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오디세이> 번역가, 놀란의 '형편없는' 시나리오 비판 전문 (스포)
무명의 더쿠
|
07:10 |
조회 수 2685

https://x.com/Variety/status/2081785202704031939
https://x.com/CoreyAtad/status/2081715975775268984
복잡할 것 없는 남자
에밀리 윌슨
크리스토퍼 놀런이 호메로스의 고대 그리스 서사시를 2억 5천만 달러짜리 액션 영화로 옮긴 작품은, 몇 시간 동안 무더위를 피해 있기에 꽤 즐거운 선택이다. 놀런의 전매특허인 서사의 도약과 반전도 비교적 따라가기 쉽고, 이야기 속에 또 다른 이야기가 겹겹이 들어 있는 오디세이와도 잘 어울린다. 십 대인 내 아이들도 재미있게 봤다. 놀런의 다른 영화들과 달리 오디세이는 지루하지 않다. 원작 자체가 아무리 해도 완전히 망치기는 불가능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시청각적 볼거리로, 공들여 연출한 미국 독립기념일 불꽃놀이와 비슷하다. 서사와 감정의 깊이 역시 그와 비슷한 수준이다.
놀런은 이전 영화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시공간의 단절, 마법과 속임수, 기술과 기교, 경쟁, 대체, 가면, 소통의 실패, 우리가 기억하는 것과 잊기로 선택하는 것에 관심을 보인다. 이번에도 살아남는 것 자체가 일종의 승리로 묘사된다. 이번에도 물에 빠지거나 익사 직전까지 가는 길고 폐쇄공포증을 유발하는 장면들이 등장하고, 건물이 불길에 휩싸이고 이동 수단이 폭발하는 기술적으로 인상적인 장면들이 이어진다. 이번에도 한 남자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성을 되찾거나 그녀를 위해 복수하고자 필사적으로 나서는 여정을 지켜보게 된다.
나는 놀런이 이처럼 호메로스적인 주제에 친화적인 만큼 새로운 창조적 경지에 도달하고, 보다 설득력 있는 인물들을 빚어낼 수 있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오디세이』에는 놀런 영화에서 늘 보아온 과장된 웅장함과 피상성이 그대로 공존한다. 불안에 시달리는 에우리로코스 역의 히메시 파텔은 오디세우스의 오른팔이지만 결국 죽음을 맞이할 운명인데, 세이렌의 곁을 무사히 지나가기 위해 귀를 밀랍으로 막는다. 그러나 내게는 귀를 막을 밀랍 한 통조차 없었기에 몽둥이와 지팡이, 칼이 부딪치고 갑옷이 쩌렁거리는 소리, 천둥과 파도, 신음과 비명, 무너지는 궁전과 불타는 신전이 만들어내는 온갖 굉음에 고스란히 노출되어야 했다.
그러나 밀랍 없이 돛대에 묶인 채 세이렌들 곁을 지나가는 맷 데이먼의 오디세우스와 달리, 나는 난파와 피의 학살을 바라보면서도 아무런 감정적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세이렌은 불편해 보이는 바위 위에 몸을 누인 벌거벗은 여성들로 그려진다. 개 아르고스가 등장할 때조차 내 눈은 메마른 채였다. 강아지 시절의 아르고스는 동물을 사랑하는 오늘날의 관객 취향에 맞추려는 듯 예상대로 사랑스러움이 한껏 강조된다. 인간 인물들에게도 그만큼 진지한 관심을 기울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호메로스의 서사시 자체도 이미 일종의 각색이었다. 이 시는 당시로서는 비교적 새로운 기술이었던 문자 알파벳을 활용해 기존의 신화적 전통을 새롭게 구성했다. 참전 용사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를 다시 빚어내면서, 이주와 식민지 개척, 도시화가 진행되던 고대 그리스의 아르카이크 시대에 그리스어 사용자들이 품고 있던 복잡한 문제의식과 공명하게 했다.
기원전 7세기의 그리스 공동체들 가운데 일부는 과두정의 지배를 받았고, 일부는 한 사람의 통치를 받았다. 이 시는 오디세우스의 동료들이나 그의 아내 페넬로페에게 구혼하는 남자들처럼 집단을 이룬 남성들의 필요와 욕망, 그리고 그들 모두를 지배하고 자신만의 영원한 명성을 얻으려는 강력하고 교활한 한 남자의 필요와 욕망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을 추적한다.
