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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의 공포, 공존의 기쁨 영화 <덩케르크>
영국과 미국, 독일의 감독 세 명이 연출한 <지상 최대의 작전 (The Longest Day)>(1962)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재현하며 ‘디데이(D-day)’의 어원을 알린다.
병사들 생애에 가장 긴 하루였던 현장을 복원한 영화는 부상당한 연합군 장교(리처드 버튼)와
시체로 거꾸러진 독일군, 헤매는 미군 병사를 한 곳에 모아놓고 명대사로 마무리한다.
“그는 죽었고, 나는 불구가 되었고, 너는 길을 잃었다. 전쟁이란 항상 이런 거야.”
1944년 노르망디 작전과
1940년 덩케르크에서 실행한 다이나모 작전은
각각 전진과 퇴각이라는 성격이 전혀 다른 전술이었지만, 둘 다 세계 전쟁사의 기록과 순위를
다툴 만큼 규모가 크고 희생자는 많았다.
역사엔 ‘만약’이라는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병사들이 덩케르크를 탈출하지 못했다면
노르망디 장악과 파리 탈환에 이어 독일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을까.
다이나모 작전을 통해 살아 돌아간 연합군이 33만 8,226명이었으니 말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덩케르크 (Dunkirk)>는 당시 전황을 알면 한층 실감나게 감상할 수 있다.
1940년 5월 초,
폴란드를 삼킨 나치 독일은 베네룩스 3국을 연달아 손에 넣었다.
독일의 파죽지세 공격에도 방어가 최선이라며 마지노선을 친 프랑스는 느긋했고,
영국을 위시한 연합군도 벨기에 국경에 구축한 방어망만 믿었다.
“보루에 틀어박혀 있으면 진다”는 나폴레옹의 말을 잊었을까.
마지노선의 북쪽 끝머리 아르덴 지역은 기어오르기도 벅찬 고원이자 삼림 지대였다.
하지만 독일 기갑 군단은 아르덴을 단숨에 돌파해 연합군의 뒤통수를 치며 포위망을 조여 갔다.
덩케르크 해안에 묶인 연합군은 숨을 곳도, 도망칠 수도 없는 궤멸 위기에 놓인다.
그런데 5월 24일 독일군에게 진격 중지 명령이 떨어진다.
입에 문 사탕을 빼앗듯 공격을 멈추게 한 이유는 아직껏 수수께끼로 남는다.
히틀러의 정신 상태가 불안했다거나 공군 총사령관 괴링이 무리수를 두었다는 등 추측과
가설만 무성하다.
나흘 뒤 히틀러가 명령을 철회했지만, 영국은 그 일주일을 틈타 어선을 포함한 선박 850척을 동원해
연합군을 본국으로 탈출시킨다. 유럽 현대사 아니 인류 역사를 바꾼, 천신만고 끝 기사회생이었다.
덩케르크의 살풍경은 속죄와 구원을 저울질한 영화 <어톤먼트>에 비쳤었다.
영국군 제임스 맥어보이를 뒤쫓는 카메라가 구호와 절규, 포연으로 뒤덮인 해변을
긴 호흡으로 담아냈다.
<덩케르크>를 연출한 크리스토퍼 놀란은 기발한 상상력과 다양한 장르 섭렵, 무엇보다 시간과 공간을
옮겨 뒤엎고 포개는 솜씨는 마술에 가깝다.
<인셉션>에서 꿈속의 꿈을 꾸게 하여 타인의 생각을 훔치더니
<인터스텔라>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으로 풀어낸 5차원 공간에 가족애를 곁들인다.
디지털 시대에서도 필름과 아이맥스 촬영을 고집하는 놀란 감독이 처음으로 실화를 다룬다.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결말을 짐작할 수 있는 데다 대사 분량이 적고 상영 시간은 106분에 그친다.
이번에도 시공간 이동에 따른 서서 구조가 간단치 않은데, 초반에 한 눈 팔지 않으면
따라잡긴 어렵지 않다.
