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식의 세포에서 우주까지
이란 지역을 고대에는 대체로 페르시아라고 불렀다. 페르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대제국을 건설하는 데 성공한 나라다. 키루스 대왕이라고도 부르는 키루스 2세 시절부터 나라를 키워나간 페르시아는 얼마 후 중동 지역 전체를 석권하고 튀르키예 지역은 물론 인도의 일부와 아프리카의 이집트까지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그토록 거대한 지역을 지배하는 커다란 사회가 가능하다고는 상상도 못 했던 시절에 페르시아는 그 일을 현실로 만들었다. 페르시아가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는 데 성공한 시점은 진시황의 중국 통일과 비교해 보아도 300년 가까이 빠르다.제국의 건설자인 키루스 대왕에게는 그 운명에 대한 유명한 전설이 있었다. 바로 키루스 대왕의 어머니가 꿈속에서 화장실이 급해서 볼일을 보았는데 그 양이 너무 많아서 온 대륙을 가득 채우더라는 이야기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책 『역사』에 따르면 당시에 그 꿈을 해석해 보니 꿈속 주인공이 낳는 자식이 대륙의 지배자가 된다는 뜻이었고 한다. 결국 그 꿈이 예언한 운명대로 키루스 대왕은 세계 최대의 제국을 건설했다.
한국인으로 해몽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고 생각나는 신라의 전설이 하나 있을 것이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삼국을 통일한 신라 문무왕에 대한 꿈이 그와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다.
모친이 ‘볼일’ 봤는데 양 엄청났다는 태몽
살짝 다른 점이 있기는 하다. 문무왕 이야기에서는 문무왕의 어머니가 꿈의 주인공은 아니다. 꿈의 주인공은 문무왕의 이모였던 김보희였다. 꿈속에서 김보희가 화장실이 급해서 볼일을 보았는데 온 서라벌을 다 채웠다고 한다. 그런데 김보희에게는 동생 김문희가 있었다. 김문희는 언니의 꿈 이야기를 듣고 언니에게 꿈을 팔라고 한다. 언니는 대수롭지 않게 거래를 받아들였는데, 그 후 김문희가 결혼한 남편인 김춘추가 임금이 되었고 그 뒤에 낳은 아들이 문무왕이 된다. 꿈을 팔고 사는 과정으로 운명이 바뀐다는 이야기가 키루스 대왕 이야기에 덧붙은 셈이다.
나는 문무왕 꿈 이야기가 키루스 대왕 꿈 이야기와 살짝 다른 점이 한국인의 기질을 나타낸다는 생각도 해 본다. 신라의 전설은 아무리 하늘이 정해 준 운명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이 거래를 통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도전 정신을 보여 주는 느낌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돈만 있으면 타고난 운명조차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엿보인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이렇게 두 이야기가 비슷한 형태일 수가 있을까? 혹시 이란의 키루스 대왕 이야기가 천 년 정도가 지나 신라로 전해진 것이 아닐까?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키루스 대왕이 건설한 페르시아 제국은 몇 차례 부침을 거쳐 사산 왕조로 이어진다. 그런데 중세 시대가 되자 지금의 아라비아 지역에서 이슬람교라는 새로운 종교가 탄생하고 아라비아인들은 이슬람교의 발흥과 함께 주변 국가들을 정복해 나간다. 결국 이란 역시 아라비아인들에게 정복당하며 651년에 사산 왕조가 멸망한다. 현재의 이란 사람들은 대체로 이슬람교를 믿지만 그러면서도 자신들을 ‘아랍권’에 속한다고 말하지 않고 아랍어를 쓰지도 않는데, 거기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멸망과 함께 이란인들 중 일부는 주변 곳곳으로 망명을 떠났다. 그중에는 중국 서부까지 도착한 사람들이 있어서 중국의 역사책 『구당서』의 ‘서융열전’에도 그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 기록에서는 페르시아라는 나라 이름을 “파사국(波斯國)”이라고 부르고 있다. 중국 당나라에서는 이들을 나름대로 우대해 주며 지내게 했다는데, 이때가 신라 사람들이 삼국통일을 위해 당나라에 본격적으로 드나들던 시기와 겹친다. 김춘추가 당나라에 직접 방문해 외교 활동을 했던 것이 사산 왕조 멸망 3년 전인 648년이고 신라가 당나라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킨 시점이 그로부터 12년 후인 660년이다. 그러니 당나라를 드나들던 신라 사람들이 페르시아 사람들을 만났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어쩌면 망명한 이란인들이 대제국의 영광을 회고하며 들려준 키루스 대왕의 전설이 전해져 신라에서 삼국통일 영웅의 이야기로 자리 잡았을지 모른다.

