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라위키 육군교도소 항목의 '사형수' 문단에서 발췌함.
2016년 기준으로 4명이 있다. 언론과 나무위키 관련 문서에 실명이 공개되어 있어 그대로 작성한다. 입소 순으로 작성.
김용식
1996년 10월 1일 강원도 화천군 제7보병사단에서 당시 상병으로 총기를 난사하여 3명을 살해하고 1명에게 부상을 입힌 후, 인질극을 벌이다 2시간 반만에 투항하였다.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중 일어난 일이고 이런 문제에 대한 인식이 바닥을 길 때 일어 났던 사건이라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당시 기사도 사건이 일어났다고 짤막하게 보도된 게 전부.
1985년 제28보병사단 화학지원대 총기난사 사건 이후로 한동안 군인에게 사형을 내리지 않았고[13] 이후는 사형집행이 정지되어 있는 상태여서 국군교도소의 최고참이다. 짬밥이 교도소장이랑 비슷하다. 신학대 과정을 공부하고 소내 이발 봉사, 각종 작업, 교회 집사(!)[14]등을 하고 있다. 헌병이나 수감자들이 '사람 좋은데(!) 대체 왜 사형수인지 이해가 안 된다'는 반응도 보인다. 실제로도 모범수이다.
김동민
530GP 사건, 소위 김일병 사건의 그 김일병이다.
사건후 5년간 방에서 나오지 않는 은둔형 생활을 하였다. 교도관, 수형자와 일체 대화를 하지 않고 종교 생활도 하지 않으며 밥도 식당이 아닌 자기 방에서 혼자 먹었다. 5년이 지난 2010년정도 부터는 조금씩 마음이 풀려 혼자 화초도 키우고, 동물도 돌보고 다른 수형자들과 어울리기도 한다. 어쩌다 한번 교회도 가고 판타지 책도 잘 읽는 편. 10년간 독거 생활만 고집 하다가 2014년~2015년에는 김용식과 같은 방을 쓸 정도로 조금 밝아 졌다. 목격자에 의하면 깔깔이에 슬리퍼 끌고 여유있게 걸어 가는데, 나이도 많고 머리도 길어서 간부 수형자인지 알았다고.
유족들은 아직까지 자신의 가족이 북한군에게 죽었다고 믿고 있어서 극히 최근까지도 국군 교도소로 찾아와 동민이를 만나고 싶다고 면회 신청 하고 있다. 이에 김동민 일병 본인이 거부하고 있다.
김민찬
제2해병사단 총기난사 사건, 소위 해병대 총기난사 사건의 주범이다. 아직까지 교도소에 적응 못하고 욱하는 성질을 보이고 있다.
임도빈
제22보병사단 총기난사 사건의 그 임병장이다. 재판이 끝난지 얼마 안되었다.
민간 교도소에서는 사형수의 경우 무기수가 가석방 받을 수 있는 기준인 징역 20년의 1/3정도가 지나야 적응 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때까지는 질풍노도의 시기로 방에만 처밖혀 있거나 말안듣고 싸움질 하는등 개판으로 생활한다. 1/3 시점이 지나면 일도 하고 공부도 하면서 적응하는 모습을 보이고2/3정도가 지나면 슬슬 무기수로 감형 받기 위해 행형점수에 신경쓴다.
그러나 법정 유기 최고형이 징역 15년에 가중시 20년에서 2010년 10월 16일부터 징역 30년에 가중시 50년(...)으로 늘어 나면서 다 포기하고 개판치면서 살고 있다. 2010년 이전 기준으로 무기수는 빠르면 징역 18년 정도만 살고 출소하고 늦어도 21년 정도 살고 출소 했다. 2010년 이후에는 몇년간 출소자가 없다가 최근들어 고령의 모범수의 경우 징역 상한선에 가까운 27년째에 가석방 되는 추세.
이에 따라 국군교도소의 사형수 4인방도 대략 수형생활 30년을 전후하여 무기로 감형 받고, 무기수로 좀 더 살다가 언젠가는 가석방 될 것이다. 민간교도소의 사형수에 비해, 국군 교도소는 사건 발생시 나이들이 워낙 어리니 희망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국군 교도소 수용복 등짝에 찍힌 두 글자가 "희 망"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