다만 시시각각 변하는 화면 비율에 당혹스러울 수도 있겠다.
가로와 세로의 비율이 서로 다른 화면 6개가 들쑥날쑥하는 건 인물들의 갇히고 쫓기는 심리 상태를
보여주기 위해서지만 조금은 방정맞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다와 해변에서, 그리고 공중에서 싸울 것입니다.”
엔딩에 들리는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의 다짐대로 영화는 서로 다른 세 개 시공간에서 펼쳐진다.
첫 번째는 해변 잔교를 무대로 영국군 토미(핀 화이트헤드)와 동료 병사들의 일주일에 걸친 사투를
그린다.
생존 본능 앞에 전우애란 쓸모없는 허풍이어서 너를 버려야 내가 산다, 는 흉포한 이기심에 짓눌린다.
병사들은 “생존은 불공평한 것”이라는 흰소리로 살의를 정당화하려 한다.
바다에서의 하루를 다룬 두 번째 시간대에는 덩케르크 철수 작전에 징발된 민간인 선박이 등장한다.
늙수그레한 선장 도슨(마크 라이런스)은 위기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대응하지만, 그가 살려낸 해군
(킬리언 머피)은 항로와 목표를 눈치 챈 뒤엔 미쳐 날뛴다.
세 번째는 영국군 조종사 파리어 (톰 하디)가 하늘에서 보내는 한 시간으로 짧지만 가장 맹렬하다.
영국 스핏파이어 트리플 편대와 독일 폭격기들의 공중전은 곡예처럼 아찔하고 불꽃놀이마냥
황홀하다.
블록버스터 액션을 기대한 관객들은 아쉽지만 억울하지는 않을 터이다.
일찍이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라쇼몽>에서 선보인 다중 플롯,
여러 겹의 서술 방식은 퍼즐 조각
맞추기처럼 흥미롭지만 잔재주를 많이 부리면 피로감이 쌓인다.
<덩케르크>의 3원화한 이야기 구성은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트래픽>에도 나왔기에
그다지 새롭지는 않아도, 길고 짧은 시간선을 수렴해 하나로 합치는 과정은 세공사의 손길처럼
섬세하다.
입체로 띄우고 평면으로 다림질하려는 걸까. 1일, 1주일, 1시간을 늘어놓거나 엇갈리게 하는 수법이
아주 정교해 같은 시간대에 일어난 사건처럼 느껴진다.
놀란 감독은 대사로 설명하기보다 상황으로 묘사하고, 비주얼을 강조하기보다 음향에 공들인다.
밀폐와 고립이 자아내는 공포감. 감독의 오랜 파트너 한스 짐머가 조율하는 음악과 사운드 효과는
또 다른 주인공 노릇을 한다.
시계추 소리, 배의 엔진에 모터 소리가 뒤섞인 기계음이 상영 시간 내내 신경을 긁어댄다.
여기에 현악기 고음은, 여자의 내장을 잘라 바이올린 현을 만든다는 옛날 옛적 기괴한 소문처럼
머리칼을 곤두세운다.
피격과 추락, 특히 총알이 선체를 벌집으로 만들 때의 음향은 환청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얼얼하다
http://img.theqoo.net/noxG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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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을 최우선 가치로 설정했기에 이분법 구도가 없으며 상황을 극적으로 부풀리지 않는다.
팔 다리가 잘리고 살점이 튀고 피가 쏟아지는 참혹한 전투 따위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다.
전투의 쾌감, 살육의 흥분을 맛보려는 이들이 지루하다고 불만을 터뜨릴 만하다.
실체 모를 그림자가 주는 위협이고 공포인가.
조종사를 제하곤 독일군들은 코빼기도 비치질 않으니 ‘지피지기’ 손자병법은 몸 둘 바를 모른다.
연합군을 위협하는 것은 잠수함과 전투기, 총소리와 어뢰 같은 보이지 않는 적이다.
