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에는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본에서는 추리소설의 대명사로 통하는 작가 에도가와 란포.
본명은 히라이 타로이지만, 추리소설의 시초인 애드거 앨런 포를 존경해서
포의 일본식 발음과 유사한 江戸川乱歩(에도가와 란포)라는 필명으로 활동했다.
1894년에 태어나 일본 제국 시대에 활동했는데,
워낙 기괴하고 그로테스크한 작품들을 쓰다 보니 검열에 자주 걸려서
활동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전장에서 사지와 시력, 청력을 모두 잃고 말까지 못 하게 된 상이군인 남편을
은근히 괴롭히는 데서 어두운 쾌락을 느끼는 아내와 남편의 관계를 묘사한 단편 <애벌레>가 상이군인과 유가족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발행금지 처분을 당하자, 란포가 운영하던 여관에 극우 깡패들이 몰려와서 깽판을 치고 가기도 했다고.
하여튼 그런 어려운 와중에도 <아케치 고고로 시리즈>, <인간 의자>, <소년 탐정단> 등
일본 추리소설의 초석을 놓은 작품들을 다수 발표했고,
그 공로를 기리며 1955년부터 코단샤에서 ‘에도가와 란포상’이 탄생해
신인 작가를 발굴하고 있다. (다카노 가즈아키의 <13계단>, 히가시노 게이고의 <방과 후>등 국내에도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을 내세워 홍보한 책들이 많다.)
사실 란포는 패전(1945) 이후에는 집필보다는 평론과 신인 발굴에 집중해서
마츠모토 세이쵸, 츠츠이 야스타카, 호시 신이치, 야마다 후타로 등 걸출한 신인들을 발굴하고 ‘일본추리작가협회’를 발족하는 등 추리소설 작가들 및 편집자들의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 시기 란포는 추리소설에 대한 수필이나 인터뷰 같은 활동을 주로 했는데,
흥미로운 것들을 몇 개 살펴보자.
1. 유형별 트릭 집성
2만여 권의 추리소설, 범죄, 형법, 심리학 등의 장서를 갖추고
평생 트릭과 탐정만 생각하며 살아온 란포는
자기가 봤던 트릭 821개를 유형별로 분류해 변호를 매겼는데,
그 분류도 참 세세하기도 하다. 제1장인 ‘범인에 관한 트릭’을 살펴보면
(A) 1인 2역
1. 범인이 피해자로 가장 2. 공범이 피해자로 가장
3. 범인이 피해자 중 하나로 가장 4. 범인과 피해자가 동일인물
5. 범인이 제삼자에게 누명 6. 범인이 가공의 인물로 가장
7. 대역(2인 1역, 쌍둥이 등) 8. 1인 3역, 3인 1역, 2인 4역
(B) 뜻밖의 범인
1. 탐정이 범인 2. 재판관, 경찰관, 교도소장이 범인
3. 사건 발견자가 범인 4. 서술자가 범인
5. 어린아이, 노인 6. 장애인, 중환자 7.시체
8. 인형 9. 범인이 여럿 10. 동물
(C) 범인의 자기 소멸
1. 불에 타 죽은 걸로 꾸밈 2. 그 밖의 죽음을 가장
3. 다른 사람으로 변신 4. 자취를 감춤
이런 식이다. 이후로도
범죄 현장과 흔적에 관한 트릭, 범행 시간에 관한 트릭, 흉기와 독약, 사람과 사물의 은닉, 그 밖의 각종 트릭, 암호 기법의 종류, 이상한 범죄 동기, 기묘한 범죄 발각 단서…
이 모든 장을 1장처럼 또 수십 개의 항목으로 세분해서 ‘어떤 작가의 어떤 작품에 이런 트릭이 사용됐다. 이건 또 다른 작가의 이 작품에 나온 이런 트릭과 유사한데…’ 하며 예시까지 들어가며 설명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란포의 작품에 나오는 기괴한 미친놈들은 그냥 본인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싶어진다.
각각의 트릭들만큼이나 이걸 분류하고 있는 란포 또한 어지간히도 흥미롭다.
2. 스릴론
란포는 추리소설을
‘범죄에 관한 난해한 비밀이 논리에 의해 서서히 풀려가는 재미에 주안점을 둔 소설’
이라고 정의하며 트릭과 트릭의 해결 그 자체를 즐기는 ‘논리 문학’이라고 했다.
그러나 란포는 동시에 논리야말로 추리의 본질이지만 논리를 감싸고 있는
‘스릴’이 없다면 하나의 읽을 만한 작품으로 성립하지 않는다고 했다.
‘살인(혹은 범죄)은 탐정소설의 필수 조건은 아니다. 그럼에도 수많은 탐정작가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살인 사건을 소재로 삼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스릴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스릴 역시 범죄와 마찬가지로 탐정소설의 필수 조건은 아니다. 그러나 실재로는 어떤 탐정소설에서든 예외 없이 스릴이 중요한 요소로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의심하기 어렵다.’ -본문 266쪽
그렇다면 그렇게 중요한 스릴이라는 게 무엇일까?
란포는 옥스퍼드 영어사전을 인용하며 스릴은 ‘예리하고 급격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나아가 그러한 감동에는 무수한 단계가 있는데, 그것은 곧 독자의 지적 수준의 단계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스릴을 또 몇 가지로 분류한다.
이렇게 분류를 좋아해서 자기 작품의 피해자도 토막토막 분류했던 걸까.
하여튼 그 분류는 또 다음과 같다.
(1) 원초적인 스릴

