 하나, 보리(寶裏)를 장식한 진한 빨간색 관소(官素: 실크의 한 종류) 하나, 빨강색 명주답자(明珠答子: 여러 조각으로 만듬, 실크의 종류 에 속함) 하나, 분홍색, 파란색, 초록색, 은갈 색 각각 하나, 고려 검푸른 색 운수라(雲袖羅) 하 나, 낙타 갈색, 어두운 빨강, 백모자(白毛子) 각각 하나, 보리(寶裏)를 장식한 검푸른 색 관소(官 素) 하나.”
->여기서 알 수 있는건 다음과 같아. "원나라 관리의 질손복(質孫服)은 계절에 따라 여름과 겨울의 두 가지 로 나누어지고, 여름과 겨울의 질손복(質孫服)은 다시 열네 등급과 아홉 등급으로 세분되었 다. 또한 등급에 따라 질손복(質孫服)의 원단과 색깔도 서로 다르다. 여름 질손복(質孫服)의 열 번째 등급은 “고려아청운수라(高麗鴉青雲袖羅)”로 되어 있고, 고려의 복식과 관련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원나라의 상류층에도 한반도의 복식문화가 어느 정도 흡수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 陶宗儀, 南村輟耕錄권28:“杜清碧先生本應召次錢唐, 諸儒者爭趨其門. 燕孟初作詩嘲之, 有‘紫藤帽子 高麗靴, 處士門前當怯薛’之句, 聞者傳以爲笑. 用紫色棕藤縛帽, 而制靴作高麗國樣, 皆一時所尚.”
도종의(陶宗儀), 남촌철경록(南村輟耕錄) 권28: “두청벽 선생은 소집에 응하여 전당에 갔다. 여러 유생들은 앞다투어 그의 주소로 달려갔다. 연맹초는 시를 지어 이를 비웃었다. 시에는 ‘자색의 종등(棕藤)으로 모자를 묶으며, 신발은 고려 의 모양으로 만드네. 처사들은 문 앞에서 잡역부를 담당하네. 란 구절이 있다. 듣는 자가 모두 이를 전하여 웃는다. 자색의 종등으로 모자를 묶고, 고려의 모양으로 신발을 만든 것은 모두가 당시에 유행하였던 것이다.”
● 양유정(楊維楨), 무제효상은체(無題效商隱體): 繡靴蹋踘句驪樣, 공 찰 때 신은 수놓은 신은 고려 것을 닮았고, 羅帕垂彎女直妝. 비탄 손수건은 구부렸다 폈다하며 여인들이 치장하네. 願汝康強好眠食, 그대여 편안히 잘 자고 잘 먹기를 바라네. 百年歡樂未渠央. 오래토록 근심 없이 즐겁기를.
-> 여기서 알 수 있는건 다음과 같아. 당시 중국에는 고려의 모자와 신발이 유행한 정황을 확인 할 수 있어. 모든 시를 통합해보면 원나라 궁궐의 여인의 복식, 관리의 질손복(質 孫服), 심지어 일반인에게까지 모두 고려의 복식이 유행하였으며, 다양한 신분과 계층의 중국 인이 고려의 복식에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어.
이렇게 원나라 말기를 거치며 명나라때 유행한 한반도의 복식이 나오는데 바로 마미군이야.
● 陸容, 菽園雜記:“馬尾裙始於朝鮮國, 流入京師, 京師人買服之, 未有能織者. 初服者惟富商、貴公 子、歌妓而已. 以後武臣多服之, 京師始有織賣者, 於是無貴無賤, 服者日盛. 至成化末年, 朝臣多服之者 矣.”
육용(陸容), 숙원잡기(菽園雜記): “마미군은 조선에서 시작하여 경사에 들어왔으며, 경성 사람은 사서 입었지만 만들 줄 몰랐 다. 처음에는 부상, 귀공자, 그리고 가기만 입었다. 후에 무신들이 많이 입었으며, 경성에도 그걸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 귀천 없이 입는 자가 날로 늘었다. 그리하여 성화 말년에는 신하 들도 대부분 이를 입었다.
● 查繼佐, 罪唯錄 권4, 冠服志:“(明憲宗)成化中, 馬尾裙盛行. 此制始於朝鮮國, 流入京師, 京師人亦漸習 爲之, 閣臣萬安, 冬夏不脫.”
사계좌(查繼佐), 죄유록(罪唯錄) 권4, “관복지(冠服志)” : “성화년간(1465~1478)에는 마미군이 유행하였다. 이것은 조선에서 시작하여 경사에 들어왔다. 경성사람들도 점차 이를 입는 것에 익숙해졌고, 각신(閣臣)인 만안(萬安)은 겨울과 여름에도 벗지 않았다.”
● 馮夢龍, 古今笑史 :“京中士人好着馬尾襯裙, 因此官馬被人偷拔鬃尾, 有誤軍國大計, 乞要禁革.”
