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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6월 20일 오후, 후쿠오카 하카타항 하코자키 부두 근처 바다 속에서 일가족의 사체가 발견된다.
사체는 후쿠오카시 히가시구에 살던 M씨(만 41세)와 그의 아내 C씨(만 40세), 초등학교 6학년인
장남 K군(만 11세)과 초등학교 3학년인 장녀 H양(만 8세)이었다. 경찰은 살인사건으로 판단하고, 수사를 시작한다.
그리고 얼마 후, 유학생이었던 왕량(당시 만 21세), 양닝(당시 만 23세), 웨이웨이(당시 만 23세)
세 중국인이 범인으로 지목됐고 웨이웨이는 일본에서, 나머지 두 명은 중국에서 체포된다.
- 세 명의 유학생 -
왕량 (당시 만 21세)
지린성 출신. 부친은 토목회사를 경영했으며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2002년 봄, 일본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후쿠오카 시내에 있는 일본어 학교에 입학해 학교 기숙사에서
살기 시작했다. 초반 학교 출석률은 96%로 높은 편이었다. (출석률이 95%가 이하가 되면 입국관리국에
보고 되고 더 낮아지면 강제송환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왕량은 그 해 9월, 동급생과 함께 문제를 일으켰고 그 때 학교의 대응에 불만과 불신을 안게 된다.
그 후로 학교는 거의 나가지 않았다. 동급생의 말에 따르면 그 때부터 왕량이 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2003년 4월 시점에서 왕량은, M씨 집과 70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월세 2만엔 짜리 아파트에서 양닝과
함께 살고 있었다. 5월 15일에는 일본어 학교로부터, 제적이 될 것이란 통보를 받는다.
유학생이 제적 처분을 받게 되면, 취학 비자 자격이 사라져 불법 체류자 신분이 된다.
왕량은 일단 중국으로 돌아가, 부모에게 재편입을 위한 수업료를 요구한다.
하지만 결국 수업료는 납부되지 않았고 왕량은 제적을 당한다.
양닝 (당시 만 23세)
지린성 출신. 부친은 창춘시의 중일우호협회에서 일했고, 모친은 제지공장에서 근무했다.
왕량과 양닝의 부모는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기에 왕량과 양닝도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양닝은 2001년 10월, 취학 비자를 받고 일본에 입국해 일본어 학교를 졸업한 뒤, 사립대학 국제상학부에 입학해
아시아 무역경제에 대해 공부했다. 하지만 2002년에는 한 과목 만을 이수하고 놀기에 바빴고, 2학기가 되자
건강 악화를 이유로 휴학했지만 실은 후쿠오카 시내의 한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2003년 4월에 일단 복학했지만 연간 50만 엔이 넘는 학비를 내지 못해 납입 기한이 끝나가는 6월 말,
"부모님에게 학비를 받기 위해 일단 귀국하겠다"고 대학측에 설명한 뒤 출국했다.
하지만 집에는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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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웨이 용의자
웨이웨이 (당시 만 23세)
허난성 출신. 부친은 공장을 경영하는 자산가였다.
웨이웨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3년간 인민해방군에서 반장을 맡았다.
그 후 다롄의 외국어 학원에서 일본어를 배웠고, 일본 유학 후 첨단 기술에 대해 공부하겠다는 꿈을 품고
2001년 4월, 후쿠오카의 한 일본어 학교에 입학한다. 그리고 2002년 4월에는 계획대로 컴퓨터 전문학교에
입학했는데, 우수한 성적으로 장학생 후보에까지 올랐다. 고향에는 여자 친구도 있는, 지극히 평범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2003년이 되자, 학교를 자주 결석하기 시작했다.
웨이웨이의 아파트에는 중국인 여성들이 자주 드나들기 시작했고, 4월에는 유학생 동료와 함께 중국인이
사는 집에 들어가 26만 엔을 강탈하기도 했다.
4월 9일에는 전에 살던 아파트를 대상으로 강도 행각을 벌였으며 타인 명의로 휴대전화를 계약하는 사기를
치기도 했다. 6월에는 지인의 여성에게 폭력을 휘둘러 체포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쯤에 PC방에 자주 드나들기 시작했고 왕량, 양닝과 알게된다.
경제적으로도 힘들지 않고 공부에만 전념했던 그였지만, 2003년 봄 부터 갑자기 범죄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2003년 4월 15일 밤, 왕량과 양닝, 웨이웨이는 후쿠오카시 주오구의 한 일본어 학교에 침입해 현금 5만 엔을
훔친다. 그 곳은 왕량이 다니던 학교였다.
