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100년 전인 1920년대는 일명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로 불리며 특히 자본주의 천국이었던 미국의 당시 황금기로 유명하다. 이 시기 부자들의 일상은 위대한 개츠비 같은 여러가지 매체들을 통해 잘 알려져있다. 하루아침에 백만장자들이 속출하는 시대였다보니, 개츠비같은 신흥 백만장자들은 롤스로이스 차를 구입하고, 매일밤 대저택에서 화려한 파티를 열고, 초호화 유람선을 타고 세계일주를 즐기고....

But....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것은 주변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을 법한 평범한 소시민 가정의 일상이며, 그런 서민들은 당시 하루를 어떻게 살았느냐에 가깝다. 물론 이들도 '미국'의 소시민이었던만큼, 당시 나머지 세계에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것들을 많이 누리며 살았다.
(예를 들어, 당시 미국의 서민가정들은 집집마다 다 수도가 들어왔고 가스레인지를 사용했고, 심지어 실내 화장실도 있었다. 수도꼭지만 딸깍 돌려도 집에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는게 너무 당연한 생활이었는데, 미국을 뺀 나머지 세계에서는 이게 절대 당연하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아궁이에서 장작을 때서 밥을 하고 냇가에서 빨래하던 시대였으며, 나름 아시아에선 근대화되었다는 일본조차도 요강 대신 푸세식 화장실을 사용하고 동네에서 이제 우물 대신에 공동펌프에서 물 길어다 쓰게 된걸 근대화라고 보는 식이었다.)

서민들의 보금자리는 엘리베이터 없는 벽돌 아파트(Walk-up)이거나 퀸스의 촘촘한 연립주택이었다. 빈민들이 우글거리는 낡은 테너먼트(빈민 아파트)를 탈출해, 거미줄처럼 뻗어나가는 전철망을 따라 외곽의 새 아파트로 이주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이자 자랑이었다. 5~6층짜리 브릭 빌딩의 한 층에 방 2~3개짜리 아파트먼트를 빌려서 사는 것이 전형적인 소시민 가정의 집이었다.
이 좁은 아파트먼트의 아침을 가장 먼저 깨우는 것은,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며 식사를 준비하는 경쾌한 소리와 은은하게 퍼지는 모닝커피의 향기였다. 1920년대에 접어들며 미국인들의 아침 풍경은 그야말로 혁명적인 속도로 변모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극적인 변화는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아내들의 손끝에서 일어났다.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새벽같이 일어나 무거운 석탄 통을 나르고, 매캐한 연기와 씨름하며 화덕의 불씨를 살려내야만 했다. 무쇠 스토브가 달아오르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고단한 노동은 이제 할머니나 부모님 세대의 옛날이야기로 밀려났다.

석탄 스토브가 사라진 자리에는 하얀 에나멜이 매끄럽게 칠해진 가스레인지가 들어왔다. 밸브를 살짝 돌리고 성냥을 긋기만하면 가스 불꽃이 너무나 간단하게 훅 피어올랐다. 그 시퍼런 불꽃 위에서 베이컨을 굽고 모닝커피를 끓여내는 풍경은 이제 완전한 현대에 진입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물론 그 당시 1920년대 지구에서 only 미국에 한정된 이야기이다.)
프라이팬에 지글거리며 베이컨을 굽고 계란 후라이를 부치는 전통적인 아침 식사가 여전히 기본값이었지만, 젊은 층을 중심으로 완전히 새로운 식문화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바로 요리라는 번거로운 과정 자체를 아예 생략해 버린 '시리얼 문화'의 대유행이었다. 켈로그의 콘플레이크를 그릇에 붓고 우유를 콸콸 붓기만 하면 아침 준비는 끝이었다. 불을 켤 필요도, 긴 시간을 들여 요리를 할 필요도 없이 5분만에 아침을 달콤하게 뚝딱 때우고 집을 나서는 가벼운 발걸음은 '광란의 20년대'가 만들어낸 바쁜 현대인들의 자화상이었다.

