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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 어휘 하나를 근거로, 집단 사고체계를 내면화하고 있다 단정한다면 논리적 비약이다

무명의 더쿠 | 14:33 | 조회 수 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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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못미". 21세기 초반 널리 쓰인 말이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의 준말인 이 표현은 미선이 효순이 사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세월호 침몰 사고 등 대중이 갑작스러운 죽음을 애도할 때마다 등장했다. 지금은 거의 소멸했지만, 한때는 쓰이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런데 이 말의 기원이 그룹 H.O.T의 팬픽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에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팬픽이 멤버들의 실명을 그대로 사용하는 알페스(RPS, Real Person Slash)의 일종이라는 사실은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당시 '지못미'를 사용한 모든 사람을 H.O.T를 대상으로 한 RPS의 향유자로, 나아가 RPS 애호가 집단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 그런 주장은 성립하기 어렵다. 언중 다수가 유행어를 채택할 때, 그 기원에 대한 지식이나 동의는 전제 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도 제법 쓰이는 "흑역사" 역시 비슷한 경우다. 누군가 지우고 싶어하는, 없었던 일로 하고 싶은 과거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이 단어는 일본 애니메이션 '턴에이 건담'에서 비롯됐다. 작품 안에서 흑역사는 인류가 전쟁을 반복하며 스스로 문명을 붕괴시킨 고대의 암흑기를 뜻한다. 이 사실을 근거로 "흑역사"를 쓰는 사람을 건담 팬, 혹은 일본 하위문화 애호가로 단정할 수 있는가. 앞선 사례와 마찬가지로, 그 근거는 충분하지 않다. 언어 사용의 실제는 기원에 대한 인지 여부와 무관하게 작동한다. 


 그렇다면 이제 두 단어의 기원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향후 이 말들의 사용을 제약해야 할 근거가 되는가. 과거에 '지못미'를 쓴 이력을 특정 연예인에 대한 성적 대상화 가담의 증거로 소급 해석해야 하는가. "흑역사"의 사용이 일본 대중문화의 국내 위상을 강화하고 문화적 종속을 심화시켰다고 자책할 근거가 되는가. 

이 두 추론은 같은 오류를 범한다. 표현의 현재적 의미를 그 표현의 기원으로 소급해 규정하는 오류, 즉 발생적 오류(genetic fallacy)다. 화자가 발화 시점에 담아낸 의미와, 그 표현이 최초로 발생한 맥락에서 가졌던 의미는 전혀 다른 층위에 있다. 


 이는 일종의 문화적 전유(cultural appropriation)다. 더 나아가 의미론적 재전유(semantic re-appropriation)라고 말할 수도 있다. "지못미"와 "흑역사"는 모두 특정 하위문화 집단 내에서 발생해 이후 일반 언중에게로 확산된 사례다. 기표[signifiant]는 그대로 유지됐지만 기의[signifié]는 재구성됐다. 기표와 기의의 결합은 자의적이며, 그 결합은 언중의 관습적 합의에 의해서만 유지된다. 따라서 언중의 사용 관습이 바뀌면 기의 역시 이동한다. 확산과 관습화 과정에서 원래의 맥락적 의미는 탈색된다. 앞선 두 단어의 경우, 원래의 의미는 실질적으로 소멸에 가까운 상태다. 


 특정 표현을 만들어낸 집단의 사고방식이나 문화적 태도에 강한 거부감을 가질 수 있다. 나 역시 그렇다. 

그러나 개별 어휘나 표현 하나를 근거로, 그것을 사용하는 화자가 해당 표현이 발생한 집단의 사고 체계를 내면화하고 있다고 단정한다면, 그건 심한 논리적 비약이다. 

더욱이 그 표현이 이미 하위문화의 경계를 넘어 광범위한 언중에게 전유된 상태라면, 이 비약은 논리의 양자 도약이라 봐야할 것이다. (물론 현재의 이 상태 자체를 개탄스럽게 생각할 수는 있다.)

즉, 해당 표현을, 해당 표현이 발생한 집단의 사고 체계의 맥락과 무관하게 사용한 경우를 관측한다면, 이를 그 사고방식에 대한 동의나 내면화의 증거로 삼아선 안 된다. 오히려 해당 표현의 하위문화적 재전유가 이미 완료됐다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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