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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에 걸렸다, ‘최저가 검색’부터 관뒀다...하루를 40일처럼 살아야 하니까 [잘생, 잘사]

무명의 더쿠 | 10:50 | 조회 수 2393

https://n.news.naver.com/article/469/0000918948?ntype=RANKING

 

잘사는 것 만큼이나 잘 죽는 것이 과제인 시대입니다. 행복하게 살다가 품위 있게 늙고 평온한 죽음을 맞으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요. 최문선 논설위원과 함께 해법을 찾아봅니다.


 

"삶이란 운칠기삼이라 시련이 닥치는 건 불가항력이지만, 시련을 대하는 태도는 내가 정할 수 있어요." 김새섬 독서플랫폼 ‘그믐’ 대표의 말이다. 본인 제공

"삶이란 운칠기삼이라 시련이 닥치는 건 불가항력이지만, 시련을 대하는 태도는 내가 정할 수 있어요." 김새섬 독서플랫폼 ‘그믐’ 대표의 말이다. 본인 제공

옷과 이불이 토사물 범벅이었다. 갑작스러운 두통 때문에 약을 먹고 잠들었다 깨 보니 그랬다. 응급실에 갔고, 수술을 했고, 엿새간의 기억을 잃었다. 그리고 악성 뇌종양인 교모세포종 진단을 받았다. “각종 치료방법을 동원하더라도 평균 생존 기간이 12~14개월”(서울대 암연구소)이고, “2005년부터 2015년까지 확진받은 600명 중 3년 이상 산 사람이 108명”(서울대학병원)이라는 병.

책 읽는 사람들을 연결하는 독서플랫폼 ‘그믐’의 김새섬(48) 대표에게 지난해 4월 벌어진 일이다. 퇴사 뒤 ‘그믐’을 차리고 인생 2막을 신나게 시작한 지 2년 만이었으니, 얼마나 억울했을까. 이제 40대인데. 그러나 그는 “불운이 왜 나만 피해가야 해? 왜 나만?” 하고 이내 현실을 받아들였다. 남은 시간이 길지 않을지도 모른다면, 그 사실 앞에 멈춰 서는 대신 삶을 압축해서 살기로 했다. 어느 은퇴한 의사의 조언대로, 40배의 밀도와 속도로.

김 대표는 여전히 성실하게 책을 읽고, 죽음을 공부하는 독서모임을 운영하고, 아픈 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한 강연을 하고, 남편인 장강명 작가와의 대화를 녹음한 10분 분량 팟캐스트를 매일 올린다. 가장 에너지를 쏟는 건 책 읽는 즐거움을 알리는 일. 죽음이 저만치서 어른거리는데 책이라니. 놀랍도록 치열한 김 대표의 삶 앞에서, 비슷한 처지가 된다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그런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묻게 된다. 이틀에 걸쳐 화상으로 그를 만났다. “아프고 나니 이렇게 언론 인터뷰도 하고 좋다”면서 그는 웃어 보였다.
 

 

"모두가 시한부 인생...그래서 억울하지 않아요"



(중략)

Q. 팟캐스트에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거침없이 하더군요. 어떻게 그렇게 담담한지요.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으로 이어지는 ‘죽음의 5단계’가 있죠. 특이하게도 저는 거의 바로 수용 단계로 갔어요. 노력도, 인과응보도 아닌 운이 삶을 참 많이 좌우하죠. 어릴 때는 그게 부조리해 보여서 제 운과 삶을 부정했어요. 집이 가난했고, 예쁘게 태어나지 않은 것에 화가 났어요. 그런데 죽음만큼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평등하더군요. 누구나 죽죠. 그래서 억울함이 없습니다. 죽음이 막 반가운 건 아니지만, 저만 이런 병에 걸리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죠. 제가 뭐라고요. 책을 많이 읽어온 것도 도움이 됐습니다. 독서는 한 발 떨어져서 상황을 객관화시키는 경험이고 훈련이니까요.”

Q. 부부가 죽음을 소재로 농담을 하는 것도 생경합니다. ‘시한부’란 말도 여러 번 하던데요.

“저뿐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시한부예요. 언젠가는 다 죽어요. 장 작가(그는 남편을 이렇게 부른다)는 아직 부정하는 단계로 보여요. 받아들이면 스스로 파괴될까 봐 스스로를 보호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해요. 그렇다고 당장 현실을 일깨워 주는 건 잔인한 일이죠. 제가 이런 상황이 돼서 장 작가와 부모님께 정말, 너무, 미안하거든요. 자식을, 배우자를 먼저 떠나 보낼지도 모른다는 건 엄청난 슬픔이잖아요. 그분들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런 슬픔을 겪어야 하다니요…”
 

 

유서에도 "여한 없고 행복하다"고 쓴 사람

지난해 4월 교모세포종 진단을 받기 며칠 전의 김새섬 대표. 본인 제공

지난해 4월 교모세포종 진단을 받기 며칠 전의 김새섬 대표. 본인 제공

#. 죽음이라는 것을 김 대표 부부는 멀리 치워 두고 살지 않았다. 2019년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거부하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썼고, 2017년부터는 매년 유서를 써왔다. 12월 31일에 과메기 안주에 와인을 마시면서 하는 부부만의 연말 리추얼. 각자 쓴 유서를 이메일로 교환하고, 마주 앉아 서로 읽어주고, 그 목소리를 녹음해 보관한다. “1년치의 삶을 돌아보고, 어느 한 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날 경우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고.

