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친왕 상해 망명사건
(의친왕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이자 이우왕자의 아버지임! 만약 우리나가 일본에 합방 되지 않았다면 생식기능이 고질이 돼 후사를 이을 수 없었던 순종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될 수도 있었던 사람)
http://img.theqoo.net/dtXDY
1919년 11월 9일, 33인의 민족지도자들과 함께 한 제 2차 독립선언서에는 그의 이름이 가장 먼저 등장한다.
'대한민국 원년 11월, 조선 민족 대표 의친왕 이강'
의친왕은 상해 임시정부 지사들과 연락하여 망명 정부가 수립되면 황족으로서의 예우를 버리고 '일개 신민'의 자격으로 정부를 받아들이겠다고 말 할 정도로 항일 의식이 성장해있던 황족이었다.
전협은 미리 준비한 인력거에 의친왕을 태우고 지하문을 빠져나와 세검정을 거쳐 새벽에 고양군 은평면 구기리에 전협이 준비해 둔 집으로 들어갔다.
의친왕을 안내했던 정남용은 일제 ‘신문조서(3회)’를 통해 구기리에서 의친왕이 했던 말을 전하고 있다.
“2000만 사람들이 조선독립을 위해 소요하고 있는데
내가 모르는 체할 수는 없다….
또 이태왕의 붕어는 그들(일본)이 독살한 것으로서
원수를 갚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왕가의 일원으로서 보통 사람의 열 배, 스무 배 일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길 안내를 할 사람도 있으니 진실로 고마운 일이다.”
이에 정남용은 “전하 같은 분이 해외로 나가서 강화회의나 국제연맹회에 출석해 조선인이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상황을 말하고 일본의 무단정치를 뒤집어야 하겠습니다”고 답했다.
이때 의친왕이 후궁인 수인당(修仁堂) 김흥인과 간호사 최효신을 대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여인에게 “중대한 비밀서류와 태왕(太王) 전하께서
외국인에게 120만원의 돈을 맡긴 증서가 있다”는 이유였다.
고종의 비자금에 대한 아들 의친왕의 증언이므로 이재호는 두 여인과 서류가 든 가방을 가지고 구기리로 왔다.
그러나 두 여인에 대한 여행증명서는 사전에 준비하지 못했으므로 다음에 망명시키기로 하고 의친왕과 대동단원들만 10일 오전 11시 수색역에서 평양행 기차를 탔다.
일행은 평양까지 갔다가 다시 기차표를 사서 안동현으로 향했다. 의친왕은 이을규의 낡은 외투를 입고 3등칸에 탔는데, 검문 때는 이을규가 백부(伯父)라고 대신 대답했다.
.
.
.
일제는 조선과 상해는 물론 일본·만주·시베리아까지 긴급 수배령을 내렸다.
의친왕 일행을 태운 열차는 11일 아침 압록강 철교를 건너기 시작했는데 열차 안에 일경 수십 명이 올라타 검문하기 시작했다.
의친왕 일행은 미리 준비한 여행증명서를 보이고 통과했으나 안심할 수는 없었다.
열차는 11일 오전 11시쯤 안동현역에 도착했다. 안동현에는 아일랜드인 쇼가 운영하는 이륭양행이 있었는데, 임시정부 교통국 산하였다.
이륭양행까지만 가면 이륭양행 소속의 기선을 타고 상해로 갈 수 있었다.
상해에 도착하면 상해와 서울에서 동시에 의친왕 명의의 ‘유고문’이 뿌려질 것이었다.
“통곡하면서 우리 2000만 민중에게 고하노라. 이번의 만주행은…하늘과 땅끝까지 이르는 깊은 원수를 갚으려 함이다” 로 시작하는 유고문은 고종 독살을 폭로하면서 "민중은 한 뜻으로 나와 함께 궐기하자”고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의친왕과 정남용은 안동현역에 이미 쫙 깔린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전협은 1927년 11월 9일 가출옥했다가 이틀 후인 11일 사망했다.
‘동아일보’는 “기미(己未:1919) 당시 ○○○ 전하를 모시고…상해(上海)로 가서 ○○운동을 하고자 했던 대동단 사건의 수범 전협씨”라고 보도했다.
신문기사에서 일제가 이강 공과 독립이란 용어를 삭제했음을 알 수 있다.