풍몽룡(馮夢龍), 고금소사(古今笑史) : “경성의 지식인은 마미군을 입는 것을 좋아한다. 때문에 관말의 말갈기와 꼬리를 홈쳐 뽑는 경우가 생겼다. 이는 군대의 큰일을 지체하는 것이니 금지하기를 청한다.”
● 王錡 寓圃笔记 "发裙之制,以马尾编成,系于衬衣之内。体肥者一裙,瘦削者或二三,使外衣之张,俨若一伞。"
만포일기 : "치마를 넓히는 제도는, 말꼬리를 옷안에 엮어서 만든다. 몸을 비대하게 만든 하나의 치마로, 마른 사람은 혹 두개 세개를 입는다, 옷을 바깥으로 넓게 퍼지게 만드는데 쓰는데, 우산과 같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건 다음과 같아 "모두 마미군(馬尾裙)과 관련된 기록이며, 조선에서 전래된 마미군(馬尾裙)은 말총으로 짜서 만든 옷으로 처음에는 부상, 귀공자, 그리고 가기들만 입었 으며, 후에 무관들도 마미군을 입기 시작하였다. 각신(閣臣)인 만안(萬安)은 겨울뿐만 아니라 더운 여름에도 마미군을 벗지 않을 정도로 이를 애용하였다. 심지어 마미군의 유행으로 마미 군을 만드는 원재료인 말갈기와 꼬리를 홈쳐 뽑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특히 관말의 말갈기와 꼬리까지 홈쳐 뽑았기 때문에 군대의 사기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는 우려가 초래되었고, 마 미군을 입지 못하게 하는 금지령을 내려달라는 상소까지 나타났다. 이러한 것을 보면 마미군 의 유행을 통하여 한반도의 복식이 명나라의 복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확 인할 수 있을 것이다"
16세기 한복 복원본. 왼쪽은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품, 오른쪽은 이태옥한복연구소 소장품이다.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이게 조선 초기 형태의 마미군이야. 진짜 우산처럼 펼쳐진 모양같지? 마미군은 말총을 속옷에 묶은 다음에 그 위에 여러겹의 치마를 입어. 일종의 속치마로써 치마를 볼륨감있게 펴주는 역할을 한거지. 마치 서양의 옷 크리놀린 같은데 우리나라에도 한 때 이런 스타일의 한복이 있었다는게 놀라워. 정말 예쁘지?
우리가 대부분 기억하고 있는 한복의 이미지가 조선시대 후기 이미지기 때문에 조선시대 이전의 한복의 형태는 다소 낯설수 있는데 유심히 살펴봐야 할 거 같아.
조선 전기때만 해도 고려 의복의 영향으로 널널한 저고리와 긴 옷깃, 두꺼운 옷깃 너비, 풍성한 치마가 특징이었대.
점차 조선 후기로 오면서 품이 점차 줄어들었고 저고리의 길이 자체가 짧아지면서 덩달아 옷깃의 길이, 옷깃의 너비 또한 줄어드는 모습을 보인다고 해. 저고리가 짧아지니 치마는 점점 길어지는 경향을 보였고. 개화기(20C)가 되어서 지금 형태의 한복으로 정착했어.
조선 전기
그리고 이 마미군은 제주도와 연관이 있어.
Map 1. Chosŏn and Ming Regions cited in the Records of Mamigun and Chongŭi
마미군이 유행한 중국의 ‘경사’, 즉 수도는 명나라의 초기 도읍(1368~1421)이었던 남경(南京·난징)인데, 조선의 마미군은 남경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강남’에서 유행한 패션이었어.
"Specially Promoted Officer (特進官) Yu Chakwang (柳子光) said, “Your servant heard that Cheju is significantly distanced from Seoul and the beneficial influence of the sovereign (王化) have not yet reached [the area]. Local magistrates conduct numerous illegal acts and weave horsehair clothing (鬃衣, chongŭi). Because of this, horsetail and mane are clipped off and taken away, and almost all of them no longer exist. Ch’oe Pu (崔溥) had drifted from Cheju to China. Someone asked, “Have you brought chongŭi with you?” He replied, “No.” Then the person who asked said, “When Yi Sŏm (李暹) came the other day, he sold a vast amount of chongŭi, yet you alone do not have any. You are indeed a scholar of poverty.” From this, one can see that since no one prosecutes [the law] in Cheju, local magistrates conduct illegal acts recklessly without any reluctance. … The King said, “It is appropriate to ban [the making and selling of] chongŭi completely. Deliberate and report upon the matter of appointing a concurrent overseer of stud farms (兼監牧).” The above article is a conversation between King Sŏngjong and Specially Promoted Officer Yu Chakwang in 1490 (Sŏngjong, Year 21; Hongzhi, Year 3). Several facts can be confirmed using this article. First, clothing made of horsehair like mamigun indeed existed in Chosŏn, but it was called “chongŭi” instead of “mami.” “Chong (鬃)” has the same meaning as “mami (馬尾)”; both refer to horsehair."