두드러지는 캐릭터도 없는 데다 주요 인물 대다수가 신인들이어서 얼굴조차 구분하기 어렵다.
우리에게 친숙해진 배우 톰 하디도 마스크를 벗어야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이다.
살아남는 것 자체가 의미 있다는 걸 거듭 강조하지만, 연민으로 감싸거나 감동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래서 신파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병사들은 항복이든 전멸이든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기적은 그런 절박함과 간절함에서 오는 지도 모른다.
아날로그 감성으로 끌어낸 현장감은 다큐멘터리 영화에 뒤지지 않는다.
관객은 3인칭 관찰자가 아닌 1인칭 주인공으로 뛰어든다.
구경하기보다 체험케 하는 힘은 감독의 관록과 내공에서 온다.
탈초점 상태로 처리한 파리어의 마지막 모습과 17세 소년의 죽음을 기리는 기사를 눈여겨봐야 한다.
전쟁 영웅도 신화도 없다.
희생과 헌신이 있을 뿐이다.
귀환했어도 패잔병처럼 풀이 죽은 젊은 군인을 시민들이 반기고 위로한다.
“그걸로 충분해!” 생존 드라마의 정점을 찍는 외마디다.
영국 출신 감독이 선조들의 사투를 영국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의 관현악 변주곡 <님로드(Nimrod)>로
응원한다.
덩케르크에서 제 나라 병사 12만 명을 살려낸 프랑스로서는 떨떠름한 기분이 들 수 있겠다.
누군가는 너무 자주 영국 만세를 부른다고 시비를 걸지도 모른다.
영국인들이 단결과 극복 의지를 다지는 ‘덩케르크 정신’은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영화 <덩케르크>를 공존의 기쁨, 인간 존엄의 찬가로 불러도 좋을 이유이다
http://img.theqoo.net/KOEmp
'Dunkirk' (2017)
(영화 평론가 박평식)
이분 영화 20자평으로 유명해서 그렇지
이렇게 장문의 리뷰글도 꾸준히 항상 쓰고 계심
고립의 공포, 공존의 기쁨 영화 <덩케르크>
영국과 미국, 독일의 감독 세 명이 연출한 <지상 최대의 작전 (The Longest Day)>(1962)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재현하며 ‘디데이(D-day)’의 어원을 알린다.
병사들 생애에 가장 긴 하루였던 현장을 복원한 영화는 부상당한 연합군 장교(리처드 버튼)와
시체로 거꾸러진 독일군, 헤매는 미군 병사를 한 곳에 모아놓고 명대사로 마무리한다.
“그는 죽었고, 나는 불구가 되었고, 너는 길을 잃었다. 전쟁이란 항상 이런 거야.”
1944년 노르망디 작전과
1940년 덩케르크에서 실행한 다이나모 작전은
각각 전진과 퇴각이라는 성격이 전혀 다른 전술이었지만, 둘 다 세계 전쟁사의 기록과 순위를
다툴 만큼 규모가 크고 희생자는 많았다.
역사엔 ‘만약’이라는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병사들이 덩케르크를 탈출하지 못했다면
노르망디 장악과 파리 탈환에 이어 독일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을까.
다이나모 작전을 통해 살아 돌아간 연합군이 33만 8,226명이었으니 말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덩케르크 (Dunkirk)>는 당시 전황을 알면 한층 실감나게 감상할 수 있다.
1940년 5월 초,
폴란드를 삼킨 나치 독일은 베네룩스 3국을 연달아 손에 넣었다.
독일의 파죽지세 공격에도 방어가 최선이라며 마지노선을 친 프랑스는 느긋했고,
영국을 위시한 연합군도 벨기에 국경에 구축한 방어망만 믿었다.
“보루에 틀어박혀 있으면 진다”는 나폴레옹의 말을 잊었을까.
마지노선의 북쪽 끝머리 아르덴 지역은 기어오르기도 벅찬 고원이자 삼림 지대였다.
하지만 독일 기갑 군단은 아르덴을 단숨에 돌파해 연합군의 뒤통수를 치며 포위망을 조여 갔다.
