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고려시대의 문관[편집]
王字之
1066~1122년
2.1. 생애[편집]
왕자지의 아버지는 고려시대 서리[1]출신이였다. 개국공신 왕유(王儒)[2]의 후손이다.
내시 출신(!!)으로[3][4] 윤관(尹瓘)의 북방개척에 참전해 공을 세웠다. 예종 3년 병마판관(兵馬判官)이 되었고, 윤관의 휘하에서 소드마스터 척과 함께 함주와 영주지방에서 여진족을 무찔렀다.
척준경과 매우 친밀한 사이였던 듯한데 여진족의 기습을 받아 말을 빼앗기고 죽을 뻔했다. 이때 척준경이 구해주고 말을 잃은 그를 위해 적을 추격해 장갑마 1필을 얻어줘서 가까워졌다고. 그 뒤 쭉쭉 승진하여 추밀원사와 이부상서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이후 사은 겸 진봉사로 송나라에 갔다가 대성아악을 가지고 귀국했다.
말년에는 참지정사로 있다가 1122년 향년 57세로 사망했다. 장순(章順)이라는 시호를 받고 예종의 묘정에 배향받는 영예를 안았으나 뒷날 이름 때문에탐욕스럽다는 이유로 배향공신 자격에 부적절하다는 주장이 나와 끝내 배향을 철회했다.
자녀는 1남 1녀를 두었다고 한다.
2.2. 트리비아[편집]
교과서에는 윤관, 척준경만 간략하게 나오는 탓에 일반인들이 거의 모르지만 왕자지 뿐 아니라 여진정벌에 참가한 장군들 거의 대부분은 그렇다.
이름이...
우리나라 역대 최고의 소드마스터인 척준경의 생애가 드라마화되지 않는 이유로 그의 절친인 왕자지의 이름을 드는 사람이 많다. 국방TV 토크멘터리 전쟁사에서 이 시대를 다룰 때도 차마 이름을 부를 수 없어 패널들은 왕장군이라고 애둘러 언급하고 이름은 자막으로만 나왔다.(매인 패널인 임용한 선생은 2000년대 초반에 저서를 통해 왕자지의 존재를 국내 역덕계에 알린 일등공신이나 다름없지만, 그런 그분도 차마 방송에서 그 이름을 부를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왕자지의 초명은 소중(紹中)
소중이, 자는 원장(元長)이니 드라마할 때 왕소중 또는 왕원장으로 나오면 문제가 없다. 아니면 아예 안나와도 된다. 드라마 대조영에서도 중요인물인 친아우 대야발이 발음이 어렵다는 이유로 나오지 않았다. 가상 인물인 흑수돌도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비슷한 이름으로는 후대 명종조 인물인 무장 신보지(申寶至)가 있으며 김자지(金自知) 선생도 있다. 김자지는 고려 말~조선 초기의 문관으로, 그 역시 나름대로의 업적이 있음에도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다. 이 역시 자로 김원명이라고 부르면 된다.
2014년 1월 30일부터 올레마켓 웹툰에서 척준경을 주인공으로 다룬 푸른바람 척준경을 연재하는데 왕자지도 본명 그대로 나온다. 다만 작품 내에 종종 고증 오류가 보인다. 1화에서 이자겸의 난을 조명하는 듯한데 왕궁에서 치고 받았다라 나온 고려사의 기록과는 달리 야전으로 그리는 데다 이자겸의 난 발발 당시 1126년인데 이미 1122년에 사망한 왕자지가 버젓이 살아서 척준경과 붙어다니며, 뭣보다 전형적인 문관인 윤관은 인간흉기급 무관이다. 가장 고질적인 오류는 역시 봉두난발.
1. 소개[편집]
金自知
1367~1435년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관. 김자지라는 이름이 압권이나 고려 중기 문관인 왕자지에 비하면 조금 모자란다. 참고로 호는 일계(逸溪), 자(字)는 원명(元明), 본관(本貫)은 연안(延安)이다.
2. 생애[편집]
고려 우왕 때 문과에 급제했다. 조선 건국 뒤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에 따랐으며 음양, 천문, 지리, 의약분야에서 전문가이다. 이쯤이면 만능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조선시대 때에는 세종 때까지 벼슬자리에 있었으며 한 때 판결을 잘못 내려 파직을 겪었으나 뒷날 재기용되었다. 태종, 세종 때 형조참의, 형조참판, 호조참판, 형조 판서 등 제법 품계가 높은 벼슬에 여러 번 올랐다.
대사헌 재직 시에는 방자한 세도공신들을 탄핵하러 5번이나 상소를 올려 당시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거기에 준재에다가 박학한 학자였다고도 하니, 이쯤이면 교과서에 나올 법도 한 인물이지만 학생들이 이름으로 개드립을 칠까 봐 교과서에는 전혀 없어서 안습. 그 탓에 김자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응? 그럼 이 분은 뭐지?[1]
김자지 선생 묘는 양평에 있으며 현재 양평군 향토 유적 30호로 지정했다. 동생의 이름은 김여지로, 김자지와 같은 양평에 묘가 있다. 가족묘로 조성해서 같은 곳에 모셨다. 사실 김자지 선생 형제의 이름 뜻을 새겨보면 나를 알고(自知) 너를 안다(汝知)는 꽤 멋진 댓구가 된다. 그리고 당시 知의 발음은 '디'였기 때문에 '김자디'로 거시기와는 다르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었다. 근대국어 시기에 대대적으로 발생한 구개음화로 이렇게 된 것. 다 그놈의 구개음화가 문제다 김자지 선생과 일가친척은 아니지만 조선초의 문관으로 김보지라는 인물도 있다. 공교롭게 이 사람도 세종대왕 시대에 활동하여 시대적으로도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