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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
미국에서 대학교를 다니던 20대 초반의 박종두는 매우 우수하면서도 아주 폐쇄적인 학생이었다. 백인들과 어울리기 힘들기도 했겠지만 박종두 본인 스스로도 책 이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런 그에게 꾸준히 말을 걸어주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두 학년 선배이며 같은 한국인인 강태식이었다. 박종두는 처음에는 강태식이 성가시다고 여겼으나 곧 자기도 모르게 점심시간이 되면 강태식을 찾아 두리번거렸고 그렇게 두 젊은 과학도는 친구가 되었다.
"..사람이 더 좋아질 수 있을거 같아."
박종두가 한 그 말을 강태식은 처음에 잘 이해하지 못했다 "앞으로 친구들과 잘 지낼 수 있을거 같아." 쯤으로 생각했지만 사실 전혀 다른 뜻이었다. 그 무렵 한국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박종두는 고국에서 벌어지는 비극 따위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지만 한달 한 번씩 꼬박꼬박 오던 어머니의 안부편지가 끊긴 것은 신경이 쓰였다. '더 나은 사람'을 만들기 위한 박종두만의 연구와 준비가 마무리 될 무렵 한국의 외삼촌으로부터 날아온 편지로 박종두는 가족이 몰살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무도 박종두 가족의 죽음에 대해 확실히는 알지 못했다. 인민군의 총에 맞아 그렇게 되었다는 소문만 들려올 뿐. 그는 복수를 위해 입대를 결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마침 휴전협정이 되어 박종두의 복수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는 자신을 대신해 복수를 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박종두는 높은 계급의 군인이던 외삼촌을 찾아가 그의 계획과 목적을 설명하였다. 박종두의 말은 허무맹랑했지만 그의 끈질긴 설득과 구체적인 계획 앞에 외삼촌과 주변의 몇몇 사람들은 그 계획을 허락했다. 박종두는 친구 강태식이 교수로 있는 대학교에 자리를 잡고 끔찍한 실험을 시작했다. 박종두의 거듭된 실패에 몇 명의 젊은 여자들이 죽음을 맞이했고 이를 문제 삼은 군부의 높으신 분들은 연구를 중지시켰다. 그 후 박종두는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아무도 다시 그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박종두는 인적이 드문 곳에 숨어들어 아무도 모르게 연구를 다시 시작했다. 장터에서 구걸하던 17살의 소녀를 집으로 데려왔다. 1년 후 박종두는 드디어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었다. 비록 소녀는 아이를 낳다가 죽었지만 이미 광인이 되어버린 박종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름 모를 그 소녀가 낳은 아기는 세상에 나온 직후부터 헛간 속 늑대들의 품에 맡겨졌다. 아기는 차가운 돌바닥에 굴러도 감기는커녕 기침한번 하지 않았고 주위의 늑대들도 이상하게 아기를 마치 자신들의 가족인양 자연스럽게 보살폈다. 아기는 걷기 전부터 하루에 거의 한 근씩 고기를 먹어치웠다. 박종두는 아기를 살피려 할 때마다 손가락을 물렸었고 5살 쯤 되었을 때부터는 헛간으로 가기 전에 몽둥이를 챙겨야 했다. 자칫 방심하면 자신의 생명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박종두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아이로 하여금 박종두 자신을 절대 이길 수 없는 존재로 각인시키는 것이 필요했다. 아이는 고기를 던져주는 박종두에게서 천사의 모습을 보았고 매질을 하는 박종두에게서는 악마의 모습을 보았다. 아이가 소년으로 변해가던 어느 날 소년의 탈출 시도로 헛간 문이 거의 떨어져 나갈 뻔한 일이 생겼다. 소년은 자신의 하느님이자 주인인 박종두가 들어올 때마다 언뜻언뜻 보이는 바깥풍격이 너무 궁금했다.
'밖에는 뭐가 있을까?'
그 일로 한참동안 매를 맞은 소년은 헛간 깊은 곳에 따로 마련된 독방에 갇혀 친구이자 가족인 늑대들과도 덜어져 지내게 되었다. 몸이 커진 소년의 세계는 더욱 더 작아졌다. 박종두는 풍부한 어휘를 구사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소년이 아기였을 때부터 꼬박고박 앞에서 한 두마디씩은 지껄였다.
"배고프냐?" "얌전히 있어라" "냄새한번 지독하네" 소년는 박종두의 행동, 분위기로 그 말들의 의미를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스스로 그 말을 따라하는 것은 주제 넘는다 생각하며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소년이 더 자라고 박종두는 본격적인 관찰과 훈련을 시작했다. 소년은 견디기 힘든 지속적인 한계상황을 부여받았다. 몇 주씩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할 때도 있었고 몇 달 씩 아무것도 먹지 못할 때도 있었다. 한겨울에 발가벗겨져 밤을 새기도 했으며 몇시간 동안 쉬지 않고 매를 맞기도 했다. 거의 죽음직전에 가서야 박종두는 소년을 살려냈다. 그래도 소년은 박종두를 증오하거나 공격하지 않았다. 소년은 주인님이자 하느님이 박종두가 너무 무서웠지만 그래도 하루에 한번이라도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 반가웠다. 멀리서 헛간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고 박종두의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 오면 소년은 기분이 좋아져 이리저리 좁은 방안을 서성였다. 매를 맞을 위험을 무릎 쓰고 철문에 쾅쾅 부딪혀 어서 문을 열고 얼굴을 보여주기를 재촉했다.
