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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블록버스터의 새로운 지평, 기상천외한 활력의 《호프》

무명의 더쿠 | 13:58 | 조회 수 530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나홍진 감독 10년 만의 복귀작…지금껏 보지 못했던 영화적 상상력

 

 

개봉 전 화제성과 기대 측면에서 올해 단연 압도적인 한국 영화 《호프》가 드디어 극장가에 상륙한다. 《곡성》 이후 나홍진 감독 10년 만의 복귀작이자 올해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상영작으로 세계 무대에서 먼저 베일을 벗은 작품이다. 연출작마다 배경과 무대가 조금씩 달라지지만 《추격자》(2008)로부터 이어지는 나홍진 감독 영화의 뿌리는 언제나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지독한 대결과 충돌이다. 다만 방법론에서 차이가 있다. 직전작 《곡성》의 경우 관객의 믿음을 시험하는 거대한 현혹이었던 데 반해 《호프》는 명쾌한 일직선의 질주를 표방한다. 최고의 엔터테이닝 무비, 한국 블록버스터의 지형을 넓히는 새로운 이정표로서의 야심을 숨기지는 않는 기상천외한 영화가 우리 앞에 당도했다.

 

 

비무장지대 인근 지역 호포항. 길 한복판에서 엉망으로 훼손된 소의 사체가 발견된다. 제보를 받고 출동한 경찰서장 범석(황정민)에게 그의 6촌이자 사냥꾼인 성기(조인성) 일행은 먹이를 찾아 산에서 내려온 호랑이의 짓일 거라는 가능성을 들려준다. 비슷한 시각 수상함을 감지한 주민들의 신고가 이어지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존재는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중이다. 범석이 마을을 둘러보는 사이에 성기 일행은 숲속을 탐색하는 투 트랙 작전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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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초반 분량은 폐허가 된 마을 여기저기를 다니는 범석의 시선이 중심에 놓인다. 종잇장처럼 구겨진 자동차들, 무언가 거대한 것이 뚫고 지나간 듯 부서진 건물의 잔해들, 멀리서 들려오는 포효만이 아직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괴생명체의 존재를 짐작하게 한다. 통신은 애초에 두절됐고 인근 산불 진압에 모든 인력이 투입되는 바람에 지원 병력을 기다릴 수도 없는 고립된 지역. 처참한 사체를 볼 때마다 범석이 일일이 이름을 부르며 안타까워할  정도로 작은 마을 공동체. '예비군이 8명'인 이곳에서는 노인들도 직접 총을 들고 나서야 한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던 '실체 없음의 공포'는 여기까지다. 범석이 괴물의 흔적을 쫓으며 러닝타임 40분쯤이 흘렀을 무렵, 드디어 《호프》가 감추고 있던 압도적 실체가 드러난다. '진격의 거인'을 연상케 하는 엄청난 크기의 생명체와 범석 사이의 추격전이 발휘하는 속도감과 위용은 지금껏 그 어떤 한국 영화도 구현하지 못한 박력을 두르고 있다. 그중 절체절명의 위기에 범석의 후배 순경 성애(정호연)가 나타나 유탄발사기를 쏘는 순간은 오래 회자될 근사한 장면 중 하나다.

 

 

이후 얼마간은 정신이 쏙 빠지는 질주의 연속이다. 범석이 타고 성애가 운전하는 경찰차가 거칠게 달리며 쉴 새 없이 드리프트와 유턴을 반복하는 사이, 외계 생명체임이 분명하게 밝혀지는 거대 괴물의 추격이 무시무시하게 이어진다. 이때 차가 움직이는 방향에 맞춰 빠르게 패닝하며 상황을 담아내는 촬영의 박진감이 압권이다. 적재적소에 활용되는 슬로모션들 중 외계 생명체와 눈을 맞춘 범석이 그와 잠시 교감하는 듯한 감정적 쇼트는 초반 분량에서 손에 꼽히게 생경하고도 인상적인 순간을 만들어낸다.

