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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 꿈 사라진 日 소년만화, 그 속엔 '풍요 속 절망'의 현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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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9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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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소년점프’에 인기리에 연재 중인 ‘약속의 네버랜드’ 한 장면. / 유튜브 캡처


구김살 없는 고아들과 자애로운 원장, 동화 속 세상처럼 평화로운 나날, 이윽고 참혹한 진실이 밝혀진다. 고아원은 식인귀의 ‘먹이’를 사육하는 인육 농장, 영재교육으로 발달한 뇌는 최고급 식재료다. 아이들은 목숨을 건 탈주에 나선다. 일본 최대 발행부수의 만화잡지 ‘주간 소년점프’에 인기리에 연재 중인 만화 ‘약속의 네버랜드’ 줄거리다.

1968년 창간한 ‘주간 소년점프’는 일본 만화의 상징이다. 올해 창간 50주년을 맞았다. ‘드래곤볼’ ‘슬램덩크’ ‘원피스’ 등 당대의 인기작을 실어왔다. 1995년에는 주간 발행부수 653만 부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표어는 ‘우정, 노력, 승리’다.

점프의 편집 방침이 달라진 것은 2004~2006년 연재된 ‘데스노트’가 전 세계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다. 이름이 적히면 목숨을 잃는 노트를 손에 넣은 다크히어로의 말로를 그렸다. 소년을 대상으로 한 잡지의 대표작이라기엔 이질적이었다.

‘데스노트’가 연재되던 시점, 10대 초중반이 대부분이던 점프의 독자 연령대는 점차 높아지기 시작했다. 저출산으로 신규 독자 유입이 줄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 보급과 더불어 2017년 점프의 발행부수는 전성기의 3분의 1 이하인 190만여 부로 떨어졌다.

현재의 독자 연령대는 19세 이상 성인이 절반 이상이다. 25세 이상이 약 27%로 가장 많다. 어른이 되어서도 점프를 손에서 놓지 않은 일부가 지금의 주요 독자다. 동시에 선과 악의 대결, 동료의식과 노력을 통한 승리의 쟁취라는 소년만화의 전형적인 이야기 진행은 점차 주류에서 멀어져 갔다.

전국대회 우승을 노리는 고등학교 농구부 학생들의 이야기를 그린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슬램덩크’나 야구를 통해 10대 소년소녀의 우정과 사랑을 이야기하는 아다치 미츠루의 ‘H2’ 같은 청년물은 더 이상 소년 만화의 대세가 아니다. 인육을 먹어야 살 수 있는 주인공(도쿄구울), 도박에서 지면 가축 취급을 받는 고등학생(카케구루이), 정체불명의 거인에게 짓밟히는 인류(진격의 거인), 무능한 공권력을 농락하는 불사신 테러리스트(아인)…. 절망적인 세계관을 무대로 삼은 만화들이 최근의 인기작이다.

미야하라 코지로(宮原浩二郎) 간사이학원대학 교수는 저서 ‘만화의 사회학’을 통해 “만화는 일상 생활에 밀착한 매체로 현 세태를 짙게 반영한다”고 분석했다. 그렇다면 어른이 된 소년들은 왜 암울한 만화에 빠져들고 있을까.

표현의 자유를 폭넓게 수용하는 일본에서 소년만화에 선정적이거나 잔혹한 표현이 담기는 것은 놀랍지 않다. 그보다 주목할 점은 최근 인기작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억압’과 ‘저항’의 대립 구도다.

‘약속의 네버랜드’와 ‘진격의 거인’ 그리고 온라인 연재로는 이례적으로 인기를 모은 만화 ‘식량인류’와 무수한 좀비물 등 상당수의 최근 인기작들이 이 같은 대립 구도를 차용하고 있다. 먹이 신세를 피하려 발버둥치는 나약한 인간들에게는 선악의 경계가 없다. 지배자에 대한 무기력한 저항으로 쟁취할 수 있는 가치는 생존 내지는 탈출이다.