문화와 기술이 변화하던 시대를 배경으로, 이 작품은 공간뿐 아니라 시간까지 거슬러 돌아가려는 환상을 탐구하는 동시에 그에 따르는 위험과 대가도 보여준다. 또한 낯선 사람을 만나는 일, 그들의 집에 들어가는 일, 그리고 자신의 집으로 그들을 맞아들이거나 거부하는 일에 따르는 어려움과 씨름한다. 이것이 오늘날과 공명하는 지점은 명백하며, 놀런의 영화도 흩어져 있기는 하지만 흥미로운 방식으로 그중 일부를 암시한다. 그러나 영화의 비전은 지나치게 혼란스럽고 등장인물들은 너무 미숙하게 그려져 있어, 거대한 사상에 관해 제시하려던 것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다. 다만 거대한 폭발과 거대한 거인을 보여주는 데만큼은 매우 뛰어나다.
각색은 번역처럼 원작을 정확하게 따라갈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가장 뛰어난 각색 중에는 원작을 근본적으로 변형하거나 그에 저항하면서, 해럴드 블룸이 선대 작품에 대한 ‘강력한 오독’이라고 부른 것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있다. 에우리피데스의 헬레네,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밀턴의 실낙원, 조이스의 율리시스, 월컷의 오메로스, 애트우드의 페넬로피아드, 매들린 밀러의 키르케, 현대의 난민 수용소를 배경으로 한 리사 피터슨의 연극 등 오디세이에 대한 가장 인상적이고 창조적인 응답들은 원작의 구조와 서사, 가치관을 새롭게 고찰한다.
이론적으로 볼 때 놀런은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와 그에 따르는 위험을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그의 첫 장편영화 미행(1998)은 시공간을 가로질러 낯선 사람을 뒤쫓는 행위의 매혹과 위험을 다룬 강렬한 흑백 스릴러였다. 미행이 암시하듯, 스스로 영리하다는 잘못된 믿음 외에는 뚜렷한 정체성이 없는 자가 누군가를 뒤쫓으려 한다면, 사냥꾼은 오히려 사냥감이 되기 쉽다.
하지만 어떤 유혹을 피해야 하는지 아는 것과 실제로 그 유혹을 피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오디세우스의 부하들도 태양신의 신성한 소 떼를 죽이고 나서야 그 사실을 뼈아픈 대가와 함께 깨닫는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욕망을 일시적으로 억누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기와 술을 향한 욕망, 아내를 향한 욕망, 집과 영토를 지배하려는 욕망, 살육에 대한 욕망, 시간과 망각의 위협을 이겨내려는 욕망, 영원히 빛나는 명성을 얻으려는 욕망을 말이다.
그러나 놀런의 오디세이에는 절제라고는 없다. 매 순간 사건과 빛과 소음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으며, 그 무엇도 인간적인 규모에 머무르지 않는다.
놀런의 스펙터클은 포도주 빛 바다의 거대한 파도가 주인공의 배를 집어삼킬 듯 위협하는 것처럼, 이야기 자체를 압도해버릴 듯하다. 다만 그 바다는 자줏빛이라기보다 회색에 가깝다. 시각적으로 이 오디세이는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 3부작을 비롯한 21세기의 여러 영상 ‘대서사극’을 자주 떠올리게 한다. 죽은 자들의 땅으로 향하는 장면에서는 왕좌의 게임에서 장벽 너머로 떠나던 원정이 생각났다. 영화 마지막에 한 인물이 ‘노을 너머로 항해하기’ 위해 길을 나서는데, 곧 모두가 엘프어로 노래라도 부를 것만 같았다.
이 영화에는 우베르토 파솔리니의 리턴(2024)이 보여준 세련되고 절제된 간결함이 전혀 없다. 그 작품에서 랠프 파인스는 상처투성이에 절박하고 거의 벌거벗은 모습으로 등장하며, 자신의 귀향을 두고 갈등한다. 그를 맞이하는 줄리엣 비노슈 역시 충분히 설득력 있을 만큼 불행해 보인다. 신이나 특수효과를 구현할 예산이 없었던 그 영화는 오디세이와 그 주인공을 근육과 굶주린 심장만 남도록 벗겨냈을 때 과연 무엇이 남는지 생각하게 한다. 반면 놀런은 우리 앞에 모든 것이 포함된 뷔페를 차려놓는다.