박종두는 비가 오는 어느 밤 그가 이야기 했던 '더 좋아진 사람' 에 대한 연구가 성공적이라 판단하고 옛 친구 강태식에게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 편지를 썼다. 그리고 헛간으로 돌아가 소년에게 저녁을 챙겨주던 길에 심장발작으로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며칠 후 이제껏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이상한 냄새에 소년은 문을 부수고 밖으로 나갔다. 박종두의 시체에서 파리들이 한번에 날아올랐다. 소년은 한동안 그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본능적으로 박종두가 더 이상 일어나 자신에게 말을 걸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매일 같이 보던 사람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하고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박종두의 끔찍한 모습에 겁을 먹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 슬픔을 삭이던 소년은 며칠 후 용기를 내어 밖으로 나왔다. 태어나 처음 보는 그 넓은 광경이 어지러웠다. 처음 마주친 자유에 오히려 공포가, 박종두가 없다는 슬픔에 오히려 해방감이 밀려왔다. 정리하기 힘든 여러 층의 감정이 뒤섞여 소년을 괴롭혔다. 박종두의 죽음을 슬퍼하더라도 조금 더 멀리 나아가서 슬퍼해도 늦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한 걸음 더 내딛었다. 또 한걸음 내딛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또 한걸음 딛고 또 한걸음... 그렇게 소년은 평생 동안 살았던 헛간에서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짐작은 했지만 너무 넓다'
박종두는 소년에 대해 끝내 두 가지 사실을 모르고 죽었다. 박종두의 연구는 사실 실패였다. 그가 원했던 전장에서 활약할 살인귀로 소년은 적합하지 않았다. 소년은 예상밖으로, 그리고 불필요할 정도로 감정에 휘둘리는 존재였다. 두려움도 많고 원망도 많았으며 상대에 대한 바람도 많고 쉽게 상처 받았으며 죄의식도 느낄 줄 알았다. 아무리 훈련을 받아도 절대로 적을 무차별적으로 살육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또 하나는, 소년은 보통사람이 절대로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소년이 정말로 분노하는 모습을 박종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소년은 그 후 몇 달간 바깥세상을 돌아다녔다. 박종두를 닮은 하느님은 근처에 더 많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매를 맞을지도 몰랐기에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낮에는 늘 숲을 오가며 멀리서 사람들을 관찰했다. 무서운 존재들이 아닐지도 모른다 생각했으나 섣부른 접근은 금물이었다. 소년은 숲이나 마을 사람들의 텃밭에서 먹을 것을 구해다 헛간 안 형제들에게 나누어주며 시간을 보냈고 그 동안 박종두의 시체는 점점 더 썩어갔다. 그리고 어느 날 밤 사람들이 몰려와 박종두와 형제들을 모두 데리고 갔다. 소년은 무서워 멀리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몇 달 뒤 또 사람들이 몰려와 집 안으로 뭔가를 실어 날랐다. 집을 빼앗긴 소년은 그날 밤 헛간으로 다시 들어갈지 말지를 심각하고도 아주 오랫동안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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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
순이의 아빠는 소설가였다. 무서운 에너지로 글을 쓰는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이름으로 나온 책이 서점에 진열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밥벌이엔 도통 관심이 없었고 매일 방에 틀어박혀 글을 쓰거나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한량이었다.
순이의 엄마는 비교적 부잣집 딸이었고 당시로서는 드물게 대학까지 나온 여자였다. 그녀는 문학가가 되고 싶었지만 일찌감치 자신에게 재능이 없을 깨달아 꿈을 포기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출판사에 취직해 교정 작가로 일하기 시작했다.
순이아빠와 엄마의 사랑은 아빠가 두고 간 원고를 읽은 엄마의 존경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말이 없고 수줍던 엄마의 가슴앓이는 아빠의 고백으로 해결되었다. 현실적으로 아무런 능력이 없었던 순이 아빠 때문에 장인은 결혼을 반대했지만 뱃속에 순이를 덜컥 만들어 버린 뒤에는 오히려 얼른 결혼할 것을 재촉했다.
순이아빠는 이제 막 태어나 누워서 버둥거리는 순이를 보며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기로 다짐했다. 아빠의 절필에 순이 엄마의 실망은 컸지만 가족을 위한 그의 마음을 말리지는 못했다. 장인어른에게서 빌린 돈으로 순이네는 빵집을 시작했다. 빵을 만들줄 아는 먼 친척이 있기도 했고 글 쓰는 것 말고 할 줄 아는게 없었던 순이 아빠에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순이네 빵은 생각보다 잘 팔려서 1년 만에 빚을 다 갚고, 1년 후 가게를 하나 더 열고, 그 다음 해에는 공장까지 차려야 했다. 동네에 가게를 연지 5년 만에 순이 아빠는 공장이 두 개나 있는 사장님이 되었고, 순이네는 근사한 집에 자동차, TV까지 있는 부자가 되었다.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란 순이는 학교에서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가장 친구가 많고 가장 많이 웃고 가장 많이 뛰어다녔으며 가장 목소리가 큰 아이였다.
