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세기 유럽, 기사들은 심각한 마상창시합 중독을 호소하고 있었다.

“400년쯤 하다 보니 이젠 도파민이 안 나와…”

“한번 할 때마다 사상자가 수십씩 나오는데 도파민이 안 나온다고?
프랑스에서는 무려 현직 국왕이 이거 하다가 죽기까지 했다고(앙리 2세).”

“말은 그렇게 하지만 너도 표정이 침착하잖아…”

“뭐, 죽음도 부상도 기사한테는 너무 익숙하고 당연한 것이니…
단순히 치고박고 싸우는걸로는 부족해. 뭔가, 뭔가가 더 필요하다”
이런 기사들의 니-즈에 부응해
나라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돈키호테라고 할 수 있는
기사도에 미친 나라, 부르고뉴 공국이 새로운 컨텐츠를 들고 온다.

(마상창시합에 미친 남자, 앙주의 르네)
“마상창시합의 근본은 명예!
가장 명예로운 기사는 기사도 소설 속의 기사들!
기사 소설의 이미지를 재현한 연출을 가미해 시합을 큰 이벤트로 만들면
참가자들은 로망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소설 속 기사들처럼 명예로워진 채 도파민을 질질 흘리겠지!”
그렇게 ‘파Pas’ 또는 ‘파 다르메Pasd’armes’라 불리는 ‘관문 시합’이 등장했다.

컨셉은 간단하다. 테난과 베난으로 나뉘어서
테난이 어느 길목을 막고는 ‘히히 못가’를 하면
베난이 결투를 통해 그걸 뚫어내야 하는 것.
이 틀을 기반으로 수많은 관문 시합이 파생되었다.
-샤를마뉴의 나무

1443년 부르고뉴의 공작 선량공 필리프의 이름으로 치뤄진 시합.
샤르니의 영주 피에르 드 부프레몽과 12명의 동료들이
디종으로 가는 길목을 막고 40일간 시합을 개최했다.
유럽 전역에 이 소식이 퍼져 카스티야에서까지 도전자가 찾아왔으며,
도전자가 나무에 걸린 문장을 건드리면 결투가 시작되었다.
-페롱의 요정 관문 시합 (페롱=도전의 표식)

1463년 부르쥬에서 열렸다.
이 시합의 컨셉은 나그네가 하룻밤 잠자리를 구하기 위해 나팔을 불면
요정들에게 붙잡혀 마상 시합장으로 가게 된다는 것이었다.
-양치기 소녀의 관문 시합

(양치기 소녀로 분장한 잔 드 라발)
앙주 공작 르네가 참가한 시합으로,
르네의 연인 잔 드 라발이 양치기 소녀 코스프레를 하고 등장했다.
기사들은 양치기 의상을 입고
한쪽은 사랑에 만족한 자에게 도전하는 검은 방패를,
다른 쪽은 바람둥이에게 도전하는 흰 방패를 들고 결투를 벌였다.
-황금 나무의 관문 시합

1468년 용담공 샤를과 마거릿의 결혼을 기념해 치뤄진 시합.
금박을 입힌 전나무가 광장에 설치되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부르고뉴 최전성기에 열린 공작 본인의 시합이다 보니 컨셉이 참 장황한데,
우선 난쟁이에게 잡힌 거인을 구해달라는 공주의 편지가 공작에게 전달되고,
난쟁이들과 거인(진짜 왜소증과 거인증 환자였을 것)을 황금양털 기사단 문장관보가 선도해서 페롱이 걸린 황금 나무 앞으로 데리고 온다.
(참고로 이 황금양털 기사단도 이아손의 아르고 호에서 따온 이름이다.
부르고뉴는 컨셉에 진심이다…)
노인으로 변장한 도전자가 문을 두드리며 시합을 요청하면
난쟁이가 30분짜리 모래시계를 뒤집으며 나팔을 불고,
그러면 비로소 시합이 시작… 복잡하다 복잡해
이런 장황한 의식을 10일동안 선보인 뒤에
마지막 날에는 관중석과 격벽을 모두 제거하고는
모든 참가자가 날을 무디게 한 무기를 들고 롸끈한 집단전으로 끝을 장식했다.
놀 줄 아는 부르고뉴인들…

컨셉에 진심인 부르고뉴인들의 광기는
무려 공작 본인이 직접 집필한 마상창시합 연구서인
<앙주의 르네의 지도서>에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출처: 중세 유럽 마상창시합의 세계(AK 커뮤니케이션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