인종에 구애받지 않은 놀런의 캐스팅은 예상대로 일부에서 비난받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캐스팅에 진보적인 면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젠데이아, 루피타 뇽오, 히메시 파텔, 코리 안토니오 호킨스, 트래비스 스콧 등 비백인 배우 대부분은 ‘흑인 절친’의 변형에 가까운 역할을 맡았다. 극에서 이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백인 주인공을 돕는 것뿐이다.
이타카의 음유시인 페미오스를 연기한 스콧은 몇 마디를 고함치고 막대기를 두드리지만, 노래하거나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리라를 연주할 기회는 얻지 못한다. 타악기 중심의 사운드트랙에서 가장 선율적인 음은 오디세우스가 활시위를 튕길 때 나온다. 궁수를 음악가로 형상화한 아름다운 청각적 이미지로, 원작에서 가져온 것이다. 헬레네와 클리타임네스트라를 1인 2역으로 연기한 뇽오의 배역은 지나칠 정도로 빈약하다. 그에게 주어진 출연 시간은 불과 몇 분이며, 그 안에서 분노에 찬 유가족 어머니, 학대받는 아내, 참회하는 간통한 여성 등 여성 피해자의 짧은 모습을 잇달아 연기할 뿐이다.
원작 덕분에 이 영화에는 놀런의 다른 작품들보다 여성 인물이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시 속에서 생생하게 그려진 것과 달리, 이들 가운데 제대로 할 말이 있는 인물은 아무도 없다. 호메로스의 칼립소는 신들의 이중잣대에 격분하며 경이로울 만큼 오페라적인 연설을 펼친다. 남신들은 욕망하는 인간 여성을 마음대로 납치하고 강간할 수 있지만, 여신이 똑같은 일을 하려고 하면 제우스와 그 패거리들이 훼방을 놓는다는 것이다.
이는 신화적 ‘사실’을 영리하고 익살스럽게 왜곡한 주장이다. 시의 청중은 칼립소에게서 인간 희생자를 빼앗아가려는 주체가 주로 여성 신인 아테나라는 것을 알고 있다. 칼립소가 불평을 늘어놓는 상대인 헤르메스는 그저 전령일 뿐이다. 게다가 불과 몇 행 앞에서 언급되었듯 새벽의 여신 에오스는 신들의 가부장제에도 불구하고 티토노스를 붙잡아두는 데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다.
샤를리즈 테론의 칼립소는 눈부시게 아름답지만, 화를 내지도, 웃기지도 않으며, 수사에 능하지도 않고, 꾀죄죄한 인간 포로를 향한 욕정에 사로잡히지도 않는다. 그는 무보수 심리치료사에 가깝다. 약물을 이용해 몰골이 말이 아니고 외상후스트레스장애에 시달리는 오디세우스의 영혼을 달래주며, 그의 두서없는 고난담을 너그럽게 들어준다.
마찬가지로 호메로스의 페넬로페는 변장한 오디세우스에게 자신의 꿈을 대단히 생생하게 들려준다. 꿈속에서 마당에 있던 거위들이 독수리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 독수리는 거위들이 페넬로페의 구혼자들이며 귀환한 남편에게 곧 몰살당할 것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꿈속에서 페넬로페는 눈물을 흘렸다. 이는 오디세우스의 귀환과, 마치 남편을 기다리는 신부처럼 지내온 오랜 기다림의 시간이 곧 끝난다는 사실에 대해 그가 매혹적일 만큼 양가적인 감정을 품고 있음을 암시한다.
놀런의 페넬로페에게는 꿈이 없다. 앤 해서웨이의 얼굴은 여전히 풍부한 감정을 표현하며, 아름답고 신비로워 보인다. 여성들의 거처와 중앙 홀을 분리한 영리한 세트 디자인의 장막 너머로 주로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각본이 그에게 허락한 일은 이유도 알 수 없는 채 맷 데이먼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것뿐이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화학작용도 없고 공통점도 없다.
여정을 계속하는 동안 애처가 오디세우스는 아내를 상징하는 작은 인형을 꼭 붙들고 다닌다. 인셉션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손에서 놓지 않던 팽이와 비슷하다. 그런데 실제 아내 역시 그 인형보다 별로 더 흥미로운 인물이 아니다.