(엄마는 두 번째로 배가 불러오기 시작할 때 아들이었으면 했지만 만약 딸이라면, 순이보다 여자답고 얌전하길 바랐다. 그러나 둘째 역시 딸이었고 순이보다 더 부산한 아이였다.)
이전부터 그런 낌새가 있었지만 순이가 공부에 소질이 별로 없다는 것이 중학교를 다니면서 확실해졌다. 점점 예쁜 물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거울을 보며 자기 위모를 살필 떄가 많아질 무렵 순이는 아빠가 썼던 오래된 원공지뭉치를 발견했다. 책보기를 좋아하지 않는 순이였지만 선채로 1시간이 넘게 원고들을 읽어 내려갔다. 결국 엄마에게 물어 아빠가 뭘 하던 사람이었는지를 알게 되었고 순이는 멋지다고 생각해 글쓰기를 시작했다. 순이의 글들은 조악하기 짝이 없었지만 늘 아빠에게 제일 먼저 보여주며 자랑스러워했다. 순이의 시에 기타를 치며 멜로디를 붙여 노래 불러주는 아빠를 보며 기타까지 따라 배웠다. 그렇게 순이는 자신만의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으나 노래는 왠지 아빠에게 들려주기가 부끄러웠다. (순이의 노래를 궁금해 하던 아빠는 결국 듣지 못했고 순이는 19살이 되던 해에 누군가의 앞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노래를 부르게 된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부터 시작된 순이의 마른기침은 조금씩 잦아지다가 병이 되어갔다. 순이는 운동장에서 줄넘기를 하다가 쓰러졌고 병원에서 폐경색 진단을 받았다. 병원 출입이 잦아지고 학교를 자주 쉬게 되었다. 부자였던 순이 가정에도 끝을 모르고 들어가는 병원비의 영향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순이는 더 이상 좋은 옷을 사지 못했고 작은 집으로 두어 번의 이사 후에는 식탁에 반찬 수까지 줄었다. 하지만 아빠는 회사는 그대로 두려 애썼다. 순이는 곧 나을 것이고 예전의 넉넉했던 가정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아빠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아빠의 바람과는 달리 순이의 병세는 학교를 그만두어야 할 정도로 나빠졌고 숨이 넘어가게 깔깔 거리며 웃던 순이 주위의 친구들도 사라졌다. 순이는 이전보다 말 수가 줄어들었다. 그냥 기분이 나빠서 하루종일 밖을 나가지 않는 날도 늘어갔다. 불평도 많아져 "먼지가 많아." "더러워." "냄새가 이상해." 가 입버릇이 되었다. 하루에도 열 번씩 손을 씻었고 조금이라도 지저분한 것이 있으면 화를 내다가 울어버렸다.
빵공장의 어음 결제일 전날, 당장 순이의 병원비와 어음사이에서 갈등하던 아빠는 오랜 친구에게 돈을 빌러러 갔다. 친구는 큰 조건을 요구했고 아빠는 그것에 응했으며, 아빠는 제 때에 돈을 갚지 못해 빵공장은 그 친구의 것이 되었다. 오랜 친구는 말도 안되는 헐값에 잘 나가는 회사를 사 들였고 아빠는 어처구니없이 전 재산을 잃었다. 순이는 아빠가 더 이상 웃지 않고 엄마가 밤잠을 설치게 된 이유가 자신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순이는 자신이 가족을 불행에 빠뜨렸다고 믿게 되었다. 순이의 마음속엔 점점 죄의식이 퍼져갔고 그것은 점점 더 공격적이고 폐쇄적인 방법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아빠가 어느 날 밤 그 오랜 친구를 만나고 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순이는 감당할 수 없는 슬픔으로 완전히 마음을 닫아 버렸다.
순이는 아빠를 잃은 상실감과 가족들에 대한 죄의식, 그리고 자기혐오의 구렁텅이에 완전히 잠겨버렸다. 가족을 망친 자신에게 헌신하는 엄마가 더 불쌍하면서도 미웠다.
'왜 나한테 잘해주지? 내가 다 이렇게 만들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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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태
지태는 엄마의 목소리를 기억하지 못했다. 엄마의 얼굴도 실제로 본 것을 기억하는 건지 사진으로 본 것을 기억하는 것인지 본인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어쨋든 엄마와 의미있는 대화나 교감은 단 한번도 없었던 것은 확실하다. 지태의 엄마는 지태가 5살 때 죽었지만 지태가 20살이 넘은 후에도 왜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정확히 들은 적이 없었다. 딱 한번 지태가 고등학생이던 시절 아주 어렵게 아버지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지만 아버지는 "아파서 돌아가셨다." 라고 짧게만 대답했다. 지태도 그다지 궁금하진 않았기에 그 후로 다시 묻지 않았다.