Q. 병을 알게 된 이후인 지난 연말에도 유서를 썼나요. 쓰는 마음이 이전과 달랐겠습니다.

“오래 써서 수월하게 썼지만, 이번처럼 진심을 다해 쓴 적도 없네요. 자산 현황을 구체적으로 정리해 뒀고, 은행계좌 등의 비밀번호를 남겨놨어요. ‘장례식 필요 없다, 조의금도 받지 말아라, 화장 후 부산 앞바다에 해양장을 해라, 뜨끈한 식사 한 번 하고 어떤 추모도 하지 말아라, 내 물건 들여다보지 말고 업체에 맡겨서 일괄 폐기해라’ 같은 내용도 담았습니다. 오랫동안 생각한 건데, 최근엔 ‘나 말고 남게 될 사람들을 위해서도 최선인가’ 싶기도 해요. '죽음 이후'를 계속 고민하며 유서 내용을 바꿔 나가야 할 테죠.”

#. 김 대표 유서는 이렇게 끝난다. “아무것도 없는 데서 와서 이것저것 재미있게 해보다 가니 여한 없고 행복합니다. 내 남편 장강명은 나의 죽음으로 좌절하지 말고 꼭 본인이 원하는 걸작을 최대한 많이 써서 남기기 바랍니다. Keep calm and carry on writing. 사랑합니다. 우리는 꼭 다시 만날 거예요. 감사합니다.”

Q. ‘아픈 젊은 사람’이 되고 나서 삶이 어떻게 달라졌나요.

“남은 시간이 좀 더 짧을 수 있다는 것 말고는 제 삶이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를 건 없어요. 짧은 만큼 더 빠른 속도, 더 높은 밀도로 살면 돼요.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거죠. 이젠 최저가 찾겠다고 30분씩 모니터를 들여다보지 않고, 언젠가 도움을 받을지 모른다는 이유로 싫은 사람과 연락하지도 않아요. ‘살면 얼마나 산다고’ 하는 생각을 하고 나니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었어요. 더는 악착같이 돈을 아끼지 않고, 택시도 타고 비싼 코스요리도 먹어요. 끊임없이 뭔가를 계획해야 마음이 놓이는 스타일이었는데, 닥쳐서 하는 것도 받아들이게 됐어요. 그런 삶의 방식에도 장점이 있고, 큰일이 일어나지도 않더라고요(웃음).”

Q. ‘인생의 이런 좋은 면을 발견했다’ 하는 게 있다면요.

“병에 걸리니까 사람들이 너무 잘해줘요. 책 이야기를 꺼내면 ‘또냐?’고 했던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 주더라고요. 이런 환대 낯설어요(웃음). 새로운 기회도 열렸어요. 얼마 전에 CBS방송 ‘세바시’ 강연을 했는데, 사실은 아프기 전에 기획서를 보내면서 불러달라고 했거든요. 그때는 연락도 없더니(웃음)… 완벽하지 못할까 봐 미뤄 둔 팟캐스트를 덜컥 시작한 것도 아프고 나서예요. ‘남은 시간이 얼마일지 모르니, 부족한 대로 해보자’ 하는 생각이 저를 떠밀었어요. 아프고 나서 오히려 제가 원하는 대로 살게 됐어요.”
 

 

"사랑합니다, 미안합니다, 용서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화상으로 만난 김새섬 대표. "행복하신가요" 불쑥 물으니 "그렇다"고 했다. "행복으로 가득한 건 아니지만, 지금 삶에 만족한다"고. 화면 캡처

화상으로 만난 김새섬 대표. "행복하신가요" 불쑥 물으니 "그렇다"고 했다. "행복으로 가득한 건 아니지만, 지금 삶에 만족한다"고. 화면 캡처

Q. 좋은 죽음이란 뭘까요.

“’죽음을 인터뷰하다’라는 책에 ‘좋은 죽음은 맞이하는 죽음’이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같은 생각입니다. 죽는 당사자와 남게 될 사람들이 죽음을 이해하고 준비해 둔 덕에 담대하게 대처하는 죽음이랄까요. 정보는 언제나 힘이 되고,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예요. 죽음을 준비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가장 결정적 요건은 좋은 관계 속에 죽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사랑하는 사람들과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그들에게 의미 있는 메시지를 남기고 떠날 수 있어야죠. 존엄함을 너무 많이 잃지는 않는 것, 육체적 고통이 덜한 것은 누구나 바라겠죠."

Q. 그럼 좋은 삶이란 뭘까요.

“좋은 삶도 좋은 관계가 만들지 않을까요. 가까운 가족, 친구가 없더라도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신뢰하는 경험을 나누고, 관계의 충만함을 누릴 수 있다면 좋겠죠. 아우슈비츠 참상을 다룬 책 ‘죽음의 수용소’엔 언제 가스실로 끌려갈지 모르는데도 타인을 기꺼이 돕고 자기 빵을 나눠 주는 사람들이 나와요. 삶을 결정할 수는 없게 돼버렸지만, 삶의 고상함은 끝까지 지키기로 한 거죠. 저도 그 용기와 품위를 따라하고 싶습니다. 삶의 시련은 불가항력이지만, 시련을 대하는 태도는 내가 정할 수 있어요. 또 끝까지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삶, 가치와 목표를 세우고 실현하는 삶을 바랍니다.”

Q. 스스로 지키고 싶은 삶의 가치와 목표는 뭔가요.

“’그믐’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이어가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책 읽는 즐거움, 함께 읽는 힘을 전파하고 싶어요. 가족, 친구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고요. 미국 의학드라마 ‘피트’에는 어느 의사가 사별하는 환자와 가족에게 이런 인사를 나누라고 권하는 장면이 나와요. ‘사랑합니다, 미안합니다, 용서합니다, 용서해 주세요.’ 저도 그 말을 하고 떠나고 싶어요. 방사선·항암 치료가 끝나서 몸이 좀 좋아졌으니, 봄이 오면 사람들을 만나서 그 말을 해두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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