영화에서 신들을 묘사하면서 「타이탄족의 멸망」 같은 우스꽝스러움에 빠지지 않기는 쉽지 않다. 그러니 놀런이 신들을 제외한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비중이 턱없이 적은 젠데이아의 아테나마저도 책략과 피에 굶주린 전쟁의 여신이 아니라, 전쟁에 희생된 연약한 피해자, 혹은 오디세우스의 양심이 투영된 존재인 것으로 드러난다.
칼립소, 물개 여인 세이렌, 키르케,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등 다른 여신들도 잠깐씩 등장하지만, 관객이 이들을 여신으로 알아봐야 한다는 암시는 전혀 없다. 무시무시한 폭풍과 난파 장면은 있지만 포세이돈과 헤르메스, 헬리오스는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내가 가장 좋아한 순간 중 하나는 젠데이아가 데이먼에게 신은 인간이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가 아니라고 단언하는 장면이었다. “천둥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나요? 불은요?”
하지만 영화는 양쪽을 모두 취하려 한다. 신들은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난파와 죽음은 포세이돈의 아들을 눈멀게 하고 태양신의 소 떼를 잡아먹은 데 따른 필연적인 결과로 제시된다. 제우스의 법은 지극히 중요한 것으로 묘사되지만, 정작 제우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놀런이 그리는 세계는 진정한 신들을 품기에도, 우리와 다를 수 있는 진짜 사람들을 품기에도 충분히 크지 않다.
영화에는 거인들도 등장한다. 여기서는 홀로 사는 외눈박이 거인으로 나오는 폴리페모스와 지나치게 화려한 옷차림을 한 라이스트뤼고네스족이 그들이다. 서맨사 모턴이 원초적인 활력으로 연기한 키르케는 「헨젤과 그레텔」에 나올 법한 오두막에 사는 바바 야가와 같다. 그는 손이 많이 가는 일종의 성형수술을 통해 오디세우스의 탐욕스러운 부하들을 돼지로 바꾼다. 그들이 원래부터 돼지 같은 자들이었으니 겉모습까지 그에 맞게 바꿔준 셈이다.
연꽃을 먹는 자는 단 한 명만 등장하지만, 예상할 수 있듯 망각이라는 주제는 새로운 의미를 띤다. 유명한 장면들은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스킬라와 카리브디스가 배를 위협하고, 에우리클레이아가 오디세우스의 다리에 난 흉터를 알아보며, 안티노오스는 변장한 주인공에게 발판을 집어 던진다.
서사시의 몇몇 주요 대목은 빠졌다. 영화는 친절한 공주 나우시카가 사는 스케리아섬을 건너뛴다. 원작의 오디세우스는 그곳에서 자신을 환대하는 파이아케스인들에게 모험을 과장해 들려준다. 모든 것을 극대화한 이 영화에는 나우시카의 빨래나 남편을 꿈꾸는 소녀다운 환상처럼 매력적일 만큼 일상적이고 소박한 것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데이먼이 연기한 백발의 오디세우스는 이야기의 달인도, 능숙한 바람둥이도 아니다.
더 중요한 문제도 있다. 우호적이고 부유하며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외국이 등장했다면 영화의 이미 혼란스러운 전제는 한층 더 뒤엉켰을 것이다. 이 할리우드판 미케네 그리스가 세상에 남은 유일한 ‘문명’이며, 제우스의 법에 따라 낯선 이와 거지를 환대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나마 아직 기억하는 유일한 곳이라는 전제 말이다.
의상과 갑옷, 배, 건축물은 여러 시대와 양식이 뒤섞인 잡탕이다. 여러 세대에 걸쳐 전승된 이야기에서 만들어졌고 서로 다른 시대와 방언, 전통의 조각들을 한데 품은 호메로스의 시를 생각하면 이는 오히려 잘 어울린다. 언어적인 면에서도 호메로스의 그리스어는 여러 요소가 뒤섞인 복합체다. 다만 언제나 운율이 있는 시의 언어였으며, 실제 사람들이 사용했던 말은 아니었다.