왕량과 양닝은 그 해 1월에도 마찬가지 주오구의 한 패스트푸드점에 침입해 현금 230만 엔을 훔친 바 있다.
그 곳은 양닝이 아르바이트를 하던 곳이었다.
웨이웨이는 4월 9일, 또 다른 두 중국인 유학생과 공모해, 같은 중국인 학생에게 현금 약 26만 엔을 뺏기도 했다.
"셋이 함께 한탕 해 보자"
2003년 5월초, 세 유학생은 양닝이 아르바이트를 했던 후쿠오카시 하카타구의 한 라면집 주인을 살해하기로
계획하지만 '면식이 있으면 발각될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로 단념한다.
하지만 이 때 이미 '살해한 뒤, 돈을 뺏는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 M씨 가족 -
살해된 M씨 가족은 M씨(만 41세)와 아내 C씨(만 40세), 장남 K군(만 11세), 장녀 H양(만 8세)으로
구성된 4인 가족이었다.
M씨는 1962년 후쿠오카시에서 태어났다. 사립 하카타 고등학교를 중퇴한 뒤 나카스의 한 클럽에서 일했으며
상경해, 도쿄 아자부주반 상점가의 고기집에서 경험을 쌓고 1988년, 후쿠오카시 주오구에 한국요리점을 오픈했다. 이 가게는 유명인들이 자주 찾고 TV에도 소개될 정도로 유명한 가게였다. 그 후 히가시구에도 고기집을 오픈했고 매상도 꽤 좋았다.
아내 C씨 역시 후쿠오카 출신이었다. 규슈 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94년까지 화장품 회사의 미용부원으로,
후쿠오카 공항의 국제선 터미널에서 근무했다. M씨와 C씨는 고등학생 때 부터 교제했으며 1990년 5월에 결혼했다. 그리고 곧 K군과 H양이 태어나며 행복한 가정을 꾸리게 된다.
하지만 2001년 9월, 광우병 소동이 일어나며 경영하던 두 식당이 모두 문을 닫게 된다.
M씨는 아내의 친척과 함께 여성의류 판매 회사를 열지만 매상은 별로였고, 히가시구의 고기집을 열기 위해 집을
담보로 빌린 4000만 엔의 빚도 갚아야만 했다.
2003년 3월, 부부는 의류 판매업이 뜻대로 되지 않자 동업하던 친척으로부터 독립해 의류 등을 백화점에
납품하는 일을 시작한다. 그리고 두 달 후에는 지인으로부터 휴면 중이던 회사 'W'를 계승받아 성공적으로
부활시키기도 했다. 여기에 탄력을 받아, C씨가 사장을 맡고 의류판매업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한다.
한편 M씨는 식당들이 문을 닫은 후, 경제난을 이기지 못해 안 좋은 일에 손을 대기도 했다.
살해사건 후, 경찰이 M씨의 집을 수색 하다 대마초를 발견한다. 대마초를 재배해 판매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M씨 일가는 94년에서 96년에 걸쳐 외국계 생명보험회사와, 99년에는 국내 생명보험회사와 가족 전원이
생명보험에 든다. 보험액은 M씨가 1억 2000만 엔, C씨가 2500만 엔, K군과 H양이 각각 2100만 엔으로
총액 1억 8700만 엔이었고 매달 내는 보험료는 14만 엔 정도였다.
덧붙여, M씨 일가는 세 중국인 유학생과 면식이 없었다.
- 습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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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씨 일가족 살해는 최초, 왕량이 양닝에게 제안한다. 그리고 양닝은 사건 전후에 몇 번이고 웨이웨이와 휴대폰을
통해 무언가 이야기를 나눴다.
2003년 6월 19일 밤 11시 쯤, 세 중국인은 M씨 집 옆에 있는 맨션의 담을 넘어 부엌에 나 있는 문을 통해
집으로 침입한다. 먼저 2층을 둘러보고 어른들이 없는걸 확인한 후, 침대에서 자고있던 두 아이의 목을 졸랐다.
H양은 거의 저항이 없었기에 얼굴을 두 세 차례 가격한 뒤, 가볍게 목을 졸라 기절시켰다.
K군은 잠에서 깨, 큰 소리를 내며 저항했기에 얼굴과 머리를 마구 폭행한 후 두 명이 달려들어 움직이지 못하게
한 뒤 목을 졸라 살해했다. K군의 사체는 얼굴이 부어있었고 몸 여기저기에 멍이 들어있었다.
