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되찾기는 글렀지만, 저한테 사기 친 그놈들 이름과 얼굴만은 세상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조명숙 씨(가명·68)는 “평생 모은 돈을 하루아침에 뺏겼는데, 사람을 죽이는 살인과 사람의 영혼을 파괴하는 사기가 다른 게 무엇이냐”며 이같이 말했다. 조씨는 2024년 말 카드 배송원 사칭형 보이스피싱에 속아 2억6000만원을 잃었다.
현실은 조씨의 바람과 거리가 멀다. 살인범은 머그샷(범죄자 인상착의 기록 사진)이 공개되지만, 수많은 사람의 삶을 무너뜨린 사기범은 이름도 얼굴도 가려진다. 현행 중대범죄신상공개법은 살인·방화·성범죄·마약 등 신체에 직접 해를 끼치는 범죄만을 대상으로 한다. 사기 피해자들 사이에서는 “사기꾼의 신상을 공개해 사회적 활동을 제약하는 것이야말로 추가 범죄를 막는 가장 확실한 예방책이자 사회적 응징”이라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19일 매일경제 취재에 따르면 경찰청은 지난해 사단법인 정책법령연구소에 ‘사기범죄자 신상공개제도 도입 연구’를 맡겼다.
연구소가 최근 내놓은 정책연구보고서는 사기를 ‘경제적 강력범죄’로 규정하고, 사기범죄자에 대한 신상공개제도를 명문화할 입법안을 단계별로 제시했다.
첫 단계는 범죄수사규칙상 공개수배를 법률로 격상하는 것이다. 지금도 도주 사기범을 수배할 수 있지만, 근거가 경찰 내부 규정에 불과하다. 훈령을 법률로 격상해 사기범 신상공개가 법률에 근거해 이뤄질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다.
둘째 단계는 ‘사기 위험 정보 공개법’이란 특별법을 신설해 범행에 쓰인 전화번호, 계좌번호, 메신저 계정, 음성 녹취 등 범죄 도구 정보를 공개하는 단계다. 지금도 경찰청 전기통신금융사기 통합대응단이 피싱 등 범죄에 이용된 것으로 의심되는 전화번호를 일부 공개하고 있지만, 공개 범위와 방식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보고서는 피싱 범죄뿐 아니라 투자사기, 전세사기 등 다양한 유형의 사기범죄로 적용 대상을 넓히자고 제안한다.
마지막 단계는 중대범죄신상공개법을 개정해 합산 피해액이 50억원 이상이면서 피해자가 50명 이상인 대형 사기에 한해 머그샷 공개를 가능하게 하는 방안이다. 특히 유죄가 확정 뒤에야 신상을 공개하는 ‘성범죄자 알림e’ 방식과 달리 범행이 진행 중인 수사 초기에 머그샷 정보를 신속히 공개하는 것이 피해 확산을 차단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보고서는 판단했다.
사기범죄의 사회적 해악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지난해 국내에서 발생한 사기범죄는 43만693건(잠정치)으로, 전체 발생 범죄의 26.7%를 차지했다. 사기 발생 건수는 2023년 34만7901건 이후 해마다 늘어나 지난해까지 3년 연속으로 역대 최다 기록을 경신했다. 발생액 기준 연간 재산 피해 규모는 2024년 약 27조7600억원에 달한다. 이는 10년 전인 2014년 13조1500억원과 비교해 2.1배 늘어난 액수다.
피해는 단순히 돈을 잃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보이스피싱으로 노후자금을 통째로 날린 뒤 목숨을 끊는 노인, 전세사기로 전 재산을 잃고 극단적 선택을 하는 청년 등 피해를 비관한 자살이 잇따르고 있다.
문광민 기자
조병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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