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주홍글씨>(LJ필름)를 찍으며 카메라 렌즈로 만났던 이은주를 지난 21일 밤 서울 도산공원 근처에서 마주했다. 이렇게 사적으로 만나 대화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제 <주홍글씨>는 험난한 촬영과 후반작업을 끝내고 오는 29일 심판대에 오른다. 영화를 끝낸 지금, 난 이은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불현듯 궁금해졌다.
#난 여성스럽고 지고지순해 보이는 이은주에게 도발적인 욕정이 숨어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그 누가 부드러운 한석규의 011 CF 미소 뒤에 비틀린 욕망이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을까.
변혁(이하 변)=부산영화제 이후 첫 만남인데 그간 잘 지냈나.
이은주(이하 이)=인터뷰하며 비슷한 얘기 반복하느라 힘들지만 <주홍글씨>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어 행복하다. 심은하 이정재 주연 <인터뷰>를 연출한 감독님이 이렇게 기자로 나타나니 기분이 묘하다. 난 감독님의 단편 <호모 비디오쿠스>와 <인터뷰>를 보며 참 특이한 분일 것이란 선입견이 있었다.
변=그랬나? 실제 겪어 보니 어땠나.
이=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역시 특이한 사람이었다.(웃음) 12년간 프랑스에서 유학한 감독님 얼굴을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에펠탑이 떠오른다.
변=나도 은주에 대한 첫인상은 별로 안 좋았다. 기억나는가. 4년 전 부산을.
이=모르겠다. 빨리 말해 달라.
변=당시 난 <인터뷰>를, 당신은 <오??수정>을 들고 부산영화제에 갔었다. 한 호텔 가든 파티에서 누군가가 내게 당신을 소개했는데 난 정중히 인사를 했건만 당신은 눈도 마주치지 않고 하는 둥 마는 둥 인사를 하길래 속으로 적잖게 불쾌했다. 그런 내가 <주홍글씨> 각본 작업하며 은주를 떠올린 건 아이러니지.
이=그랬나? 아무튼 죄송 죄송. 그런데 왜 많은 여배우 중 나를 캐스팅했나.
변=당신이 적극적으로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안다.
이=(기막히다는 듯) 감독님이 내게 시나리오를 줬으니까 그런 것 아닌가. 이거, 너무 공격적인 것 아닌가.
변=난 의외성 끄집어내는 걸 좋아한다. 한석규 선배의 부드러운 011 미소 속에도 비틀린 욕망이 있을 것 같았고, 여성스럽고 지고지순해 보이는 은주에게도 뭔가 도발적인 욕정이 숨어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이=처음 시나리오를 보곤 잘못 전달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볼륨없는 몸매인데 뭘 믿고 베드 신을 찍겠다는 건지. 그리고 배역도 당연히 경희(한석규 아내 역)인 줄 알았는데 가희였다. 그때 알았다. 감독님이 진짜 특이한 사람이란 걸.
#은주와 난 서로 같은 A형이라 그런지 언제나 말보다 직감으로 소통했다. 그러나 난 영화를 위해 그를 벼랑 끝으로 몰아야 했고, 그때마다 은주는 아슬아슬하게 잘 견뎌줬다.
변=난 배우와 적당히 긴장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은주와는 금세 무장해제 됐다. 같은 크리스천이라 그랬을까.
이=아마 감독님의 혈액형을 내가 알아맞혔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 감독님은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이 B형이라며 쿨한 척했지만, 평소 언행을 보며 난 일찌감치 감독님이 A형이란 걸 알고 있었다.
변=놀라운 직관력이다. 우리 서로 (소심함을 뜻하는) '작은 마음 동호회' 회원 아닌가(웃음). (휴대폰을 꺼내 보이며) 보관 중인 80개 문자메시지 중 가장 오래된 게 바로 은주가 보내준 문자다. 정사신에 대한 미팅이 있던 날 밤 '쉽지가 않아요. A형이잖아! A형 동지'라고 보내준 것 기억 나나?
이=윽, 말도 말라. 베드신. 그때 기억은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다. 그 장면 찍고 서럽게 울고 불고. 정말 그때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시나리오에 있는 대로 찍겠다는 감독님이 얼마나 야속했는지 아는가. 이제야 말하지만 감독님의 그런 성격에 질려 있었다. 그러나 베드신 찍던 날 감독님의 흔들리는 눈빛을 보며 어쩔 수 없는 A형 남자란 걸 또 한번 느낄 수 있었다.