이어서, 목욕 중이던 C씨를 덮쳤다. C씨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범인들은 얼굴과 상체 등을 마구 폭행하고
머리카락을 움켜잡은 뒤 몇 번이나 벽과 바닥에 머리를 찧는다. C씨는 곧 기절해 주저 앉았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폭행은 이어졌고 마지막에는 포장용 비닐끈으로 목을 조른 후 물이 찬 욕조에 얼굴을 담궈 살해했다.
C씨의 사인은 익사였지만 얼굴이 많이 망가지고 후두부가 함몰 될 정도로 폭행을 당했으며 상체는 멍투성이였다.
날짜가 바뀌고, 새벽 1시 40분 쯤 M씨가 귀가한다. 애차인 벤츠 C200을 타고 자택 차고 앞에 도착했을 때
그는 친구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M씨는 "지금 집에 도착했어. 이제 주차 시킬거니깐, 나중에 다시 걸께" 라며
전화를 끊는다. 하지만 그 친구에게 다시는 전화를 걸 수 없었다.
범인들은 현관에서 M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M씨가 집으로 들어오자, 공사현장에서 훔쳐온 쇠파이프로
머리 뒤를 가격한 뒤, 앞에 서서 옆머리를 가격하고 얼굴을 때렸으며, 전신을 발로 차기 시작한다.
그리고 범인들은 2층에 기절해 있던 H양을 데려와 M씨 앞에서 학대하고 구타하며 M씨에게 무언가 대답을 듣기를 원했다. 하지만 M씨에게 아무런 말도 듣지 못하자, "이제 용무가 없다"며 H양의 목을 졸라 살해하려 했다.
M씨는 무릎을 꿇고 딸 만은 살려달라 빌었지만, 그들은 그런 M씨를 비웃으며 H양을 살해했다.
그리고 M씨를 하얀 비닐끈으로 목 졸라 기절시킨 뒤, 욕조로 데려가 익사시켰다.
범인들은 일가족의 사체를 벤츠에 실은뒤, 차에 오른다.
하카타항 하코자키 부두 안벽에 도착한 범인들은, 사체를 바다에 수장시키기 위해 미리 준비해 놓은 추를 하나씩
달기 시작한다. M씨의 팔과 H양의 다리를 수갑으로 이은 뒤, 그 수갑의 체인 부분에 다른 수갑을 채우고 쇠아령을 다는 등 만전을 기했다. C씨와 K군은 각각 두 손에 수갑을 채워 쇠아령을 달았다.
사체를 유기한 뒤, M씨의 벤츠를 운전해 구루메시(市)로 향했다.
이들의 행방은 N 시스템(자동차 넘버 자동 인식장치)으로도 확인됐다.
벤츠는 '브리지스톤 구루메 공장' 클럽하우스의 전용 주차장에 버려졌다.
범인들은 차를 버린 뒤, JR 구루메역에서 전차에 올라 후쿠오카로 돌아갔다.
20일 오후, 하카타항 하코자키 부두 근처 바다 속에서 일가족의 사체가 연이어 발견됐다.
범인들은 아마 이렇게 빨리 사체가 발견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사건 당일의 행적에 대해서는 세 명의 진술을 바탕으로 서술했지만, 범인들이 서로 책임을 전가하거나 진술 내용
자체를 바꾸기도 했기 때문에 불확실한 점이 많다.
-체포-
중국으로 도망간 왕량과 양닝의 재판을 일본에서 열 수 있을까.
중국의 형법 10조에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국외범에 대한 규정이 있어 기소가 가능하다.
단 중국의 재판은 장소주의라서 사건이 일어난 장소에서만 재판을 할 수 있다.
이런 경우, 범행 현장은 일본이기에 두 용의자는 일본에서 재판을 받아야만 한다.
하지만 중국의 범인 인도법에는,『중국 국적을 가진 범죄자는 외국으로부터 인도 요청이 들어와도
거부해야만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 법 때문에, 왕량과 양닝은 일본으로 데려올 수 없었다.
중국 정부는 과거에도 외국의 범인 인도 요청에 응하지 않고, '대리 처벌'이라는 형식으로 국내에서 재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 범죄인 인도조약 - 일본은 미국(1980년)과 한국(2002년) 두 나라와 범죄인 인도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의 도망 범죄인 인도법은, 외국으로부터 인도 요청이 들어온 용의자가 일본인인 경우, 자국민 보호를 위해
인도를 금하고 있지만 한국과 미국에 한해서는 인정하고 있다. 그 외의 나라가 인도를 요청해 올 경우는 외교 루트 등을 통해 교섭한다.
