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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문법 바꾼 혁명가 "예술엔 연결고리가 있다" 프랜시스 모리스 테이트 명예관장 인터뷰

무명의 더쿠 | 12:49 | 조회 수 317
프랜시스 모리스 테이트 명예관장이 지난 12일 서울 이화여대 캠퍼스에서 EMAP의 전시 주제 '천만은죽'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범준 기자

프랜시스 모리스 테이트 명예관장이 지난 12일 서울 이화여대 캠퍼스에서 EMAP의 전시 주제 '천만은죽'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범준 기자
세계를 바라보는 미술관의 시선을 서구 중심에서 글로벌로, 남성 중심에서 여성과 소수자로 완전히 뒤바꾼 혁명가. 프랜시스 모리스(67)는 1987년 영국 런던 테이트미술관에 합류한 뒤 30여 년간 미술사의 견고한 벽을 허물었다. ‘테이트 모던’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현대 미술의 성지로 일군 주인공이다. 루이스 부르주아와 쿠사마 야요이 등을 발굴해 세계적인 거장으로 우뚝 세웠고, 미술관 최초로 ‘기후 비상사태’를 선언하며 예술의 사회적 책임을 역설한 것도 그다.

모리스는 지난 11일 서울 이화여대 캠퍼스 전역에서 열리는 미디어 아트 페스티벌 2026 EMAP(Ewha Media Art Platform)-<천만은죽(千萬銀竹): 기후의 시간> 개막을 기념해 서울을 찾았다. 그는 2023년부터 3년간 이화여대 조형예술대학에서 학생들을 지도했다. 백남준 이후 두 번째 명예 석좌교수 자리에 앉았다. 그 인연으로 올해 EMAP의 기획 자문도 맡았다. 비디오 아트가 태동한 1960년대부터 동시대까지 아우르며 17개국 40개 팀의 국내외 작가를 소개하는 전시다. 테이트 역사상 첫 여성 관장이라는 무거운 직함을 내려놓고, 테이트 모던 명예관장으로 우리 앞에 다시 선 그에게 동시대 미술이 나아가야 할 이정표를 물었다.
 

백남준, 코끼리 수레 (Elephant Cart), 2001.

백남준, 코끼리 수레 (Elephant Cart), 2001.EMAP는 백남준 석좌교수를 기념해 2001년 시작됐습니다. 한국 대학이 여는 최초이자 유일한 국제 미디어 아트 페스티벌이죠. 올해의 주제 ‘천만은죽’이 가장 눈에 띕니다.

“기후변화가 대기와 땅, 인프라, 몸, 바다에 이르기까지 서로 긴밀히 연결돼 있는데 사람들은 그걸 잘 인지하지 못하죠. ‘천만은죽’은 장대비를 ‘은빛 대나무’에 비유한 고전문학의 표현에서 가져온 제목인데, 폭우를 재앙처럼 경험하는 오늘날의 기후가 21세기의 일상적 조건이 됐다는 걸 의미합니다. 어떤 면에선 공포와도 맞닿아 있어요. 예컨대 (생수병을 가리키며) 이 플라스틱병을 한 번 보세요. 생명의 근원인 아름다운 물이 들어 있지만 동시에 이것은 ‘죽음의 상징’인 플라스틱 안에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생명과 죽음이 동시에 담긴 양면성을 봅니다.”

▷서울의 대학 강단에서 보낸 시간은 어떤 의미였나요. 특히 EMAP 프로젝트에 깊이 관여했는데요.

“테이트에서의 긴 임기가 끝나갈 무렵 새로운 환경과 몰입의 기회가 필요했습니다. 이화여대에서 제안한 자유로운 교육 환경은 저를 매료시켰죠. 백 교수로부터 시작된 EMAP는 미디어 아트의 선구적 역사를 가진 훌륭한 플랫폼입니다. 이화여대에서 ‘박물관 생태학과 예술 세계의 미래’라는 강의를 통해 학생들이 ‘제도적 문해력’을 갖추길 바랐습니다. 예술계의 복잡한 구성 요소들이 세계적으로, 그리고 시간을 초월해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해하는 감각 말입니다.”

▷최근 진행한 콘퍼런스에서는 바다를 주제로 과학자와 예술가를 한자리에 모았습니다.

“사실 과학자와 큐레이터가 한 무대에서 소통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과학은 기술적이고 명확한 사실을 말하지만, 예술은 마음과 감정을 움직이는 강력한 힘을 가졌으니까요. 하지만 기후 비상사태의 시대에 이들의 만남은 필수적입니다. 한국 학생들이 미래를 두려워하는 영국 청년보다 생태학적 고민이 적다는 점에 놀라기도 했습니다. 워크숍을 통해 그들의 개인적인 삶과 가족의 서사가 어떻게 거대한 세계의 위기와 연결되는지 확장해가는 과정을 지켜봤습니다. 하나의 아이디어가 다른 아이디어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진화와도 같았죠.”