온라인에서 인위적으로 부풀려진 분노와 달리, 영화가 현대 미국인의 말투에 근접한 언어를 사용하려 한 것 자체에는 본질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각본을 호메로스 시대의 그리스어로 쓰거나 영어 운문으로 쓸 생각이 아니라면, 일상적인 미국 영어와 비슷한 언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대사를 쓰는 일은 놀런의 재능이 아니다. 영화의 언어는 줄곧 상황 설명에만 급급하고, 유머가 없으며, 밋밋하다.
“우리 아빠가 집에 오고 있어”나 “이 빌어먹을 해변에서 나가자”처럼 활기찬 말투를 시도한 대사들은 다음과 같은 거창한 명상조의 대사와 불편하게 나란히 놓인다.
“그렇습니다, 왕비님. 제우스의 법을 어긴 행위가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청동기 시대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이 초래한 폐허를 차마 볼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디에서도요. 특히 자기 고향에서는 더더욱.”
시상식에서 흔히들 말하듯, 놀런이 내가 약강 오보격으로 번역한 오디세이의 첫 구절만큼은 읽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는 겸허해졌다. 그는 적어도 한 인터뷰에서 내가 번역한 시의 첫 구절을 인용했다. “복잡한 남자에 관해 말해다오.”
그러나 내가 이 각본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썼다면 부끄러웠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데이먼의 오디세우스는 복잡하지도, 교활하지도, 기교가 뛰어나지도 않다. 호메로스의 작품에서 가장 재미있고 유명한 오디세우스의 속임수 가운데 하나는 폴리페모스에게 자신의 이름이 ‘아무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눈이 먼 거인이 이웃들에게 도와달라고 비명을 지르자, 다른 퀴클롭스들은 ‘아무도’ 그를 해치고 있지 않다는 말을 듣고 안심한다.
하지만 영화 속 오디세우스는 폴리페모스보다 한 수 앞설 필요가 없다. 이 퀴클롭스는 지능이라고는 없는 꼭두각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놀런의 외눈박이 거인은 끙끙대기만 하며 ‘그것’이라고 불린다. 말도 거의 하지 않고, 술에 취하지도 않으며, 이웃도 없고 특별히 아끼는 양도 없다.
오펜하이머의 감독이 만든 영화라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놀라운 일이지만, 데이먼이 연기한 둔중한 오디세우스는 기술적 지략, 즉 ‘폴리메카니아’마저 부족해 보인다. 그는 집 안에서 자라는 나무를 이용해 부부의 침대를 만들지도 않는다. 어차피 잠을 자거나 섹스를 하는 일이 거의 없어 보이니, 그런 수고를 들이는 것 자체가 낭비이긴 할 것이다. 칼립소에게서 탈출할 때 타는 뗏목도 떠내려온 나뭇조각 몇 개를 대충 엮어 만든 것에 불과하다. 호메로스의 작품에 나오는 정교한 벌목과 배 제작 과정과는 대조적이다. 트로이 목마를 설계하고 만드는 장면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바퀴조차 달리지 않은, 조악하고 촌스러운 목마가 마치 드론으로 투하된 것처럼 바람 부는 해변에 불쑥 나타난다. 여러 험난한 촬영지를 돌아다니며 아이맥스 카메라를 끌고 다녀야 했던 감독에게는, 크고 다루기 힘든 물건을 험지로 운반하는 어려움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놀란이 원작에 가한 가장 두드러진 변주는 아이네이스의 일화를 바탕으로 한 곁가지 서사다. 이 이야기는 ‘잔혹한 율리시스’가 고안한 트로이 목마를 트로이인들이 성안으로 들이게 된 과정을 다룬다. 그 계략이 성공한 것은 그리스의 이중간첩 시논의 공작 덕분이다. 그의 이름은 ‘해로운 자’라는 뜻이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가 교활한 지략을 비교적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것과 달리, 베르길리우스는 율리시스를 잔인하고 약탈적인 인물로 그린다. 시논은 그의 기만적인 공범이다.