지태는 아버지와의 대화를 무엇보다도 어려워했다. 아버지가 특별히 엄하고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그저 지태에게 아버지란 세상에서 가장 불편한 사람이었다. 지태에게 어린시절 기억에 남는 사람의 표정이란 아버지의 무표정이었다. 지태의 아버지는 좀처럼 얼굴을 보기 힘든 사람이기도 했지만 얼굴을 보여줄 때에도 그 얼굴엔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지태가 무엇을 잘 하든 무엇을 잘 못하든 아버지는 크게 칭찬을 하지도 크게 야단을 치지도 않았다. 지태는 워낙 어렸을 적부터 익숙해온 일이라 아버지가 크게 섭섭하지도 원망스럽지도 않았다. 다만 그저 유일한 아버지가 편하지 않을 뿐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지태를 맞이하는 것은 늘 고요함 뿐이었다. 오후의 낮은 햇살이 마루를 비출 때의 멈춰있는 공기, 공중에 떠 움직이지 않는 미세한 먼지들이 지태의 머리속엔 늘 집에 대한 이미지로 남아있었다. 혼자 숙제를 하고 혼자 밥을 해먹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자연스러워진 일이었고 언제부턴가 그것이 제일 편하게 느껴졌다. 아버지가 있을 때에는 어서 일을 보러 나가주시길 은근히 바랐다.
친구들과 같이 웃고 때로는 싸우고 화해하고 웃으며 뛰어노는 것을 지태는 거의 경험하지 못했다. 누군가 자신과 교감을 나누며 '무표정'이 아닌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 지태에겐 견디기 힘들었다. 누군가 웃어주면 괜히 심술이 나서 친구의 얼굴을 무표정으로, 그에게 가장 익숙하고 안정된 상태로 만들고 싶은 마음에 화를 내고 호의에 찬물을 끼얹었다. 친구들과 아무런 교감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집안에 무겁게 가라앉아 움직이지 않는 공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지태에겐 가장 편했다.
어느 날 그 움직이지 않던 공기를 마구 휘저으며 순이가 지태의 앞으로 나타났다. 지태가 12살이 되던 겨울에 아버지의 오랜 친구로 초대되어 웃고 떠드는 그 가족은 지태에겐 재앙처럼 느껴졌다. 어서 빨리 그들이 돌아가기만을 간절히 바랬다. 무엇보다 지태에게 거의 폭력적일 정도로 많은 말을 걸어오는 순이가 가장 당황스러웠다. 지태는 늘 그랬듯이 자신만의 안정된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순이를 무표정으로 만들려고 시도 했지만 장난기 가득한 웃음이 얼굴에 박힌 순이 앞에선 소용이 없었다. 지태의 저항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순이는 이방 저 방을 옮겨 다니며 도망치는 지태를 붙잡아 질문을 퍼부었다. 그날 밤 그 몇시간 되지 않는 짧은 순간에 몇 살 어린 그 소녀로부터 받은 미소의 공격은 치명상을 입혔다.
"뭐가 그렇게 재밌다는거야"
그 후 지태는 학교를 마치면 가끔 모든 것이 정지해있는 무표정의 집으로 가는 대신 버스로 몇 정거장이나 되는 먼 길로 돌아 걸어 순이네 집으로 향했다. 운 좋게 순이를 만날 때면 있는 힘 다 짜내어 그날 학교에서 배운 것들을 자랑하는 것으로 말문을 텄다.
그때 지태의 향한 순이의 반가워하는 눈빛과 깔깔거리는 웃음을 지태는 어른이 되어서도 잊지 못했다.
"오빠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될 때까지 친하게 지내자!"
지태가 구구단의 어려운 구단을 알려주다가 순이가 내뱉은 그 말에 순이는 지태에게 하나뿐인 친구가 되었고 가족을 갖지 못했던 그에게 가족이 되었다. 남들은 말하기도 전에 엄마에게 느껴야할 것들을 지태는 사춘기가 다 되어서 순이에게 처음으로 느꼈다. 지태에게 순이는 처음으로 따뜻한 사람의 표정이었고 처음으로 살아 움직이는 무언가였다. 그리고 그렇게 세월이 지나 몸이 자라고 어른이 되어서 순이는 지태에게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세상에 마음을 닫아버린 순이였지만 지태는 예전 순이의 그 말을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마음속 황폐함을 이제껏 버틸 수 있었던 건 순이가 아직 자기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하고 언제든 다시 웃어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늑대소년 확장판 재개봉 gv당시 나눠줬던 전사북 내용이라고 함
배우들 감정이입을 위해서 감독이 쓴 배경이야기.
늑대소년 지태가 개연성없는 악역이라 싫었다는 반응 있길래 생각나서
예전에 인터넷에서보고 저장했던 글 가져와봄
지태씬 많이 편집되었다던데 그게 덜 편집 되었으면 좀더 개연성있었을듯...