격정: 군국주의 시대에 개선군을 맞이하며 국기를 흔들고 소리지를 때 느끼는 감정
고통: 작중 인물의 처지나 끔찍한 정경의 묘사에 공포를 느끼는 감정
슬픔, 분노 등 극단적 감정
(2) 지적인 스릴

몸부림칠수록 빠져드는 늪에 빠진 인간의 공포
나침반 없이 사막을 헤매는 여행자의 공포
(3) 복합적인 스릴
꿈과 환상에서 비롯된 공포
착각, 건망증에서 비롯된 공포
1인 2역, 즉 몽유병이나 이중인격의 공포
(4) 순수한 스릴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에서 보이는, 자기 내부의 모순 및 발작적인 충동과 이성 사이의 투쟁에서 나오는 스릴
일상적인 평범한 배경에서 인물들이 기묘하게 과장된 행동을 할 때의 스릴(카프카의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스릴을 말하는 것 같다)
3. 아서 쾰러(Arthur Koehler) 이야기
현미경을 이용해 미세한 변화를 잡아내는 ‘미시적 탐정법’에 대해 논하면서,
란포는 ‘린드버그 사건’이라는 실화를 하나 소개한다.
‘린드버그 사건’은 유아를 납치해서 몸값을 요구한 사건인데,
현장에 남겨진 유일한 증거는 아기방에 침입할 때 쓴 수제 사다리뿐이었다.
경찰이 이 사다리를 철저히 조사하고도 아무 단서도 찾지 못하던 때,
목수 출신 임산물연구원(제품에 적합한 목제를 조사하는 사람) 아서 쾰러가 나섰다.
쾰러는 사다리를 조사해 세로 각목은 노스캐롤라이나산 소나무고,
가로대는 폰데로사 소나무, 쐐기는 자작나무이며,
세로 각목 끝에 붙인 자투리 목재는 전나무인데,
전나무의 나사 구멍 안에 녹슨 흔적이 없는 걸로 보아
이 사다리는 비를 맞지 않는 실내에서 사용되었음을 밝혀냈다.
그 후 쾰러는 대패 자국을 조사해서 사다리의 세로 각목은
기계의 회전축에 여덟 개의 칼날이 장착된 자동 대패로 가공되었으며,
여덟 개의 칼날 중 다섯 번째 칼날이 미세하게 어긋나 있었고,
그 어긋난 칼날이 남긴 자국만 다른 자국보다 조금 더 깊다는 것을 알아냈다.
쾰러는 이런 결과를 바탕으로 자동 대패 설비를 갖춘 제재소 1600곳에
범인의 사다리 세로 각목과 같은 굵기의 각목 견본을 보내달라고 했고,
모든 견본들을 현미경으로 조사해서 사우스캐롤라이나의 한 제재소를 특정했다.
이 제재소에서 문제의 대패가 사용된 것은 30개월 전.
그 30개월 동안 가공해 출하한 각목은 화물열차 45량 분량, 전국 25개소! 썅!
쾰러와 경찰들은 18개월 동안 쌩고생을 해서 뉴욕의 한 도매상을 특정했고,
그곳에서 판매한 각목 일부가 야적장 쓰레기통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음을 알아냈지만,
그 도매상은 현금만 받았기 때문에 고객 명부가 없어서 막다른 길에 몰렸다. 예미!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용의자가 잡혔다.
범인에게 몸값으로 준 돈에는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표시가 되어 있었는데,
이 지폐를 쓰다 잡힌 남자가 있었던 것.
그 남자, 브루노 리하르트 하우프트만은 돈이란 돌고 도는 것인데
나도 이 지폐를 뭐 어디서 거스름돈으로 받았을 수도 있는 거 아니냐,
특정 지폐를 언제 어디서 구했는지 기억하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있느냐며
매우 설득력 있는 반론을 펼쳤지만,
그의 직업이 목수였으며 과거 문제의 뉴욕 목재상에서 바로 그 각목을 구입한 사실이 밝혀졌다.
앞서 쾰러가 처음 사다리를 조사했을 때, 사다리 한쪽 끝에 네 개의 나사못으로 전나무를 이어 붙인 흔적이 있었다고 했던 걸 기억하는가?
쾰러는 하우프트만의 집에 네 개의 못 구멍이 난 전나무가 있는지 수색했고,
마침내 다락방 마룻널에서 나사못 구멍 위치가 정확히 위치하는 구멍을 찾았으며,
사다리를 다듬는 데 쓴 손대패 또한 찾아냈다.
이로써 하우트프만은 진범으로 밝혀졌고, 훗날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가슴 따뜻한 이야기.
란포가 원래 이상한 사람이라 이런 것들을 연구한 걸까,
아니면 이런 것들을 연구하다 보니 이상해진 걸까.
그의 작품에서 나는, 비릿하고 축축하지만 자꾸 맡게 되는,
암내와도 같은 그 음험한 냄새가 다시 맡고 싶어지는구나
출처

에도가와 란포의 트릭 해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