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주시터는 월 400만원, 엄마는 0원"…애 좀 봐달라는 딸, 거절 못하는 '공짜할머니들' [은퇴자 X의 설계]
[파이낸셜뉴스] 이수정 씨(57·가명)는 지난해 회사를 떠났다. 27년 근속에 퇴직금 2억9000만원. 은퇴 한 날 남편과 저녁을 함께 하며 미뤄온 이야기를 했다. 제주도에서 한 달 살기, 수채화 수업, 알람 없이 눈 뜨기. 긴 직장생활을 버티게 한 힘이었다.
그러나 그 계획을 미뤄야 하는 데 한 달 밖에 걸리지 않았다. 딸한테서 전화가 왔다. 복직을 해야 하는데 어린이집 대기가 8개월이란다. 아이를 당장 맡기기도 불안하다고 했다. "엄마, 그때까지만 좀 봐줄 수 있어?"
고민하던 이씨는 딸의 경력 단절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과 손주에 대한 애정으로 결국 허락했다. 그리고 8개월이 지난 지금, 이씨의 일과는 일을 할 때와 비슷하다. 새벽 6시에 일어나 8시 퇴근. 출근지만 회사에서 딸의 집으로 바뀌었다. 이 씨의 제주도 한 달 살기는 기약 없이 미뤄졌다.
주당 26.83시간 일하고 절반은 대가도 없어
이씨의 사례는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이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지난 2025년 7~8월 전국 55~74세 조부모 1063명을 조사한 결과, 조부모는 평일 거의 매일(4.6일) 하루 평균 6.04시간 손자녀를 돌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주당 평균 26.83시간에 달한다.

