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첫 영문 완역…네덜란드 한국학자들 60년 집념 결실(종합)
한국인의 역사적·문화적 정체성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삼국유사'를 깊이 있는 주석과 함께 영문으로 완역한 기념비적인 책이 처음으로 세상에 나왔다.
7일 유럽 한국학계에 따르면, 최근 미국 하와이대학교 출판부는 고려 시대 승려 일연이 편찬한 '삼국유사'를 방대한 주석과 함께 처음으로 영문으로 통째로 옮긴 'Vestiges of the Three Kingdoms of Ancient Korea'(고대 한국 삼국의 흔적)를 출간했다.
그동안 삼국유사를 해외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책으로는 연세대학교 출판부에서 하태흥 씨 등의 번역으로 1972년 내놓은 영문판 등이 존재했지만, 상세한 주석과 함께 삼국유사의 전체를 망라한 영문 완역본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옛 한국인들의 생활상과 풍습, 정신 세계와 역사를 엿볼 수 있는 다채로운 이야기를 담은 핵심 고전의 영문 주석본 출간으로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해외 독자들의 이해가 깊어지고, 한국학 연구에도 새 지평이 열릴 것으로 기대된다.
해외 한국학 전문가들의 감수를 거쳐 출간된 이 책은 3대에 걸친 스승과 제자 사이인 네덜란드 레이던 대학 소속 한국학자 3명의 60여년에 걸친 집념의 결실로 평가된다. 네덜란드 대학 중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레이던 대학교는 서유럽에서 처음으로 한국학과가 설치돼 유럽 한국학 연구의 산파 역할을 한 곳이다.
이 대학 한국학과 설립의 주역이자 유럽 한국학의 선구자인 프리츠 포스(1918~2000)가 필생을 쏟아부은 초벌 번역을 그의 제자인 바우데베인 발라번(79) 명예 교수, 발라번 교수의 제자인 렘코 브뢰커(54) 현 교수가 꼼꼼한 원문 확인과 기존에 나온 국내외 한글과 영문 번역본, 각종 논문 등 방대한 자료를 확인하고 연구해 붙인 각주 작업 끝에 완성했다.
작고한 포스 교수와 유럽한국학회 회장을 역임한 발라번 명예 교수, 한국 중세사 연구에 천착한 브뢰커 교수 3명 모두 유럽 한국학에서 큰 성취를 이룬 학자로 꼽힌다.
1954년과 1955년 삼국유사에 관한 논문을 독일 동아시아 학회지에 발표하면서 삼국유사와 첫 인연을 맺은 것으로 추정되는 포스 교수는 1960년 한국에서 안식년을 보낼 당시 연구와 자료 수집에 박차를 가하면서 '삼국유사' 영문 완역과 각주 작업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게 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지금과 같이 디지털이 발달하지 않은 터라 자료 접근과 연구에 한계가 있었고, 포스 교수는 결국 완역과 각주를 다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한 채 군데군데 빠진 초벌 번역만을 남기고 세상을 떴다.
그는 2000년 별세 전 수제자였던 발라번 교수에게 자신이 못 이룬 삼국유사 완역과 각주 작업을 해달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한다.
하지만 발라번 교수가 여러 가지 제약상 스승의 유언을 선뜻 실행에 옮기지 못하던 차에 2010년 고려시대 전문가이자 발라번 교수의 애제자인 브뢰커 교수가 '천군만마'로 합류하면서 3대에 걸친 레이던대학의 사제지간 한국학자들의 '삼국유사' 완역 프로젝트에 속도가 붙었다.
6일(현지시간) 레이던 대학교에서 만난 브뢰커 교수는 "포스 교수님이 90% 가량 번역을 해놓았기에 처음에는 3년 정도면 완역과 각주까지 끝낼 수 있을 줄 알았지만 오산이었다"면서 "초벌 번역 이후 시간이 많이 흘렀기 때문에 그간 삼국유사 연구를 반영해 고칠 건 고치고, 각주를 다는 작업이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발라번 교수와 브뢰커 교수 둘 다 각자 학교에서 맡은 일과 연구를 하면서 틈틈이 삼국유사에도 매달려야 했기에 완역본 완성과 출간까지는 본격적인 작업 개시 후 16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포스 교수의 평생의 꿈이 장장 60여년 만에야 자신이 씨를 뿌린 라이덴 대학 한국학과 제자들의 손으로 완성된 셈이다.
브뢰커 교수는 "한국학의 길을 열어준 은사가 시작한 번역을 완결짓게 돼 개인적으로도 뜻깊다"면서 "(출간 전)마지막 6년 동안은 매주 수요일 스승인 발라번 교수와 3~4시간씩 전화 통화를 하면서 치열하게 토론하고, 생각을 다듬는 시간이 있었고, 그 덕분에 불가능해 보였던 일이 가능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브뢰커 교수는 "'삼국유사'는 한국인들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한 중요한 고전으로, 한국인들에게 이 책은 서양의 성경과 견줄 만하다"면서 "게다가 삼국유사는 그 자체로도 풍부한 이야기가 담긴 매력적인 작품이기도 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한국 문화가 요즘 세계적으로 각광받고 있지만 세계인 상당수는 한국이 중국이나 일본처럼 오랜 세월 이어온 고유한 문화와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면서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한국이 풍부하고 다양한 과거를 지니고 있으며, 수천 년에 걸쳐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를 일구고 지켜왔다는 것을 알게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브뢰커 교수는 아울러 "해외의 한국학 연구자들이 그동안 삼국유사를 학문적으로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완역본이 없다는 점을 아쉬워했는데, 이 책으로 그런 갈증이 조금이나마 해소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한편, 주석과 연표까지 570쪽에 달하는 삼국유사 영문 완역본은 한국 고전 역사서를 소개하는 하와이대학교 출판부의 'Korean Classics Library: Historical Materials' 시리즈 중 한권으로 출간됐다.
서문에는 영국 런던 동양·아프리카대학(SOAS) 한국학 교수인 그레이스 고 교수가 브뢰커 교수와 함께 참여해 비평적 이해를 도왔다.
북미 한국학 '거두'이자 한국 불교 전문가인 로버트 버스웰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석좌교수 등이 감수자로 참여했고,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출간을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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