-> 대충 요약하자면, 성종21년 1490년에 특진관 유자광이 말하길 "제주도 수령들이 불법으로 말총으로 만든 옷을 만드느라 말 꼬리와 갈기를 잘라 거의 다 없어졌다."고 성종에게 보고했어. 그러면서 이섬이라는 자의 일화를 설명했어. 1483년 이섬이 표류 중 중국에 닿았는데 그 때 가지고 있던 마미군을 중국인들이 구매해갔다. 그리고 1488년 최부라는 사람이 다시 표류를 하게 됐는데 그 때 만난 중국인들이 최부에게 말하길 "이섬이라는 자는 전에 마미군을 가져왔었는데 당신은 없냐" 그랬대. 최부가 없다하니 당신은 빈한하다며 핀잔을 들었대. 이 이야기를 들은 성종은 그것을 만들어 판매하는 것은 위법이니 금지하는 게 적절하며 관리감독자에 대해 보고를 지시했다는 이야기야.
이를 통해 중국 강남에서 유행한 마미군이 해상을 통해 제주도에서 들어온 ‘패션’이었다는 사실을 짐작해 볼 수 있어.
그리고 명나라 초기때는 고려양이 아직까지 유행이었기 때문에 명나라 홍치제가 고려양 풍습을 금지하기 전까진 위의 그림에 나왔듯이 고려양의 형태가 일부 변화하며 유지되지 않았을까 싶어. '명헌종원소행락도'의 청화황제(성화)는 8대 명 헌종(1464-1487)이고, 홍치제는 9대 명 효종(1487-1505)이야. 홍치제가 고려양을 금지했으나 다시 송나라 복식으로 돌아가기까지 꽤나 시간이 걸렸고 고려양이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았어. 금지된 이후로 여성의 고려양 양식이 남성에게 옮겨간 사례가 있는데 철릭이라고 부르는 금의위의 관복에서 고려양의 흔적을 볼 수가 있어.
철릭
조사하면서 알았는데 '대명풍화, 여의명비전'이라는 중드가 원나라 말기~명나라 초기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인데 고려양 풍습을 그나마 잘 고증한 드라마래.
조금 알고 보니 달라 보이지 않아? 한복의 특징인 상유하고 형식의 투피스 형태를 띄고, 우산처럼 펼쳐지는 통 넓은 마미군을 볼 수 있어.
일반적인 중국식 한푸의 형식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지.
드라마 '대명풍화'
드라마 '여의명비전'
마지막으로 다시 이 그림으로 돌아와서 정리를 해보자.
원 간섭기의 회유정책의 일부로 공녀 정책을 실시했고 약 100년의 원간섭기 기간동안 차출되어 간 공녀들은 원나라에 큰 영향을 미쳤어.
먹고, 즐기는 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쳤으며 그들의 기록에 다양한 증거들이 남아있어. 고려양, 고려풍이라고 불릴 정도로 신드롬이었고 일반 백성부터 상류층, 궁중의 사람들까지 향유하는 하나의 문화가 되었던거지. 그래서 방령, 마미군 등 고려의 양식을 닮은 의복이 많아졌고 이것들이 인기를 끌게 돼. 이 인기는 원나라 이후 명나라 초기까지 이어졌으나 홍치제가 "고려양은 원래 중국의 풍습이 아니다." 라며 고려양을 금지해. 명나라 중후기를 지나면서 고려양은 서서히 사라지긴 했으나 완전히 사라지진 못했어. 그리고 결국 명나라는 멸망했지.
그런데 이제와서 고려양이 명나라에 존재했다는 이유만으로 한푸의 일종이라면서 역사왜곡을 시도하고 있어. 일부 중국 유저들은 “한복은 중국의 명(明)나라 의상”, “중국 55개 소수민족 중 조선족의 옷” 등의 주장들을 펼쳤고, 그러면서 우리의 한복을 중국의 ‘한푸(漢服)’라고 가리키기도 했어. 여러 문헌에 남겨진 증거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중국은 우기기를 시전하고 있어. 한복 공정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돼. 한푸는 무엇이고 한복과 한푸의 차이는 무엇인지, 한복은 왜 우리나라 고유의 것인가? 이런 논점을 가지고 역사적 사실에 의하여 논리적인 해답이 필요한 시점이야. 우리 것을 지키기 위해선 우리 것을 잘 아는 것부터가 중요해. 무식하게 고려양은 모르면서 자기네 것이라고 우기는 중국인들에게 이기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제대로 알고 있어야지!!
실로 일부분만 속성으로 공부했다보니 아쉬운 부분이 많긴한데 긴 글 읽어줘서 고마워.
+여담
네이버에 검색해보면 이런식으로 한복을 그림으로 그려서 쉽게 설명해 둔 것들이 많더라. 흑요석님 저 분이 깔끔하게 잘 설명해주셔!
이런 그림으로 라도 몇번 보면 개념은 어느정도 잡혀서 고장극 볼 때 도움되지 않을까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