신라와 페르시아의 교류에 대해서는 유물 증거도 있다. 경주에서 발견된 유물 중에 국보로 지정된 ‘황남대총 남분 유리병 및 잔’이라는 유리 제품이 있다. 모래의 이산화규소 성분을 녹여 유리를 만들어 내는 데엔, 나트륨 화합물 등의 성분을 융제라는 약품으로 활용하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했는데 과거에는 동아시아보다는 유럽과 중동에서 크게 발달했다. 신라의 이 유리병 역시 페르시아의 영향이 짙은 유물로 보고 있으며 그렇다는 말은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페르시아 상인과 신라인이 교류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더 진귀한 유물로는 신라의 양탄자도 있다. 양탄자는 페르시아 양탄자가 워낙에 오랜 세월 유명했고 지금도 이란산 양탄자는 이란 전통 기술을 상징하는 인기 제품이다. 털실을 꼬아 튼튼한 양탄자를 만들면서 복잡하고 다양한 무늬로 양탄자를 짜는 기술은 기하학과 수학 지식이 충분히 갖추어졌을 때 가능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의 왕실 보물창고라고 할 수 있는 쇼소인(正倉院)에는 그 옛날 신라로부터 일본인들이 구입한 양탄자들이 40장 이상 남아 있다. 모양이 대단히 화려한 제품도 있고, 그중에는 ‘자초랑댁(紫草娘宅)’이라는 표가 붙어 있는 것도 있다. 아마 자초랑이라는 신라 여성이 운영하는 가게의 제품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이런 물건들은 중앙아시아 내지는 중동 지역과 신라의 교류를 보여 주는 중요한 증거다. 모르긴 해도 이란의 망명자를 데려온 신라 사람들이 그 기하학과 수학을 배워서 만들어 낸 물건이 아닐까 하는 상상도 해 볼만한 제품이다. 또 한때는 일본의 공격에 자주 시달렸던 신라가 뛰어난 기술을 앞세운 국력으로 일본을 충분히 무역 상대로 관리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상징이기도 하다.
한드 세계적 인기 전부터 주몽·대장금 열광
신라의 양탄자 기술은 중국에도 흔적을 남겼다. 중국 당나라 시기에 나온 『두양잡편』이라는 책을 보면 신라에서 중국에 선물한 ‘오채구유(五色氍毹)’라는 이름의 양탄자가 걸작이라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오채구유에는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들과 여러 나라의 풍경을 세밀하게 만들어 놓았는데 바람이 불면 벌·나비·새가 움직이는 듯한 모양을 이루도록 설계되어 있어서 실제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한다. 『두양잡편』이라는 책은 워낙에 신비로운 전설이 많이 실린 책이긴 하지만, 적어도 신라의 기술과 이국적인 문화를 포용하는 다양함이 그 당시 중국인이 보기에 놀라웠다는 생각을 전한다고는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일화들을 보다 보면 삼국통일 이후 신라 전성기의 번영은 세계 여러 나라와 활발히 교류하며 곳곳의 좋은 기술들을 빠르게 받아들인 데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중국·일본 등의 가까운 나라는 물론 멀리 중앙아시아와 이란 지역의 문화까지도 신라인들은 경제와 산업을 발전시키는 바탕으로 활용했다는 이야기다.
현대의 이란과 한국 사이에도 어느 나라 못지않게 활발하게 교류한 역사가 있다. 이란이 친미국가였던 1979년 혁명 이전은 말할 것도 없고 그 후에도 긴 세월 한국과 이란의 교류는 두터운 편이었다.
단적으로 이란은 한국 다음으로 태권도의 인기가 높은 나라라서 항상 국제 대회에서 한국과 선두에서 경쟁한다. 지난 파리 올림픽에서는 한국이 딴 전체 메달 수는 3개였는데 이란은 그보다 하나 많은 4개였다. 이란의 젊은 사람들을 만나 보면 꼭 한국 사람들처럼 어릴 때 태권도 도장에 다닌 추억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이란에서는 지금처럼 한국 영화와 TV 드라마가 세계적인 인기를 끌기 전에 이미 ‘주몽’과 ‘대장금’ 같은 옛 한국 TV 드라마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서 국민적인 화제가 된 일도 있었다. 꼭 10년 전인 2016년에 한국 대통령이 이란의 수도 테헤란을 방문했을 때 이란 사람들이 김치를 담가 먹게 해 주는 행사를 한 적도 있었다.
나는 결국 인류는 더 깊이 서로를 이해하고 더 널리 교류하면서 더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부디 하루빨리 중동에 진정한 평화가 찾아오기를 소망한다. 한국과 이란의 교류가 다시 예전처럼 활발해지는 시대가 온다면 그것은 두 나라 모두에게 큰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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