덩케르크 해안에 묶인 연합군은 숨을 곳도, 도망칠 수도 없는 궤멸 위기에 놓인다.
그런데 5월 24일 독일군에게 진격 중지 명령이 떨어진다.
입에 문 사탕을 빼앗듯 공격을 멈추게 한 이유는 아직껏 수수께끼로 남는다.
히틀러의 정신 상태가 불안했다거나 공군 총사령관 괴링이 무리수를 두었다는 등 추측과
가설만 무성하다.
나흘 뒤 히틀러가 명령을 철회했지만, 영국은 그 일주일을 틈타 어선을 포함한 선박 850척을 동원해
연합군을 본국으로 탈출시킨다. 유럽 현대사 아니 인류 역사를 바꾼, 천신만고 끝 기사회생이었다.
덩케르크의 살풍경은 속죄와 구원을 저울질한 영화 <어톤먼트>에 비쳤었다.
영국군 제임스 맥어보이를 뒤쫓는 카메라가 구호와 절규, 포연으로 뒤덮인 해변을
긴 호흡으로 담아냈다.
<덩케르크>를 연출한 크리스토퍼 놀란은 기발한 상상력과 다양한 장르 섭렵, 무엇보다 시간과 공간을
옮겨 뒤엎고 포개는 솜씨는 마술에 가깝다.
<인셉션>에서 꿈속의 꿈을 꾸게 하여 타인의 생각을 훔치더니
<인터스텔라>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으로 풀어낸 5차원 공간에 가족애를 곁들인다.
디지털 시대에서도 필름과 아이맥스 촬영을 고집하는 놀란 감독이 처음으로 실화를 다룬다.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결말을 짐작할 수 있는 데다 대사 분량이 적고 상영 시간은 106분에 그친다.
이번에도 시공간 이동에 따른 서서 구조가 간단치 않은데, 초반에 한 눈 팔지 않으면
따라잡긴 어렵지 않다.
다만 시시각각 변하는 화면 비율에 당혹스러울 수도 있겠다.
가로와 세로의 비율이 서로 다른 화면 6개가 들쑥날쑥하는 건 인물들의 갇히고 쫓기는 심리 상태를
보여주기 위해서지만 조금은 방정맞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다와 해변에서, 그리고 공중에서 싸울 것입니다.”
엔딩에 들리는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의 다짐대로 영화는 서로 다른 세 개 시공간에서 펼쳐진다.
첫 번째는 해변 잔교를 무대로 영국군 토미(핀 화이트헤드)와 동료 병사들의 일주일에 걸친 사투를
그린다.
생존 본능 앞에 전우애란 쓸모없는 허풍이어서 너를 버려야 내가 산다, 는 흉포한 이기심에 짓눌린다.
병사들은 “생존은 불공평한 것”이라는 흰소리로 살의를 정당화하려 한다.
바다에서의 하루를 다룬 두 번째 시간대에는 덩케르크 철수 작전에 징발된 민간인 선박이 등장한다.
늙수그레한 선장 도슨(마크 라이런스)은 위기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대응하지만, 그가 살려낸 해군
(킬리언 머피)은 항로와 목표를 눈치 챈 뒤엔 미쳐 날뛴다.
세 번째는 영국군 조종사 파리어 (톰 하디)가 하늘에서 보내는 한 시간으로 짧지만 가장 맹렬하다.
영국 스핏파이어 트리플 편대와 독일 폭격기들의 공중전은 곡예처럼 아찔하고 불꽃놀이마냥
황홀하다.
블록버스터 액션을 기대한 관객들은 아쉽지만 억울하지는 않을 터이다.
일찍이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라쇼몽>에서 선보인 다중 플롯,
여러 겹의 서술 방식은 퍼즐 조각
맞추기처럼 흥미롭지만 잔재주를 많이 부리면 피로감이 쌓인다.