놀란의 영화에서 시논은 엘리엇 페이지가 연기하며, 악당은커녕 영화의 도덕적 중심으로 등장한다. 용감하고 패기 넘치는 소년이었던 그는 병역을 기피하려는 10대 안티노오스의 사악한 술수 때문에 트로이 전쟁에 징집된다. 성인이 된 안티노오스는 능글맞고 매력적인 로버트 패틴슨이 연기한다. 영화의 핵심적인 감정선은 자신이 트로이 목마 계획의 진실을 시논에게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희생에 공모한 셈이라는 사실을 오디세우스가 뒤늦게 깨닫는 과정이다. 기억을 되찾은 오디세우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러나 영화는 자신이 새롭게 만들어낸 이야기에서 비롯되는 도덕적 딜레마는 다루지 않는다. 가령 용감한 로빈이 어차피 즉시 죽을 운명이었다면, 배트맨이 그에게 모든 진실을 말했는지가 대체 왜 그토록 중요한가? 또 영화가 트로이 약탈을 그토록 끔찍한 사건으로 묘사하고 싶어 한다면, 아무 죄도 없는 시논은 왜 그 계획에 참여하려 하는가? 오디세우스가 시논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해서 트로이 전쟁이 시작된 것도 아니다. 게다가 트로이인들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에서 그랬듯, 시논의 존재와 무관하게 목마를 성안으로 들였을 것이다. 이 혼란스러운 곁가지 이야기는 놀란이 현대 영어권 세계에 관해 끈질기게 교훈을 설파하기 위해 영화에 억지로 끼워 넣은 것이다. 테러와의 전쟁과 브렉시트를 둘러싼 거짓말과 외국인 혐오가 문화적 쇠퇴를 촉발했고, 그 쇠퇴가 지금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치들을 파괴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놀란이 호메로스의 서사에 더한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바다 민족’이 ‘우리 문명’을 위협한다는 말을 반복적으로 등장시킨 것이다. 바다 민족이란 기원전 1200년 무렵 이집트를 침략했고, 거의 같은 시기에 일어난 미케네 그리스 문화의 붕괴에도 책임이 있다고 여겨졌던 해양 부족에 관한 19세기의 학설이다. 이제는 폐기된 이론이다. “우리 문명이 공격받고 있어요.” 페넬로페가 절규한다. 오디세우스는 문자 문화를 비롯한 ‘청동기 문명’이 잿더미 속에서 다시 일어설 것이라며 그녀를 위로한다.
놀란도 분명 알고 있듯, 현재 학계에서는 ‘바다 민족’이라는 단일한 집단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기원전 11세기 그리스어권 세계가 중앙집권적이고 문자 사용이 활발했던 미케네의 궁전 문화에서 벗어나, 초기 그리스 철기시대의 분절된 사회구조로 이동한 데에는 기후변화, 지진, 내부 소요를 비롯한 다양한 요인이 작용했다. 놀란은 서로 경쟁하는 이 역사 이론들을 이용해 ‘바다 민족’의 정체를 둘러싼 특유의 반전을 만들어낸다. 스포일러가 될 테니 밝히지는 않겠지만, 아마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제우스의 법은 고대 그리스의 ‘크세니아’를 변형한 것이다. 크세니아란 서로 낯선 사람과 주인과 손님이 상호 존중으로 대함으로써 혈연관계가 없는 가문들 사이에 여러 세대에 걸친 유대를 형성한다는 이상적인 관계를 뜻한다. 영화에서는 이러한 크세니아가 자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현대 미국적 관념을 거쳐 제시된다. 부유한 사람들은 주변의 가난하고 배고픈 이들에게 관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가난을 실제로 완화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할 필요까지는 없다.
이 영화가 암묵적으로 내세우는 가치관 중 상당수는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지닌 가치관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기만, 전쟁 도발, 혼외정사, 동물 학대, 여성 착취, 명예에 대한 갈망은 모두 호메로스의 세계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이 작품에서는 매우 나쁜 것으로 취급된다. 그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영화가 제시하는 가치와 비전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등장인물들의 동기가 작품 자체의 논리로도 납득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놀란의 오디세이에서는 속임수와 기술, 무기를 이용해 사람을 학살하는 행위가 그리스군이 크세니아를 어긴 트로이인들을 죽일 때는 나쁜 것으로 묘사되지만, 오디세우스가 크세니아를 어긴 구혼자들을 죽일 때는 좋은 일이 된다. 오디세우스와 동료들이 버린 것처럼 보이는 물건을 차지하는 행위도 트로이인들이 목마를 가져갈 때는 자연스럽고 용서할 수 있는 일인 반면, 구혼자들이 오디세우스의 궁전과 음식, 포도주, 아내를 차지하려 할 때는 부자연스럽고 용서할 수 없는 일이 된다.
