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三國史記)』 중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 대의 경주 모습을 묘사한 기록에는, “도성 안에 기와집만 있고 초가집은 한 채도 없으며, 노래와 음악 소리가 길에 가득하여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또 숯으로 밥을 짓고 땔나무를 쓰지 않았다.”
[헌강왕 6년(880)] 9월 9일에 왕이 좌우의 신라들과 함께 월상루(月上樓)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았는데, 서울 백성의 집들이 서로 이어져 있고 노래와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왕이 시중(侍中)민공(敏恭)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지금 민간에서는 기와로 덮고 짚으로 잇지 않으며, 숯으로 밥을 짓고 나무를 쓰지 않는다고 하니 사실인가?”라고 물었다.
민공이 “신(臣)도 역시 일찍이 그와 같이 들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통일 신라 시대 경주에 사는 왕족을 포함한 대귀족들은 매우 부유하고 사치스런 생활을 하였으며, 크고 화려한 집을 많이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화려했던 대저택 35채가 유명한데, 이 저택들을 ‘금을 입힌 집’ 내지는 ‘금이 들어가는 집’이라는 의미로 ‘금입택(金入宅)’이라 불렀다.
신라의 전성기에 서울에는 17만 8936호, 1360방, 55리, 35개의 금입택(金入宅)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