9월말, 후쿠오카 현경찰과 경찰청의 수사관이 베이징을 찾아 중국 공안당국과 수사 방법을 협의한다.
두 달 후에는 중국 공안당국의 수사원이 일본을 찾아 세 용의자의 진술 내용을 대조 조사했다.
이 때, '금품을 뺏을 목적으로 세 명 만이 범행에 임했다. 누구에게도 의뢰받지 않았다.'라는 점에서
두 나라 수사 당국의 의견이 일치했다.
2004년 10월 19일, 왕량과 양닝의 첫 공판이 랴오닝성 랴오양시 중급인민법원(지방 법원)에서 열렸고,
두 피고인 모두 기소사실을 인정했다.
-의혹-
범인들이 M씨 집에 침입하기 전인 밤 10시 35분 쯤, M씨 집 앞에 '아우디'로 보이는 흰색 외제차가
정차했고 조수석에서 키 큰 여자가 내려 M씨 집에 종종 걸음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한 사람이 있다.
운전석에는 50대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있었는데, 올백 머리의 장발이었다 한다.
그 때 차고에는 M씨의 차는 없었고 다른 자동차가 세워져 있었다 한다.
또한 세 중국인이 범행을 저지른 뒤, 벤츠를 타고 사체 유기를 위해 하카타항으로 가는 것을 목격한 택시 기사가
있다. 그는, "아우디에 이어 벤츠가 빠른 속도로 우회전했다. 차의 밸런스가 이상했는데, 트렁크에 아주 무거운 짐이 실려있는 것 같았고, 운전을 잘 못하는 사람이 핸들을 잡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라고 증언했다.
벤츠에 탄 세 중국인을 인도하는 듯 했던 아우디의 인물은 대체 누구였을까.
* 범인들은 강도 목적으로 M씨의 집에 침입했다고 진술했지만, 집에 있던 십 몇만 엔의 현금은 그대로 있었고,
사전에 쇠아령과 수갑을 구입하는 등 애초에 살인에 목적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전혀 면식이 없던 M씨 가족을 죽인 동기는 무엇인가.
* 웨이웨이는 "남은 보수는 아직 받지 못했다." 라고 진술했는데, 대체 어떤 보수를 말하는건가?
M씨 집에서 빼앗은 소량의 금품이 보수라고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 사건의 여파 -
중일우호협회 후쿠오카현 연합회에 의하면 사건의 영향 때문인지, 유학생 대상 구인이 2003년 9월을 기점으로,
격감했다고 한다.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국인 유학생이 이유없이 해고되는 일도 있었다.
-판결-
2005년 1월 24일, 랴오닝성의 랴오양시 중급인민법원은 양닝에게 사형, 왕량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한다.
2005년 5월 19일, 후쿠오카 지방법원은 웨이웨이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2005년 7월 17일, 양닝의 사형이 집행된다. (향년 만 25세)
웨이웨이는 1심에서 범행 사실을 인정한 후 내내 침묵을 이어가다 사형 판결을 받았는데, 2심에서는 태도를 바꿔 범행 동기와 범행 과정, 세 명의 역할 등을 자세히 증언하고 유족에게 사죄도 했지만 항소는 기각됐다.
상고했지만 2011년 10월 20일, 최고재판소 제1소법정은 상고를 기각하고 사형판결을 선고했다.
- 의심받은 인물 -
고단샤(강담사)의 사진 주간지 '프라이데이 2003년 10월 10일호'에 C씨의 오빠 U씨가 범행의 배후라는 기사가 실렸다. U씨는 곧 고단샤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2005년 7월 27일, 도쿄지방법원 오사 히데유키 재판장은 "매우 불충분한 취재의 안이한 기사로 U씨가 범인이란 인상을 준 것은 무거운 과실이다."며 880만 엔을 U씨에게 지급하고, 동 잡지에 재판 결과에 대한 공고를 낼 것을 명했다.
또한 U씨는 문예춘추 등에도 1억 천만 엔의 배상을 요구했다. '주간 문춘'에 6회에 걸쳐 게재된 기사에서 U씨가 M씨와의 돈 문제로, 중국인에게 살인을 의뢰했다는 내용이었다.
2006년 9월 28일, 도쿄지방법원 가네코 준이치 재판장은 "U씨가 마치 사건의 진범인 것처럼 게재한 기사는 그 어느 것도 사실로 인정하기 힘들며 취재도 불충분했다."며 U씨에게 1100만 엔을 지급하라고 문예춘추에 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