이타카에 찾아온 낯선 사람은 변장한 신일 수 있으므로 친절하고 정중하게 대해야 하지만, 외국 땅에서 만나는 낯선 존재들은 대개 괴물이며 눈을 멀게 하고 약탈하고 죽여도 된다. 오디세우스가 포세이돈의 아들 폴리페모스의 눈을 멀게 하며 신들에게 저항하는 것은 고귀하고 용감한 행동이지만, 에우리로코스가 태양신의 소를 잡아먹는 것은 어리석고 탐욕스러운 행동이다. 오디세우스가 시논을 속이거나 구혼자들이 텔레마코스를 속이는 것은 나쁘지만, 텔레마코스와 오디세우스가 구혼자들을 속이는 것은 좋은 일이다.
나눔은 미덕이어서 오디세우스가 부하들과 나란히 앉아 노를 젓는 모습도 나온다. 하지만 한 사람의 통치 역시 명백히 좋은 것으로 묘사된다. 군주제나 독재에 도전하거나 자신에게 할당된 몫보다 더 많이 먹으려는 사람은 사악하거나, 구혼자들이 그렇듯, 어리석다. 에우리로코스가 그렇다. 어느 쪽이든 죽어야 한다. 아가멤논처럼 부를 쌓기 위해 싸우고 죽이는 것은 나쁘지만, 이미 획득한 부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죽이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 부를 전쟁으로 얻었다 해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도덕적 모순은 하나하나가 영화에서 흥미롭고 생산적인 주제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놀란은 불완전한 거대 담론의 파편들이 장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빙빙 돌게 내버려둔다.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단단하고 구체적인 인간 경험의 널빤지는 어디에도 없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는 에우리로코스와 노예 신분의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를 비롯한 오디세우스의 여러 동료와 부하들이 품은 감정과 각자의 과거, 관점을 명료하고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어린 시절 납치되어 인신매매를 당하고 노예로 팔린 에우마이오스는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자신의 노예주 오디세우스가 언젠가 돌아와 자신에게도 집을 마련해 주기를 꿈꾼다.
영화에서는 이 부하들 가운데 어느 누구에게도 고유한 개성이 없다. 텔레마코스(톰 홀랜드)를 돕는 멘토르(라이언 허스트)는 변장한 여신이 아니라 그저 친절한 수염 난 남자다. 에우리로코스 역시 오디세우스에게 원한을 품은 경쟁자가 아니라 또 다른 친절한 수염 난 남자일 뿐이다. 존 레귀자모는 에우마이오스 역을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애쓴다. 영화 속 에우마이오스는 적절한 순간이 오기 전까지 오디세우스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백내장이라는 저주까지 받았다. 하지만 놀란의 각본은 배우가 활용할 만한 것을 전혀 주지 않는다. 이 ‘하인’—영화가 ‘노예’ 대신 선호하는 표현이다—의 유일한 소망은 오디세우스의 삶을 더욱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런데도 데이먼의 오디세우스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카메라를 향해 묵묵히 걸어오면서 여전히 비참한 표정을 짓는다.
트로이 전쟁은 하나의 일탈이며, 얼굴조차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괴물 같은 아가멤논, 이상한 다스 베이더 복장을 한 바로 그 인물의 잘못이다. 그는 자기 딸을 죽임으로써 미국적인 가장의 역할에 실패했다. 반면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백성을 결코 고의로 위험에 빠뜨리지 않을 이상적인 지도자다. 어리석은 부하들이 키르케의 오두막을 직접 확인하겠다고 고집하고, 그는 친절하게도 그들을 구해온다. 그 과정에서 여신과 한 시간은커녕 마법 같은 한 해 동안 섹스를 하려고 머무는 일도 없다. 데이먼의 오디세우스는 주로 불안과 죄책감에 이끌리지만, 자기 아들을 지키려는 마음 또한 강하다. 홀랜드는 스무 살이면서도 열두 살처럼 보이는 어수룩한 청년을 훌륭하게 연기한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를 마지못해 전쟁을 수행하는 군벌로 묘사하면서 영화가 상상해낸 세계는 앞뒤가 맞지 않게 된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전쟁이나 살인이 나쁘다는 사실이 아니라, 착한 남자들도 때로는 그런 일을 하고 괴로워한다는 사실뿐이다. 둘은 전혀 다른 주장이다. 고대든 현대든 폭력을 진지하게 묘사하려면 가해자의 관점뿐 아니라 피해자의 관점도 보여줘야 한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그 기준을 가뿐히 충족하지만 놀란은 그렇지 못하다.