<덩케르크>의 3원화한 이야기 구성은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트래픽>에도 나왔기에
그다지 새롭지는 않아도, 길고 짧은 시간선을 수렴해 하나로 합치는 과정은 세공사의 손길처럼
섬세하다.
입체로 띄우고 평면으로 다림질하려는 걸까. 1일, 1주일, 1시간을 늘어놓거나 엇갈리게 하는 수법이
아주 정교해 같은 시간대에 일어난 사건처럼 느껴진다.
놀란 감독은 대사로 설명하기보다 상황으로 묘사하고, 비주얼을 강조하기보다 음향에 공들인다.
밀폐와 고립이 자아내는 공포감. 감독의 오랜 파트너 한스 짐머가 조율하는 음악과 사운드 효과는
또 다른 주인공 노릇을 한다.
시계추 소리, 배의 엔진에 모터 소리가 뒤섞인 기계음이 상영 시간 내내 신경을 긁어댄다.
여기에 현악기 고음은, 여자의 내장을 잘라 바이올린 현을 만든다는 옛날 옛적 기괴한 소문처럼
머리칼을 곤두세운다.
피격과 추락, 특히 총알이 선체를 벌집으로 만들 때의 음향은 환청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얼얼하다
http://img.theqoo.net/noxGv
http://img.theqoo.net/mPOMD
생존을 최우선 가치로 설정했기에 이분법 구도가 없으며 상황을 극적으로 부풀리지 않는다.
팔 다리가 잘리고 살점이 튀고 피가 쏟아지는 참혹한 전투 따위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다.
전투의 쾌감, 살육의 흥분을 맛보려는 이들이 지루하다고 불만을 터뜨릴 만하다.
실체 모를 그림자가 주는 위협이고 공포인가.
조종사를 제하곤 독일군들은 코빼기도 비치질 않으니 ‘지피지기’ 손자병법은 몸 둘 바를 모른다.
연합군을 위협하는 것은 잠수함과 전투기, 총소리와 어뢰 같은 보이지 않는 적이다.
두드러지는 캐릭터도 없는 데다 주요 인물 대다수가 신인들이어서 얼굴조차 구분하기 어렵다.
우리에게 친숙해진 배우 톰 하디도 마스크를 벗어야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이다.
살아남는 것 자체가 의미 있다는 걸 거듭 강조하지만, 연민으로 감싸거나 감동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래서 신파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병사들은 항복이든 전멸이든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기적은 그런 절박함과 간절함에서 오는 지도 모른다.
아날로그 감성으로 끌어낸 현장감은 다큐멘터리 영화에 뒤지지 않는다.
관객은 3인칭 관찰자가 아닌 1인칭 주인공으로 뛰어든다.
구경하기보다 체험케 하는 힘은 감독의 관록과 내공에서 온다.
탈초점 상태로 처리한 파리어의 마지막 모습과 17세 소년의 죽음을 기리는 기사를 눈여겨봐야 한다.
전쟁 영웅도 신화도 없다.
희생과 헌신이 있을 뿐이다.
귀환했어도 패잔병처럼 풀이 죽은 젊은 군인을 시민들이 반기고 위로한다.
“그걸로 충분해!” 생존 드라마의 정점을 찍는 외마디다.
영국 출신 감독이 선조들의 사투를 영국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의 관현악 변주곡 <님로드(Nimrod)>로
응원한다.
덩케르크에서 제 나라 병사 12만 명을 살려낸 프랑스로서는 떨떠름한 기분이 들 수 있겠다.
누군가는 너무 자주 영국 만세를 부른다고 시비를 걸지도 모른다.
영국인들이 단결과 극복 의지를 다지는 ‘덩케르크 정신’은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영화 <덩케르크>를 공존의 기쁨, 인간 존엄의 찬가로 불러도 좋을 이유이다
http://img.theqoo.net/KOEmp
'Dunkirk' (2017)
(영화 평론가 박평식)
이분 영화 20자평으로 유명해서 그렇지
이렇게 장문의 리뷰글도 꾸준히 항상 쓰고 계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