변=자세히 말해 달라.
이=파격적인, 엄청난 신이란 걸 감독님 본인도 알지 않나. 솔직히 한석규 선배도 '은주가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하며 기적을 바라지 않았나. 그런데 너무 쉽게, 또 아무렇지 않게 베드신에 대해 말해 속상했다. 난 배우이기 전에 여자이고 이제 겨우 스물넷이다.
# 에너지를 아꼈다가 작품에 모조리 쓰고 싶다는 배우. 난 그를 보며 정말 스물넷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그는 불륜 연기 감정을 깨지 않기 위해 촬영장에서 한석규에게 선배라 부르지 않았다.
변=한석규 선배와의 호흡은 어땠나.
이=마냥 어렵게 느껴졌다면 위축됐을 거다. 촬영장에서 '선배님'이라 부른 게 3번 정도? 불륜 감정이 깨질까 봐 의식적으로 '저기요', '있잖아요' 식으로 불렀다. 실제로 연인 감정을 갖기 위해 '오빠'로 불렀을 때 한석규 선배님이 가장 흡족해 하셨다.
변=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뭐였나.
이=물론 자동차 트렁크 신이었다. 시나리오를 보며 영화가 에베레스트산 같았다면 트렁크신은 바로 에베레스트 정상 같은 장면이었다. 3일 밤낮, 피 분장 뒤집어쓰고 롱 테이크로. 정말 생애 잊을 수 없는 생지옥이었다. 기억 나나? 그 장면 앞두고 스태프와 배우들 모두 '끝장을 보자'는 살벌한 표정이었다.
변=그때 가장 많이 한 말이 '모두 미치자' 아니었나? 표현의 끝이라고 생각한 그 장면 찍고 난 뒤 연출 크레디트에 내 이름과 함께 한석규 이은주를 넣어 주고 싶을 만큼 고맙고 만족했다.
이=자, 어느 정도 인터뷰를 해봤는데 나를 얼마나 파악하겠나.
변=어렵다. 은주 히프에 나비문신이 있다는 걸 안다고 해서 많이 안다고 할 수도 없고. 친구나 애인 정도의 느낌이다. 확실한 건 앞으로도 원수가 될 것 같진 않다는 느낌이다.
이=약간 실망이다. 그렇다면 날 어디까지 알고 싶나.
변=알면 알수록 복잡한 사람 같다. 외모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추어탕을 좋아하고, 어떤 날은 뜬금없이 한강에서 웨이크 보드를 타고 오기도 하고. 종잡을 수 없는 면모가 많다. 한 마디로 연구 대상이다.
이=연구 대상? 빙고! 나도 날 잘 모르는데 감독님이 어떻게 날 알겠는가.
감독보다 의상 돋보여서야…사생활 집중적으로 묻겠다
-인터뷰 전부터 신경전
이날 '기자는 빠져'를 위해 만난 변혁 감독과 이은주는 인터뷰 전부터 서로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펼쳤다.
1라운드는 의상. 편집 도중 나오느라 의상 준비를 못한 변 감독이 이은주의 정장 컨셉트를 보고 문제 삼았다. 감독보다 돋보이면 안 된다는 억지 주장을 펼친 것. 변 감독은 "영화 이야기 외에 사생활에 대해 집중적으로 묻겠다"고 해 영화 마케팅팀을 난감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은주도 이에 질세라 "촬영장에서 날카로웠던 감독님인 만큼 만반의 준비를 했다"며 긴장하는 모습이었다. 그의 매니저는 예상 질문을 만든 뒤 "곤란한 질문에는 단답형으로만 답하라"고 귀띔하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인터뷰 중반부턴 이은주의 질문 공세가 이어졌다. 이은주는 특히 "영화 찍고난 후 나에 대해 얼마나 알게 됐나" "얼마나 알고 싶냐" 등의 질문을 던져 변 감독을 난처하게 했다. 베드신이 화두에 오르자 이은주는 당시 감정이 떠올랐는지 감독에 대해 서운했던 감정을 드러내 잠시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다.
둘은 소심한 성격이 특징인 A형답게 사소한 말 한마디에 이내 서운한 감정을 드러냈지만 인터뷰를 마친 뒤엔 "더 친해지게 된 계기가 된 것 같다"며 자리를 마련해 준 IS를 향해 "고맙다"고 말했다.
김범석 기자
http://news.joins.com/article/20261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