트로이인들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인간성을 박탈당한다. 우리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이름도 얼굴도 알지 못한다. 오디세우스와 텔레마코스의 손에 피가 묻는 것은 가장 정의로운 명분을 내세운, 컴퓨터게임 같은 방식으로 사람을 죽일 때뿐이다. 희생자가 트로이인이든 거인이든 구혼자든 노예든, 우리는 그들의 죽음에서 연민이나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 자신이 계획했다고 알려진 트로이 약탈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오디세우스는 마치 살육을 난생처음 목격한 사람처럼 당혹감과 공포에 휩싸여 주변을 바라본다.
그러면서도 영화는 페넬로페의 가장 유력한 구혼자 안티노오스—그 이름은 ‘상반된 마음’을 뜻한다—가 겁쟁이에 거짓말쟁이이며 음모꾼이라는 이유로 그를 경멸하라고 요구한다. 영화는 전쟁에 경악하라고 요구하는 동시에, 마지못해 싸우던 전사가 마침내 활을 손에 쥐고 피를 쏟아내기 시작하는 액션 장면에는 환호하라고 한다.
구혼자 학살 장면은 아마 영화에서 가장 즐거운 대목일 것이다. 신이 나서 악당을 연기하는 안티노오스—촬영장에서 즐거워 보이는 사람은 패틴슨뿐이다—는 시논의 단검에 찔려 죽어 마땅해 보인다. 하지만 제우스의 황금비처럼 이 영화에 쏟아져 내릴 오스카상 가운데 하나도 그에게 돌아가야 한다.
놀란의 오디세이에는 원작을 위대한 작품으로 만드는 수많은 요소가 빠져 있다. 이 영화는 시간과 기억, 역사, 전쟁에 관해, 그리고 한 전사의 영광스러운 귀환과 그의 가족, 적, 전우, 친구, 이웃의 삶이 맺는 관계에 관해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전혀 들려주지 못한다. 심리적·감정적·정치적·윤리적 깊이가 부족하고, 서사 구조는 잔꾀에 의존한다. 각본은 형편없다. 등장인물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의 행동이나 말에 설득력 있는 동기를 지니지 않는다. 섹스 장면은 하나도 없고 음식은 전부 끔찍하게 보인다.
놀란의 오디세이가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윤리적 문제는 영화의 일부를 점령지인 서사하라에서 촬영해, 그곳의 토착민인 사하라위인들을 향한 현재진행형의 폭력을 정상적인 일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다. 더구나 놀란은 영토 전쟁을 일으킨 영웅을 서사의 중심에 놓고, 그를 과장되게 추켜세운 뒤 자신의 죄를 뒤늦게, 그것도 부분적으로 인정했다는 이유만으로 구원하는 영화를 위해 이 땅을 그저 시각적으로 인상적인 배경으로 사용했다. 이는 특히 불쾌한 일이다.
이 모든 문제에도 불구하고 오디세이의 개봉은 여전히 축하할 만한 사건이다. 흔히 스트리밍 시대라고 불리는 지금, 이 대작은 관객들을 다시 극장으로 불러들이고 있다. 문해력이 쇠퇴하고 ‘인문학이 죽어가는 시대’라고들 하지만, 내가 번역한 판본을 비롯한 오디세이 번역서들은 서점에서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다.
책을 사거나 톰 홀랜드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은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이후 고대 그리스어를 공부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영화가 몇몇 대학 행정가를 설득해 문학과 언어, 역사 관련 학과를 없애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놀란은—그곳 학생들은 지금도 1학년 ‘기초 텍스트’로 오디세이를 배운다—대중이 다시 책을 읽도록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 점만큼은 나도 고맙게 생각한다.
글 출처 ㄷㅁㅌㄹ
놀란이 오디세이 촬영하면서 가장 영감받았다던 그 번역가가 이번에 오디세이 영화 평을 올렸는데 완전 혹평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