탈출만이 구원인 암울한 만화 속 세계관은 최근 일본 청년들의 처지와 닮았다. 약육강식의 세계와 늘어나는 노년층을 떠받쳐야 하는 사회구조 속에서 청년들이 느끼는 체념과 절망이 만화 속 세계관에 깔려있다. 최근 늘어나는 ‘사토리(さとり‧달관) 세대’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출세나 성공이라는 고전적인 승리의 ‘쟁취’ 대신 최소한의 경제활동과 절제된 소비로 일상을 유지하는 ‘생존’을 선택한 신인류다.

‘완전 고용상태’라는 일본에서 청년들이 암울한 만화에 공감하는 현상은 언뜻 의아하게 느껴질 수 있다. 최근 일본은 신규 졸업자 취업률이 97%에 달하고 구직자 1명당 일자리 수를 뜻하는 유효구인배율은 1월 1.59배를 기록했다. 일자리가 구직자보다 많다는 말이다. 일본 경제가 호황기를 누리던 1970년대 이후 일자리 시장이 가장 좋은 편이다. 한국에서는 이를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한국 청년의 일본 취업을 돕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한국의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지난달 일본경제단체연합회와 함께 ‘일본 취업 이렇게 준비하자’ 세미나를 개최했고, 한국 정부도 청년들의 일본 취업을 장려한다. 그런데 정작 일본에서는 절망하는 청년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일본 청년들을 체념케 하는 진실은 숫자에 가려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일본 후생노동성이 발표하는 취업률은 비정규직을 포함한다. 그마저도 신규 졸업자 중 취업 희망자만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다.

일본에는 780곳의 4년제 대학과 337곳의 2·3년제 대학 그리고 진학 시 과반수가 선택하는 3200여 곳의 전문학교가 있다. 이 중 취업률 조사대상은 110여 개교, 전문학교는 30곳에 불과하다.

통계의 허점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취업률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실질적인 일본 청년들의 노동 조건과 취업 환경이 크게 악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일본의 계약직·파견사원 등 비정규직 비율은 사상 최고치인 37.5%였다.

‘쓰고 버려진다’ 자조하는 청년들

이는 평균수명 증가와 고령화로 인한 정년 연장, 기술의 발달에 따른 노동 효율성 증가로 인한 것이다. 반면 기업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고임금 중장년층의 기득권은 그 어느 때보다 튼튼해졌다.

더구나 일본에서는 대학 졸업과 동시에 정규직 일자리를 얻지 못하면 계속 비정규직을 전전하는 경향이 있다. 신입사원 채용 시즌이 지나고 나면 ‘승자조(勝ち組)’와 ‘패자조(負け組)’로 나뉘어 격차를 좁히기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그나마 대졸 정규직 초임은 20만엔(약 200만원) 안팎에 지나지 않는다. 도쿄에서 간신히 자취생활을 꾸릴 수 있는 수준이다. 결국 청년들 사이에서는 ‘쓰고 버려진다(使い捨て)’는 자조가 퍼져간다. 정규직이 될 수도, 되고 싶지도 않다고 느끼는 청년들이 늘어나는 이유다.

높은 최저임금 덕분에 아르바이트만으로도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었던 ‘프리터족’은 힘든 육체노동도 마다하지 않는 외국인 노동자들로 빠르게 대체되고 있다. 지난해 일본의 외국인 노동자는 18% 증가한 127만여 명으로 사상 최고였다. 일본의 편의점에서 물건값을 계산하는 외국인 노동자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견고한 사회 기득권과 외국인 노동자 유입으로 사면초가에 놓인 일본 청년들은 억압받는 만화 주인공처럼 탈출을 꿈꾼다. 때로는 극단적이고 안타까운 돌파구를 찾는다. 일본 15~39세 사인(死因) 1위는 자살이다. 신입사원 채용이 끝나는 5월이 되면 유독 그 수치가 늘어난다.

어떤 만화가 이들을 달래줄 수 있을까. 그 많던 영웅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책장을 넘기는 손끝에는 씁쓸함만이 묻어난다.

▒ 이진석
와세다대 커뮤니케이션학 석사, 조선비즈·동아일보 기자, 일본 도쿄 IT 기업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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