그렇지만 동화같은 느낌의 늑대소년 영화안에서 지태 역할이 개연성 없었기때문에 더 악당스러웠고 그래서 영화의 분위기도 더 살았던 거같음
철수
미국에서 대학교를 다니던 20대 초반의 박종두는 매우 우수하면서도 아주 폐쇄적인 학생이었다. 백인들과 어울리기 힘들기도 했겠지만 박종두 본인 스스로도 책 이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런 그에게 꾸준히 말을 걸어주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두 학년 선배이며 같은 한국인인 강태식이었다. 박종두는 처음에는 강태식이 성가시다고 여겼으나 곧 자기도 모르게 점심시간이 되면 강태식을 찾아 두리번거렸고 그렇게 두 젊은 과학도는 친구가 되었다.
"..사람이 더 좋아질 수 있을거 같아."
박종두가 한 그 말을 강태식은 처음에 잘 이해하지 못했다 "앞으로 친구들과 잘 지낼 수 있을거 같아." 쯤으로 생각했지만 사실 전혀 다른 뜻이었다. 그 무렵 한국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박종두는 고국에서 벌어지는 비극 따위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지만 한달 한 번씩 꼬박꼬박 오던 어머니의 안부편지가 끊긴 것은 신경이 쓰였다. '더 나은 사람'을 만들기 위한 박종두만의 연구와 준비가 마무리 될 무렵 한국의 외삼촌으로부터 날아온 편지로 박종두는 가족이 몰살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무도 박종두 가족의 죽음에 대해 확실히는 알지 못했다. 인민군의 총에 맞아 그렇게 되었다는 소문만 들려올 뿐. 그는 복수를 위해 입대를 결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마침 휴전협정이 되어 박종두의 복수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는 자신을 대신해 복수를 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박종두는 높은 계급의 군인이던 외삼촌을 찾아가 그의 계획과 목적을 설명하였다. 박종두의 말은 허무맹랑했지만 그의 끈질긴 설득과 구체적인 계획 앞에 외삼촌과 주변의 몇몇 사람들은 그 계획을 허락했다. 박종두는 친구 강태식이 교수로 있는 대학교에 자리를 잡고 끔찍한 실험을 시작했다. 박종두의 거듭된 실패에 몇 명의 젊은 여자들이 죽음을 맞이했고 이를 문제 삼은 군부의 높으신 분들은 연구를 중지시켰다. 그 후 박종두는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아무도 다시 그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박종두는 인적이 드문 곳에 숨어들어 아무도 모르게 연구를 다시 시작했다. 장터에서 구걸하던 17살의 소녀를 집으로 데려왔다. 1년 후 박종두는 드디어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었다. 비록 소녀는 아이를 낳다가 죽었지만 이미 광인이 되어버린 박종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름 모를 그 소녀가 낳은 아기는 세상에 나온 직후부터 헛간 속 늑대들의 품에 맡겨졌다. 아기는 차가운 돌바닥에 굴러도 감기는커녕 기침한번 하지 않았고 주위의 늑대들도 이상하게 아기를 마치 자신들의 가족인양 자연스럽게 보살폈다. 아기는 걷기 전부터 하루에 거의 한 근씩 고기를 먹어치웠다. 박종두는 아기를 살피려 할 때마다 손가락을 물렸었고 5살 쯤 되었을 때부터는 헛간으로 가기 전에 몽둥이를 챙겨야 했다. 자칫 방심하면 자신의 생명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박종두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아이로 하여금 박종두 자신을 절대 이길 수 없는 존재로 각인시키는 것이 필요했다. 아이는 고기를 던져주는 박종두에게서 천사의 모습을 보았고 매질을 하는 박종두에게서는 악마의 모습을 보았다. 아이가 소년으로 변해가던 어느 날 소년의 탈출 시도로 헛간 문이 거의 떨어져 나갈 뻔한 일이 생겼다. 소년은 자신의 하느님이자 주인인 박종두가 들어올 때마다 언뜻언뜻 보이는 바깥풍격이 너무 궁금했다.
'밖에는 뭐가 있을까?'
그 일로 한참동안 매를 맞은 소년은 헛간 깊은 곳에 따로 마련된 독방에 갇혀 친구이자 가족인 늑대들과도 덜어져 지내게 되었다. 몸이 커진 소년의 세계는 더욱 더 작아졌다. 박종두는 풍부한 어휘를 구사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소년이 아기였을 때부터 꼬박고박 앞에서 한 두마디씩은 지껄였다.
"배고프냐?" "얌전히 있어라" "냄새한번 지독하네" 소년는 박종두의 행동, 분위기로 그 말들의 의미를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스스로 그 말을 따라하는 것은 주제 넘는다 생각하며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소년이 더 자라고 박종두는 본격적인 관찰과 훈련을 시작했다. 소년은 견디기 힘든 지속적인 한계상황을 부여받았다. 몇 주씩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할 때도 있었고 몇 달 씩 아무것도 먹지 못할 때도 있었다. 한겨울에 발가벗겨져 밤을 새기도 했으며 몇시간 동안 쉬지 않고 매를 맞기도 했다. 거의 죽음직전에 가서야 박종두는 소년을 살려냈다. 그래도 소년은 박종두를 증오하거나 공격하지 않았다. 소년은 주인님이자 하느님이 박종두가 너무 무서웠지만 그래도 하루에 한번이라도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 반가웠다. 멀리서 헛간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고 박종두의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 오면 소년은 기분이 좋아져 이리저리 좁은 방안을 서성였다. 매를 맞을 위험을 무릎 쓰고 철문에 쾅쾅 부딪혀 어서 문을 열고 얼굴을 보여주기를 재촉했다.