의친왕은 일경의 더욱 혹독한 감시 속에 생활하게 되었다.
1919년 11월 20일자의 독립신문 기사에는
"의친왕 전하께서 상해로 오시던 길에 안동에서 적에게 잡히셨도다. 전하 일생의 불우에 동정하고 전하의 애국적 용기를 칭송하던 국민은 전하를 적의 손에서 구하지 못함을 슬퍼하고 통분하리로다" 라고 쓰여있다.
그해의 11월 25일자 독립신문의 기사도 의친왕의 상해행 기사로 대부분 할애되었다.
당시 의친왕은 상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나는 차라리 자유 한국의 한 백성이 될지언정, 일본 정부의 친왕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우리 한인들에게 표시하고, 아울러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에 몸바치기를 원한다."
일본으로부터 계속해서 도일 강요를 받았던 그는 이에 저항하여 일제에 의해 형식적으로 부여되었던 공작위에서도 강제로 폐위되고 이장전하가 되었다.
그때부터 그의 지루한 연금생활이 시작되었다. 의친왕의 처소인 사동궁에는 일본 경찰이 보초를 서면서 드나드는 모든 사람을 감시했고, 궁내 사무실에서는 일본인 사무관이 파견되었으며 그의 처소에는 감시를 위한 유리창이 달렸다.
.
.
.
"내가 이제 술 안먹고야 어떻게 이 세상을 들여다 볼 수 가 있겠는가 술 안먹고 바른 정신으로는 더러운 세상을 보기가 싫어서 할 수 없이 이렇게 하노라"
이 밖에도 의친왕은
1915년, 신한혁명당이 고종황제를 베이징으로 망명시키려 한 보안법위반사에 연루되었으며
1916년, 대한독립의군부 총사령 임병찬이 타계하자, 이에 의친왕이 추모제문을 보낸 사실로 독립군과 연통 혹은 교류가 있었을것으로 보고있다.
또 1919년 11월 24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 본국 외무대신에게 보낸 보고서를 보면 의친왕이 3.1 운동 준비와 관련하여 손병희와 모의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공은 즐겨 시정잡배와 왕래하였는데, 올 봄 독립운동의 주모자 손병희와는 몰래 회합 모의하였고 손병희가 체포되자 공은 매우 낭패한 빛이 있었다."
1919년 늦가을 의친왕은 최진동 장군과 연통했다. 이때 그는 침략한 일제를 몰아내려면 무력 독립 투쟁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3.1 운동을 통해 깨달았다고 말한다.
후에 의친왕은 최진동 장군이 아들을 얻자, 이기권 밀사를 통하여 축하 족자를 보냈는데 이 족자 사이에 항일독립운동에 관련한 밀서를 같이 보내기도 했다.
미국 소식통이었던 의친왕은 김규식을 통해 LA에 기거하던 안창호와 연락을 주고받았으며, 독립운동자금을 보태기도 했다.
1945년 8월 광복 이후, 11월 3일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하자 김구,김규식 등은 의친왕을 찾아가 면담하였다.
그러나 해방 정국에서 황족들이 일제 강점기 당시 망국의 원흉으로 지탄받으면서 그는 별다른 정치적 의사표현은 삼가한 채 여생을 조용히 보냈다고 한다.
1948년 8.15 정부가 수립되자 황실을 배척하던 대통령 이승만의 정책에 의해 망국의 황자로서 고단한 세월을 보내다가 1950년 6.25 전쟁통에 잘 먹지 못하여 영양실조로 몸이 허약해졌고
휴전 후, 사동궁 별궁에서 거주하다 노환으로 병색이 짙어져 1955년 8월 16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의 별궁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눈을 감기 일주일 전 가톨릭으로 귀의하였다. 서울 가회동 한 성당의 박우철 신부를 청해 영세 받기를 원했다.
그는 입교 동기로 자기의 선조가 천주교를 탄압하여 피로 물들인점을 자손의 한사람으로 속죄하고 싶었다는 것과 그렇게 무자비하게 천주교를 믿는자를 처단했어도 웃음으로 목숨을 내놓았고 그후 날로 천주교 세력은 번성해가는 것은 진리이기 때문이란 점을 들었다고 한다.
의친왕은 '비오'라는 세례명으로 대세를 받고 광복절 다음날인 8월 16일 영면했다.