▷30대에 테이트 모던의 개관 멤버로 합류해 ‘미술관의 문법’을 완전히 바꿨습니다. 당신이 꿈꾼 21세기의 미술관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우리는 단 세 명의 큐레이터로 구성된 팀이었습니다. 미술관이 얽매여 있던 모든 관습에 도전할 기회를 얻었죠. 가장 먼저 회화, 조각, 미디어 등 장르로 엄격히 나뉘어 있던 부서를 없앴습니다. 21세기 예술가들은 매체를 넘나들며 작업하는데, 미술관이 장르의 벽을 세우고 블랙박스에 비디오를 가두는 건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혁명적이었던 건 ‘연대기순’ 전시를 폐기한 것입니다. 시간의 선형적 흐름 대신 주제별 구성을 선택해 작품들이 시공간을 초월해 대화하게 했죠.”
 

지난 11일 EMAP 개막식에서 무용 공연이 열리고 있다. /EMAP 제공

지난 11일 EMAP 개막식에서 무용 공연이 열리고 있다. /EMAP 제공
▷파격적인 시도 뒤에는 엄청난 비판이 따랐을 텐데요. 어떻게 그 확신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까.

“우리는 정말 적이 많았어요(웃음). 개관 당시 전문가들의 비평은 아주 혹독했습니다. 결정적인 답은 관객에게 있었죠. 관람객을 연간 150만 명으로 예상했는데, 400만 명이 몰려왔으니까요. 그들은 단순히 (터바인홀 등) 화력발전소가 미술관으로 바뀐 건축물의 혁신을 보러 온 게 아니었습니다. 전시실은 예술에 관해 토론하고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는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미술관이 ‘미술사 수업’이 아니라 ‘예술과 문화를 둘러싼 거대한 토론장’이 된 순간이고 지금까지 주제별 전시 원칙을 지켜오고 있습니다.”

▷비엔날레와 아트페어에서 여성 예술가와 생태학이 주요 화두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일부에선 이를 ‘의무적인 유행’처럼 치부하기도 하고요.

“누군가에게는 유행일지 몰라도 지구에 기후 위기는 파괴적인 현실입니다. 물 부족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고 플라스틱이 우리 삶을 중독시키고 있는데, 예술이 이를 외면할 수 있을까요. 2019년 테이트 모던이 기후 비상사태를 선포한 건 현대 예술가의 절박한 요구에 부응한 결과였습니다. 여성 예술가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류의 절반이 여성인데 그들의 업적을 배제하는 건 비극입니다. 우리가 앉아 있는 의자, 자동차의 머리 받침대, 의약품 테스트조차 남성 위주로 설계된 세상이죠. 여성 예술가들은 역경을 딛고 작업을 이어왔습니다. 테이트 모던 관장 시절 프로그램의 남녀 비율을 50 대 50으로 맞추는 것을 개인적 사명으로 삼았습니다. 여성 작가 전시가 늘어날수록 관객 수도 꾸준히 증가했는데, 이는 여성들이 예술계에서 자신의 롤모델을 보고 싶어 하는 진정한 열망이 존재한다는 증거였습니다.”

▷루이즈 부르주아, 쿠사마 야요이 등을 세계적인 아이콘으로 세웠습니다. 숨겨진 거장을 발굴하는 안목은 어디서 나오나요.

“2007년부터 국제 컬렉션 디렉터를 맡으며 서유럽과 북미를 넘어 아시아, 동유럽, 중동으로 시야를 넓혔습니다. 폴란드에서 만난 마그달레나 아바카노비치의 거대한 직조 작품을 보며 깨달았죠. 많은 여성 작가가 가부장제에 의해 회화라는 주류에서 배제됐고, 오히려 섬유 예술이나 공예를 통해 독창적인 혁신을 이뤘다는 것을요. 저는 예술가들에게 항상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에게 배웠나요?’ 그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역사가 기록하지 못한 놀라운 연결고리가 나타납니다. 부르주아의 침실에서 알리나 사포치니코프가 선물한 램프를 발견했을 때의 전율을 잊지 못합니다. 최측근조차 몰랐던 두 거장의 우정은 그렇게 증명됐습니다. 큐레이팅은 뉴욕이나 런던 중심의 지도가 아니라 자그레브와 도쿄, 상파울루가 아이디어로 연결된 ‘트랜스로컬(trans-local)’한 지도를 그리는 일입니다.”

인터뷰가 끝나고 그는 가방에서 낡은 명함 한 장을 꺼냈다. 이화여대 석좌교수 직함이 박힌, 이제는 ‘역사적인 종잇조각’이 된 마지막 명함이었다. “아이디어는 보이지 않지만 국경을 넘나든다”는 그의 말처럼, 모리스가 남긴 혁신의 유산은 런던과 서울을 넘어 예술이 숨 쉬는 모든 곳으로 계속해서 흘러갈지 모를 일이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15/0005287102?sid=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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