박종두는 비가 오는 어느 밤 그가 이야기 했던 '더 좋아진 사람' 에 대한 연구가 성공적이라 판단하고 옛 친구 강태식에게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 편지를 썼다. 그리고 헛간으로 돌아가 소년에게 저녁을 챙겨주던 길에 심장발작으로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며칠 후 이제껏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이상한 냄새에 소년은 문을 부수고 밖으로 나갔다. 박종두의 시체에서 파리들이 한번에 날아올랐다. 소년은 한동안 그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본능적으로 박종두가 더 이상 일어나 자신에게 말을 걸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매일 같이 보던 사람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하고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박종두의 끔찍한 모습에 겁을 먹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 슬픔을 삭이던 소년은 며칠 후 용기를 내어 밖으로 나왔다. 태어나 처음 보는 그 넓은 광경이 어지러웠다. 처음 마주친 자유에 오히려 공포가, 박종두가 없다는 슬픔에 오히려 해방감이 밀려왔다. 정리하기 힘든 여러 층의 감정이 뒤섞여 소년을 괴롭혔다. 박종두의 죽음을 슬퍼하더라도 조금 더 멀리 나아가서 슬퍼해도 늦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한 걸음 더 내딛었다. 또 한걸음 내딛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또 한걸음 딛고 또 한걸음... 그렇게 소년은 평생 동안 살았던 헛간에서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짐작은 했지만 너무 넓다'
박종두는 소년에 대해 끝내 두 가지 사실을 모르고 죽었다. 박종두의 연구는 사실 실패였다. 그가 원했던 전장에서 활약할 살인귀로 소년은 적합하지 않았다. 소년은 예상밖으로, 그리고 불필요할 정도로 감정에 휘둘리는 존재였다. 두려움도 많고 원망도 많았으며 상대에 대한 바람도 많고 쉽게 상처 받았으며 죄의식도 느낄 줄 알았다. 아무리 훈련을 받아도 절대로 적을 무차별적으로 살육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또 하나는, 소년은 보통사람이 절대로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소년이 정말로 분노하는 모습을 박종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소년은 그 후 몇 달간 바깥세상을 돌아다녔다. 박종두를 닮은 하느님은 근처에 더 많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매를 맞을지도 몰랐기에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낮에는 늘 숲을 오가며 멀리서 사람들을 관찰했다. 무서운 존재들이 아닐지도 모른다 생각했으나 섣부른 접근은 금물이었다. 소년은 숲이나 마을 사람들의 텃밭에서 먹을 것을 구해다 헛간 안 형제들에게 나누어주며 시간을 보냈고 그 동안 박종두의 시체는 점점 더 썩어갔다. 그리고 어느 날 밤 사람들이 몰려와 박종두와 형제들을 모두 데리고 갔다. 소년은 무서워 멀리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몇 달 뒤 또 사람들이 몰려와 집 안으로 뭔가를 실어 날랐다. 집을 빼앗긴 소년은 그날 밤 헛간으로 다시 들어갈지 말지를 심각하고도 아주 오랫동안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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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이
순이의 아빠는 소설가였다. 무서운 에너지로 글을 쓰는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이름으로 나온 책이 서점에 진열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밥벌이엔 도통 관심이 없었고 매일 방에 틀어박혀 글을 쓰거나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한량이었다.
순이의 엄마는 비교적 부잣집 딸이었고 당시로서는 드물게 대학까지 나온 여자였다. 그녀는 문학가가 되고 싶었지만 일찌감치 자신에게 재능이 없을 깨달아 꿈을 포기해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출판사에 취직해 교정 작가로 일하기 시작했다.
순이아빠와 엄마의 사랑은 아빠가 두고 간 원고를 읽은 엄마의 존경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말이 없고 수줍던 엄마의 가슴앓이는 아빠의 고백으로 해결되었다. 현실적으로 아무런 능력이 없었던 순이 아빠 때문에 장인은 결혼을 반대했지만 뱃속에 순이를 덜컥 만들어 버린 뒤에는 오히려 얼른 결혼할 것을 재촉했다.
순이아빠는 이제 막 태어나 누워서 버둥거리는 순이를 보며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기로 다짐했다. 아빠의 절필에 순이 엄마의 실망은 컸지만 가족을 위한 그의 마음을 말리지는 못했다. 장인어른에게서 빌린 돈으로 순이네는 빵집을 시작했다. 빵을 만들줄 아는 먼 친척이 있기도 했고 글 쓰는 것 말고 할 줄 아는게 없었던 순이 아빠에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순이네 빵은 생각보다 잘 팔려서 1년 만에 빚을 다 갚고, 1년 후 가게를 하나 더 열고, 그 다음 해에는 공장까지 차려야 했다. 동네에 가게를 연지 5년 만에 순이 아빠는 공장이 두 개나 있는 사장님이 되었고, 순이네는 근사한 집에 자동차, TV까지 있는 부자가 되었다.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란 순이는 학교에서 가장 좋은 옷을 입고 가장 친구가 많고 가장 많이 웃고 가장 많이 뛰어다녔으며 가장 목소리가 큰 아이였다.