(의친왕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이자 이우왕자의 아버지임! 만약 우리나가 일본에 합방 되지 않았다면 생식기능이 고질이 돼 후사를 이을 수 없었던 순종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될 수도 있었던 사람)
http://img.theqoo.net/dtXDY
1919년 11월 9일, 33인의 민족지도자들과 함께 한 제 2차 독립선언서에는 그의 이름이 가장 먼저 등장한다.
'대한민국 원년 11월, 조선 민족 대표 의친왕 이강'
의친왕은 상해 임시정부 지사들과 연락하여 망명 정부가 수립되면 황족으로서의 예우를 버리고 '일개 신민'의 자격으로 정부를 받아들이겠다고 말 할 정도로 항일 의식이 성장해있던 황족이었다.
전협은 미리 준비한 인력거에 의친왕을 태우고 지하문을 빠져나와 세검정을 거쳐 새벽에 고양군 은평면 구기리에 전협이 준비해 둔 집으로 들어갔다.
의친왕을 안내했던 정남용은 일제 ‘신문조서(3회)’를 통해 구기리에서 의친왕이 했던 말을 전하고 있다.
“2000만 사람들이 조선독립을 위해 소요하고 있는데
내가 모르는 체할 수는 없다….
또 이태왕의 붕어는 그들(일본)이 독살한 것으로서
원수를 갚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왕가의 일원으로서 보통 사람의 열 배, 스무 배 일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길 안내를 할 사람도 있으니 진실로 고마운 일이다.”
이에 정남용은 “전하 같은 분이 해외로 나가서 강화회의나 국제연맹회에 출석해 조선인이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상황을 말하고 일본의 무단정치를 뒤집어야 하겠습니다”고 답했다.
이때 의친왕이 후궁인 수인당(修仁堂) 김흥인과 간호사 최효신을 대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여인에게 “중대한 비밀서류와 태왕(太王) 전하께서
외국인에게 120만원의 돈을 맡긴 증서가 있다”는 이유였다.
고종의 비자금에 대한 아들 의친왕의 증언이므로 이재호는 두 여인과 서류가 든 가방을 가지고 구기리로 왔다.
그러나 두 여인에 대한 여행증명서는 사전에 준비하지 못했으므로 다음에 망명시키기로 하고 의친왕과 대동단원들만 10일 오전 11시 수색역에서 평양행 기차를 탔다.
일행은 평양까지 갔다가 다시 기차표를 사서 안동현으로 향했다. 의친왕은 이을규의 낡은 외투를 입고 3등칸에 탔는데, 검문 때는 이을규가 백부(伯父)라고 대신 대답했다.
.
.
.
일제는 조선과 상해는 물론 일본·만주·시베리아까지 긴급 수배령을 내렸다.
의친왕 일행을 태운 열차는 11일 아침 압록강 철교를 건너기 시작했는데 열차 안에 일경 수십 명이 올라타 검문하기 시작했다.
의친왕 일행은 미리 준비한 여행증명서를 보이고 통과했으나 안심할 수는 없었다.
열차는 11일 오전 11시쯤 안동현역에 도착했다. 안동현에는 아일랜드인 쇼가 운영하는 이륭양행이 있었는데, 임시정부 교통국 산하였다.
이륭양행까지만 가면 이륭양행 소속의 기선을 타고 상해로 갈 수 있었다.
상해에 도착하면 상해와 서울에서 동시에 의친왕 명의의 ‘유고문’이 뿌려질 것이었다.
“통곡하면서 우리 2000만 민중에게 고하노라. 이번의 만주행은…하늘과 땅끝까지 이르는 깊은 원수를 갚으려 함이다” 로 시작하는 유고문은 고종 독살을 폭로하면서 "민중은 한 뜻으로 나와 함께 궐기하자”고 호소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의친왕과 정남용은 안동현역에 이미 쫙 깔린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전협은 1927년 11월 9일 가출옥했다가 이틀 후인 11일 사망했다.
‘동아일보’는 “기미(己未:1919) 당시 ○○○ 전하를 모시고…상해(上海)로 가서 ○○운동을 하고자 했던 대동단 사건의 수범 전협씨”라고 보도했다.
신문기사에서 일제가 이강 공과 독립이란 용어를 삭제했음을 알 수 있다.