그러나 경제적인 대가는 크지 않았다. 정기적으로 대가를 받는 조부모는 34.6%, 비정기적으로 받는 경우는 17.3% 수준이었다. 받지 않는 조부모가 48.0%에 달해 두 명 중 한 명은 무보수로 돌봄을 제공하고 있다.
받는 금액도 크지 않다.
매월 정기적으로 대가를 받는 조부모는 평균 77만3000원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대하는 적정 수준의 임금은 평균 107만원이었다. 현실과 기대 사이 격차는 30만원 수준이다.
월평균 77만3000원의 보상을 '노동'의 잣대로 환산하면 안타까운 수준이다. 시급으로 계산하면 약 6700원꼴, 2026년 법정 최저임금의 70%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거절하면 '나쁜' 할머니 할아버지
왜 이렇게 많아졌을까. 마음 놓고 맡길 곳이 적기 때문이다. 특히 0~2세 영아를 맡아주는 어린이집은 수요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고 대기는 길면 1년을 넘긴다. 민간 베이비시터는 월 150만~200만원이 들고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불안감도 크다. 강남권 등지에서는 입주의 경우 월 400만원을 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공짜에 믿을 수 있는' 친정 부모·시부모가 유일한 선택지가 된다.
조부모 입장에서는 거절하면 나쁜 부모가 되는 것 같은 죄책감도 거든다. 육아 시스템이 자녀를 압박하고 그 압박이 조부모에게 전달되는 방식이다.
그러나 자녀 입장에서도 선택지는 많지 않다. 비용 부담이 크고 공공 돌봄은 대기 시간이 길다. 결국 부모에게 맡기는 선택만 남는 구조다.
충남 아산에서 자녀를 키우는 성주현(37·가명)씨는 "부모님이 힘드신 것을 알고 있다. 고민도 많이 했다"면서 "내가 일을 그만두면 되지만 그럼 생활이 되지 않는다. 결국 현실적으로 부모님 외에는 방법이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서울여성가족재단이 서울형 아이돌봄비 이용 가정(2024년 9월 기준)을 분석한 결과 이용 가구의 97% 이상이 친인척 돌봄을 선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 돌봄은 어린이집 이용 전후, 즉 부모의 출퇴근 시간대에 집중되는 경우가 많았고 조력자의 상당수는 조부모로 조사됐다. 현장에서는 특히 외할머니의 역할이 크게 나타나는 경향도 확인된다.
마처세대 X, 두 번째 인생도 '미룸'
이들 중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에 태어난, 이른바 'X세대' 여성들이다.
이들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독특한 위치에 있다. 위로는 부모를 봉양하고 아래로는 자녀를 뒷바라지하는 '마처세대(마지막으로 부모를 부양하고 처음으로 자녀에게 부양받지 못하는 세대)'로서의 숙명을 안고 있다.
이제 자녀를 출가시키고 '내 시간'을 찾으려던 찰나, 이번에는 자녀의 커리어를 위해 다시 육아 현장으로 소환된 것이다.
이 문제가 X세대 여성에게 특히 집중되는 이유가 있다. 지금의 50대 후반~60대 초반 X세대 여성들은 결혼과 출산으로 한 번 경력이 단절된 세대다. 자녀를 키우면서 커리어를 포기했거나 상대적으로 피해를 입었던 이들이 많다. 그래서 직장 생활 이후 정년 앞에서 '이제 내 시간'이라는 기대를 갖게 됐다.
1000만원도 못 받아도 '돌보는' 이유
앞서 본 것처럼 조부모들은 주당 26시간 넘게 돌봄에 시간을 쓰지만 받는 돈은 연간 1000만원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 일이 계속되는 이유는 '가족'이기 때문이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조사에서 조부모의 55.8%는 손자녀 돌봄이 '당연한 역할'이라고 답했다. 돌봄을 맡는 이유로는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정서적 보상이라는 답변이 가장 많았고 공적 돌봄 서비스의 부족과 이용 제약, 역할에 대한 압박이 뒤를 이었다. 결국 비용이 아니라 관계로 설명되는 구조다.
건강 자산의 붕괴: 무릎 연골은 예비 부품이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인식해야 하는 부분도 있다. 육체적 부담이다.
10kg이 넘는 아이를 들고 내리는 동작은 60대를 바라보는 관절에 영향을 준다.
서울 잠실에 사는 유성혜(67.가명) 씨는 큰 딸 자녀에 이어 큰 아들의 둘째 손주까지 5년째 돌보며 3개월마다 무릎 연골 주사를 맞는다. "아들이 미안하다며 주는 월 20만원 용돈은 고스란히 정형외과 물리치료비로 나간다"고 토로한다.
신체적 고통은 정신적 고통으로 이어진다. 또래 친구들이 여행을 가거나 꽃놀이를 갈 때 유모차를 끌고 놀이터에 앉아 있는 박탈감은 '황혼 우울증'의 핵심 원인이 된다. 그렇다고 자녀에게 친구들과 함께 할 시간을 달라고 하기에는 눈치가 보인다.

실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조사에서 손자녀를 돌보는 조부모 중 46.8%는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응답자의 72.1%는 돌봄으로 인해 체력적으로 힘들다고 느끼고 있었고 64.1%는 자신을 위한 시간이 부족하다고 답했다. 또 공연이나 전시, 여행 등 문화 활동을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한 경험도 59.8%에 달했고 47.6%는 손자녀 부모와 돌봄 방식이 달라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답했다.

'언제까지'라는 기준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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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남은 건 조부모가 최소한 챙겨야 하는 것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무릎이 망가지면 손주를 더 이상 안아줄 수도 없다. 우울증이 오면 손주를 보는 것 자체가 고통이 된다. 결국 오래 돌보려면 먼저 자신을 챙겨야 한다. 또 정당한 노동에 대한 대가도 정기적으로 받아야 한다.
한 포털에 '우리나라 3대 바보 부모'라는 글이 올라와 있다. 늙어서 손주 봐주느라 스케줄 바꾸는 부모, 재산 물려주고 용돈 타 쓰는 부모, 자식이 와서 잘까봐 집 늘려가는 부모.
물론 웃자고 쓴 글이다. 그런데 마냥 웃기에는 뭔가 찜찜하다. 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면 최소한 무너지지 않는 선에서 해야 한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14/0005519143?sid=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