(엄마는 두 번째로 배가 불러오기 시작할 때 아들이었으면 했지만 만약 딸이라면, 순이보다 여자답고 얌전하길 바랐다. 그러나 둘째 역시 딸이었고 순이보다 더 부산한 아이였다.)
이전부터 그런 낌새가 있었지만 순이가 공부에 소질이 별로 없다는 것이 중학교를 다니면서 확실해졌다. 점점 예쁜 물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거울을 보며 자기 위모를 살필 떄가 많아질 무렵 순이는 아빠가 썼던 오래된 원공지뭉치를 발견했다. 책보기를 좋아하지 않는 순이였지만 선채로 1시간이 넘게 원고들을 읽어 내려갔다. 결국 엄마에게 물어 아빠가 뭘 하던 사람이었는지를 알게 되었고 순이는 멋지다고 생각해 글쓰기를 시작했다. 순이의 글들은 조악하기 짝이 없었지만 늘 아빠에게 제일 먼저 보여주며 자랑스러워했다. 순이의 시에 기타를 치며 멜로디를 붙여 노래 불러주는 아빠를 보며 기타까지 따라 배웠다. 그렇게 순이는 자신만의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으나 노래는 왠지 아빠에게 들려주기가 부끄러웠다. (순이의 노래를 궁금해 하던 아빠는 결국 듣지 못했고 순이는 19살이 되던 해에 누군가의 앞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노래를 부르게 된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부터 시작된 순이의 마른기침은 조금씩 잦아지다가 병이 되어갔다. 순이는 운동장에서 줄넘기를 하다가 쓰러졌고 병원에서 폐경색 진단을 받았다. 병원 출입이 잦아지고 학교를 자주 쉬게 되었다. 부자였던 순이 가정에도 끝을 모르고 들어가는 병원비의 영향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순이는 더 이상 좋은 옷을 사지 못했고 작은 집으로 두어 번의 이사 후에는 식탁에 반찬 수까지 줄었다. 하지만 아빠는 회사는 그대로 두려 애썼다. 순이는 곧 나을 것이고 예전의 넉넉했던 가정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아빠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아빠의 바람과는 달리 순이의 병세는 학교를 그만두어야 할 정도로 나빠졌고 숨이 넘어가게 깔깔 거리며 웃던 순이 주위의 친구들도 사라졌다. 순이는 이전보다 말 수가 줄어들었다. 그냥 기분이 나빠서 하루종일 밖을 나가지 않는 날도 늘어갔다. 불평도 많아져 "먼지가 많아." "더러워." "냄새가 이상해." 가 입버릇이 되었다. 하루에도 열 번씩 손을 씻었고 조금이라도 지저분한 것이 있으면 화를 내다가 울어버렸다.
빵공장의 어음 결제일 전날, 당장 순이의 병원비와 어음사이에서 갈등하던 아빠는 오랜 친구에게 돈을 빌러러 갔다. 친구는 큰 조건을 요구했고 아빠는 그것에 응했으며, 아빠는 제 때에 돈을 갚지 못해 빵공장은 그 친구의 것이 되었다. 오랜 친구는 말도 안되는 헐값에 잘 나가는 회사를 사 들였고 아빠는 어처구니없이 전 재산을 잃었다. 순이는 아빠가 더 이상 웃지 않고 엄마가 밤잠을 설치게 된 이유가 자신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순이는 자신이 가족을 불행에 빠뜨렸다고 믿게 되었다. 순이의 마음속엔 점점 죄의식이 퍼져갔고 그것은 점점 더 공격적이고 폐쇄적인 방법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아빠가 어느 날 밤 그 오랜 친구를 만나고 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순이는 감당할 수 없는 슬픔으로 완전히 마음을 닫아 버렸다.
순이는 아빠를 잃은 상실감과 가족들에 대한 죄의식, 그리고 자기혐오의 구렁텅이에 완전히 잠겨버렸다. 가족을 망친 자신에게 헌신하는 엄마가 더 불쌍하면서도 미웠다.
'왜 나한테 잘해주지? 내가 다 이렇게 만들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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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태
지태는 엄마의 목소리를 기억하지 못했다. 엄마의 얼굴도 실제로 본 것을 기억하는 건지 사진으로 본 것을 기억하는 것인지 본인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어쨋든 엄마와 의미있는 대화나 교감은 단 한번도 없었던 것은 확실하다. 지태의 엄마는 지태가 5살 때 죽었지만 지태가 20살이 넘은 후에도 왜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정확히 들은 적이 없었다. 딱 한번 지태가 고등학생이던 시절 아주 어렵게 아버지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지만 아버지는 "아파서 돌아가셨다." 라고 짧게만 대답했다. 지태도 그다지 궁금하진 않았기에 그 후로 다시 묻지 않았다.