의친왕은 일경의 더욱 혹독한 감시 속에 생활하게 되었다.
1919년 11월 20일자의 독립신문 기사에는
"의친왕 전하께서 상해로 오시던 길에 안동에서 적에게 잡히셨도다. 전하 일생의 불우에 동정하고 전하의 애국적 용기를 칭송하던 국민은 전하를 적의 손에서 구하지 못함을 슬퍼하고 통분하리로다" 라고 쓰여있다.
그해의 11월 25일자 독립신문의 기사도 의친왕의 상해행 기사로 대부분 할애되었다.
당시 의친왕은 상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나는 차라리 자유 한국의 한 백성이 될지언정, 일본 정부의 친왕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우리 한인들에게 표시하고, 아울러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에 몸바치기를 원한다."
일본으로부터 계속해서 도일 강요를 받았던 그는 이에 저항하여 일제에 의해 형식적으로 부여되었던 공작위에서도 강제로 폐위되고 이장전하가 되었다.
그때부터 그의 지루한 연금생활이 시작되었다. 의친왕의 처소인 사동궁에는 일본 경찰이 보초를 서면서 드나드는 모든 사람을 감시했고, 궁내 사무실에서는 일본인 사무관이 파견되었으며 그의 처소에는 감시를 위한 유리창이 달렸다.
.
.
.
"내가 이제 술 안먹고야 어떻게 이 세상을 들여다 볼 수 가 있겠는가 술 안먹고 바른 정신으로는 더러운 세상을 보기가 싫어서 할 수 없이 이렇게 하노라"
이 밖에도 의친왕은
1915년, 신한혁명당이 고종황제를 베이징으로 망명시키려 한 보안법위반사에 연루되었으며
1916년, 대한독립의군부 총사령 임병찬이 타계하자, 이에 의친왕이 추모제문을 보낸 사실로 독립군과 연통 혹은 교류가 있었을것으로 보고있다.
또 1919년 11월 24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 본국 외무대신에게 보낸 보고서를 보면 의친왕이 3.1 운동 준비와 관련하여 손병희와 모의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공은 즐겨 시정잡배와 왕래하였는데, 올 봄 독립운동의 주모자 손병희와는 몰래 회합 모의하였고 손병희가 체포되자 공은 매우 낭패한 빛이 있었다."
1919년 늦가을 의친왕은 최진동 장군과 연통했다. 이때 그는 침략한 일제를 몰아내려면 무력 독립 투쟁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3.1 운동을 통해 깨달았다고 말한다.
후에 의친왕은 최진동 장군이 아들을 얻자, 이기권 밀사를 통하여 축하 족자를 보냈는데 이 족자 사이에 항일독립운동에 관련한 밀서를 같이 보내기도 했다.
미국 소식통이었던 의친왕은 김규식을 통해 LA에 기거하던 안창호와 연락을 주고받았으며, 독립운동자금을 보태기도 했다.
1945년 8월 광복 이후, 11월 3일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하자 김구,김규식 등은 의친왕을 찾아가 면담하였다.
그러나 해방 정국에서 황족들이 일제 강점기 당시 망국의 원흉으로 지탄받으면서 그는 별다른 정치적 의사표현은 삼가한 채 여생을 조용히 보냈다고 한다.
1948년 8.15 정부가 수립되자 황실을 배척하던 대통령 이승만의 정책에 의해 망국의 황자로서 고단한 세월을 보내다가 1950년 6.25 전쟁통에 잘 먹지 못하여 영양실조로 몸이 허약해졌고
휴전 후, 사동궁 별궁에서 거주하다 노환으로 병색이 짙어져 1955년 8월 16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국동의 별궁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눈을 감기 일주일 전 가톨릭으로 귀의하였다. 서울 가회동 한 성당의 박우철 신부를 청해 영세 받기를 원했다.
그는 입교 동기로 자기의 선조가 천주교를 탄압하여 피로 물들인점을 자손의 한사람으로 속죄하고 싶었다는 것과 그렇게 무자비하게 천주교를 믿는자를 처단했어도 웃음으로 목숨을 내놓았고 그후 날로 천주교 세력은 번성해가는 것은 진리이기 때문이란 점을 들었다고 한다.
의친왕은 '비오'라는 세례명으로 대세를 받고 광복절 다음날인 8월 16일 영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