 

 

한적한 마을에서 헐렁하게 살아왔음이 분명해 보이는 인물들은 블록버스터의 전형적인 영웅들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그저 당장의 생존에 급급하면서도 습격에 분노한다. 캐릭터를 파악할 수 있는 배경 정보는 풍부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몇 안 되는 마을의 생존 노인들이 개조한 장갑차를 타고 기관총으로 무장한 채 질주하거나 성애가 경찰차에 무기를 가득 채우고 나타날 때마다 범석은 "이게 다 어디에서 나온 거냐"고 묻지만 《호프》에서 그건 중요한 질문이 아닌 듯하다.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영화는 성애의 대사로 간단히 갈음한 채 거대한 추격전이라는 설정 하나만을 무시무시한 에너지로 밀어붙인다. 이때 인물들의 무기는 자기 자신과 마을 공동체를 지키려는 용도지만, 다급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이 의도치 않게 서로를 해치는 지뢰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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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한 해석에서 벗어나 더 먼 곳 바라보게 해

 

 

 

시공간마저 모호한 《호프》에서는 인간과 외계 생명체들의 대결 그 자체를 제외한 모든 것이 필요 이상으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심지어 마이클 패스벤더, 알리시아 비칸데르, 테일러 러셀 같은 할리우드 스타들이 그들의 원래 모습이 연상되지 않을 정도의 CG 캐릭터인 외계인을 연기했다는 사실도 크게 의식되지 않을 정도다.

 

 

시대 배경의 경우 휴대전화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봐서 1990년대 이전임을 어렴풋하게 추측하게 된다. 한편 마을에는 주민들에게 각성을 요구하는 현수막이 여기저기 걸려 있는데 '멸공' '불법 무기류 신고 기간' 등의 글자들이 이곳을 지배하고 있는 이념을 은근하게 드러낸다. 반공 이데올로기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공포가 지배적이던 공간에 괴생명체의 등장은 분명하고도 파괴적인 '실체'다. 다른 이념을 견지한 타 공동체나 인종의 은유로 해석될 여지는 있지만, 이를 넘어선 정치적이거나 철학적인 주제 의식은 또렷하게 감지되지 않는다. 영화가 하나의 분명한 의미 혹은 과도한 해석에 갇히기를 의식적으로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객이 추격전의 긴장에서 잠시 벗어나 영화가 안내하는 샛길로 빠지는 것을 허락하는 과정은 편집 리듬의 오류라기보다 정교한 의도로 읽힌다. 포획된 외계인 사체를 해부하려고 용을 쓰는 감시반 장면, 며칠 전 다수의 외계인을 목격했다고 진술하는 마을 노인 해술(임현식)의 장광설 같은 유머의 순간이 대표적이다. 인물들의 대화는 전부 걷어내더라도 사실상 큰 무리가 없으며 설령 일부를 놓치더라도 서사의 공백이 되지 않는다. 그러면서 영화는 상대의 정체를 파악하지 않은 채 대화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공격을 시작한 쪽은 외계인이 아니라 인간일 수 있다는 점 정도만을 슬그머니 남겨둔다. 범상치 않은 동네 청년(음문석)의 등장 이후 이 가설에는 불이 지펴진다.

 

 

범석의 첫 등장으로 발현하는 서부극의 분위기부터 액션 스릴러, 이후 스페이스 오페라까지 넘나드는 《호프》는 《터미네이터》(1984~)와 《에일리언》 시리즈(1987~), 《쥬라기 공원》 시리즈(1993~)와 《우주 전쟁》(2005) 등을 비롯한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들 등 모든 상징적 블록버스터들에서 비롯한 상상력과 박진감의 중심부를 야심 차게 가로지른다. 성기 일행이 숲속에 불시착한 듯한 외계인들의 함선을 발견한 이후 모든 인물이 합세한 회심의 도로 추격전까지 이어지는 후반 시퀀스는 초반부의 박력을 다시금 발휘하는 영화의 하이라이트다.

 

 

이후 외계인들의 대화를 통해 아직 의미를 온전히 알 수 없는 설명적 정보가 쏟아지는 마지막 10분가량의 분량은 《호프》가 '시골 마을 블록버스터'에 머물지 않고 이후 세계관 확장을 염두에 둔 작품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고개가 갸웃해지는 마무리지만 영화가 쥐고 내달리던 바통이 더 큰 차원의 세계로 넘어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다. 나홍진 감독의 시선은 《곡성》의 초자연적인 무언가를 넘어선 우주의 거대한 질서로 향하고 있다. 지금껏 보지 못했던 한국 영화의 새로운 지평이라는 희망과 믿음. 《호프》의 실체다.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586/0000133571?sid=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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