지태는 아버지와의 대화를 무엇보다도 어려워했다. 아버지가 특별히 엄하고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그저 지태에게 아버지란 세상에서 가장 불편한 사람이었다. 지태에게 어린시절 기억에 남는 사람의 표정이란 아버지의 무표정이었다. 지태의 아버지는 좀처럼 얼굴을 보기 힘든 사람이기도 했지만 얼굴을 보여줄 때에도 그 얼굴엔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지태가 무엇을 잘 하든 무엇을 잘 못하든 아버지는 크게 칭찬을 하지도 크게 야단을 치지도 않았다. 지태는 워낙 어렸을 적부터 익숙해온 일이라 아버지가 크게 섭섭하지도 원망스럽지도 않았다. 다만 그저 유일한 아버지가 편하지 않을 뿐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지태를 맞이하는 것은 늘 고요함 뿐이었다. 오후의 낮은 햇살이 마루를 비출 때의 멈춰있는 공기, 공중에 떠 움직이지 않는 미세한 먼지들이 지태의 머리속엔 늘 집에 대한 이미지로 남아있었다. 혼자 숙제를 하고 혼자 밥을 해먹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자연스러워진 일이었고 언제부턴가 그것이 제일 편하게 느껴졌다. 아버지가 있을 때에는 어서 일을 보러 나가주시길 은근히 바랐다.
친구들과 같이 웃고 때로는 싸우고 화해하고 웃으며 뛰어노는 것을 지태는 거의 경험하지 못했다. 누군가 자신과 교감을 나누며 '무표정'이 아닌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 지태에겐 견디기 힘들었다. 누군가 웃어주면 괜히 심술이 나서 친구의 얼굴을 무표정으로, 그에게 가장 익숙하고 안정된 상태로 만들고 싶은 마음에 화를 내고 호의에 찬물을 끼얹었다. 친구들과 아무런 교감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집안에 무겁게 가라앉아 움직이지 않는 공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지태에겐 가장 편했다.
어느 날 그 움직이지 않던 공기를 마구 휘저으며 순이가 지태의 앞으로 나타났다. 지태가 12살이 되던 겨울에 아버지의 오랜 친구로 초대되어 웃고 떠드는 그 가족은 지태에겐 재앙처럼 느껴졌다. 어서 빨리 그들이 돌아가기만을 간절히 바랬다. 무엇보다 지태에게 거의 폭력적일 정도로 많은 말을 걸어오는 순이가 가장 당황스러웠다. 지태는 늘 그랬듯이 자신만의 안정된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순이를 무표정으로 만들려고 시도 했지만 장난기 가득한 웃음이 얼굴에 박힌 순이 앞에선 소용이 없었다. 지태의 저항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순이는 이방 저 방을 옮겨 다니며 도망치는 지태를 붙잡아 질문을 퍼부었다. 그날 밤 그 몇시간 되지 않는 짧은 순간에 몇 살 어린 그 소녀로부터 받은 미소의 공격은 치명상을 입혔다.
"뭐가 그렇게 재밌다는거야"
그 후 지태는 학교를 마치면 가끔 모든 것이 정지해있는 무표정의 집으로 가는 대신 버스로 몇 정거장이나 되는 먼 길로 돌아 걸어 순이네 집으로 향했다. 운 좋게 순이를 만날 때면 있는 힘 다 짜내어 그날 학교에서 배운 것들을 자랑하는 것으로 말문을 텄다.
그때 지태의 향한 순이의 반가워하는 눈빛과 깔깔거리는 웃음을 지태는 어른이 되어서도 잊지 못했다.
"오빠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될 때까지 친하게 지내자!"
지태가 구구단의 어려운 구단을 알려주다가 순이가 내뱉은 그 말에 순이는 지태에게 하나뿐인 친구가 되었고 가족을 갖지 못했던 그에게 가족이 되었다. 남들은 말하기도 전에 엄마에게 느껴야할 것들을 지태는 사춘기가 다 되어서 순이에게 처음으로 느꼈다. 지태에게 순이는 처음으로 따뜻한 사람의 표정이었고 처음으로 살아 움직이는 무언가였다. 그리고 그렇게 세월이 지나 몸이 자라고 어른이 되어서 순이는 지태에게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세상에 마음을 닫아버린 순이였지만 지태는 예전 순이의 그 말을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마음속 황폐함을 이제껏 버틸 수 있었던 건 순이가 아직 자기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하고 언제든 다시 웃어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늑대소년 확장판 재개봉 gv당시 나눠줬던 전사북 내용이라고 함
배우들 감정이입을 위해서 감독이 쓴 배경이야기.
늑대소년 지태가 개연성없는 악역이라 싫었다는 반응 있길래 생각나서
예전에 인터넷에서보고 저장했던 글 가져와봄
지태씬 많이 편집되었다던데 그게 덜 편집 되었으면 좀더 개연성있었을듯...
그렇지만 동화같은 느낌의 늑대소년 영화안에서 지태 역할이 개연성 없었기때문에 더 악당스러웠고 그래서 영화의 분위기도 더 살았던 거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