아침식사를 마친 남편은 지하철역 개찰구에 5센트짜리 동전을 밀어넣고, 직장으로 향하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1920년대의 길거리에는 포드의 국민자동차 모델 T가 미국의 도로 풍경을 바꿔 놓은 지 이미 오래였고, 자동차와 트럭과 택시가 뒤섞여 교통 체증이 일상이었다.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주머니 속에 자동차키 하나씩은 다 가지고 있는게 아닐까 생각될만한 풍경이었다.
아직 전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자동차가 왕족이나 권력자나 대부호들의 사치품으로 생각되던 시대였다. 하지만 미국의 대도시들에서는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가 밤낮없이 돌아가며 토해낸 자동차들이 매일같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미국을 빼고는 당시 전세계 그 어느 나라에 가도 이토록 압도적인 규모의 자동차 행렬은 볼 수 없었다.


그러나 평범한 샐러리맨들이 차키를 직접 소유하는 일은 아직 손에 닿지 않는 신기루에 가까웠다. 대량생산과 할부의 시대가 열렸음에도, 서민들의 얄팍한 지갑으로는 도저히 그 비싼 쇳덩어리를 감당하기 버거웠다. 평범한 소시민들까지도 잔디 깎인 교외의 차고에 마이카를 주차해 두는 진정한 자동차의 시대가 열리기까지는 아직 30년 정도는 더 기다려야 했다.
(대략 1950년대쯤 되면 서민가정에서도 이제 차 없는 집이 드물어지며 완전한 교외생활 마이카 시대가 개막하게 됨)
거리에는 버스도 달리고 있었고, 전차가 아직 궤도 위를 오가고 있었지만 자동차에 밀려서 이미 과거의 유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지하철은 출근하는 사람들로 발 디딜틈이 없이 넘쳐났고, 그 사이에 어떻게든 몸을 구겨 넣어 매달리다시피 타는것이 미국 소시민의 아침이었다.
출근길 지하철 안에서는 타블로이드 신문을 펼쳐 들고 베이브루스의 홈런 소식이나 알 카포네 같은 갱스터들의 자극적인 기사를 읽는 것이 샐러리맨들의 빼놓을 수 없는 일과였다. 누군가는 무리해서 빚을 내어 주식에 손을 댔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평범한 월급쟁이들에게 월스트리트의 호황은 그저 신문 1면의 숫자놀음에 불과할 때가 많았다.

남편이 바깥에서 푼돈을 버는 동안, 집 안의 시간은 아내가 붙들고 있었다. 물론 1920년대쯤 되면 아내가 결혼전에 직업을 가졌던 경우도 흔했다. 타이피스트, 전화 교환원, 백화점 점원, 공장 라인 노동자 등. 그러나 결혼과 함께 직장을 떠나는 것이 당연시되었고,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살림을 꾸리는 것이 아내의 일이었다.
빠듯한 수입으로 집을 깔끔하게 유지하고, 아이들을 단정하게 입히고, 식탁을 그럴듯하게 차려내는 것. 얼마나 남편의 수입이 빠듯하길래 아내까지 일을 하냐며 흉을 보는 분위기가 있었고, 그럼에도 남편의 수입만으로 도저히 생계가 어려울때는 집에서 삯바느질을 하거나 하숙인을 들이는 경우도 많았지만, 그것을 밖에 대놓고 드러낼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1920년대의 대량생산 대량소비 문화는 늘 가정의 경제를 압박하고 있었다. 광고가 새로운 상품을 끊임없이 보여 주었고, 라디오와 영화가 물질적 욕망을 자극하고 있었고, 할부 구매가 보편화되면서 수입 이상의 소비가 가능해지고 있었다. 소시민 가정은 이 끊임없는 미디어의 유혹과 현실적인 절약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했다.

화려한 보브컷 단발머리에 담배를 문 '플래퍼(Flapper)'들이 시대의 아이콘으로 떠올랐지만, 그것은 잡지 속이나 헐리우드 영화에서나 볼 법한 딴 세상 이야기였다. 앞치마를 두르고 쉴 새 없이 가사 노동을 하는 것이 서민들의 현실이었다. 일단 장을 보러 나가는 것이 하루의 큰 일과였다. 동네의 상점가를 돌면서 베이커리에서 갓 구운 빵을 사고, 그로서리에서 채소와 과일을 고르고, 델리에서 치즈와 햄과 절임을 사고....
하지만 이런 풍경도 1920년대부터는 슬슬 달라지기 시작했는데 '슈퍼마켓'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체인 식료품점이 점점 동네마다 퍼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체인점들은 카운터 너머에서 주문을 받은 점원이 선반에서 물건을 꺼내 달아 주고 종이에 싸 주는 전통적인 방식이 아니라, 소비자들이 물건 사이사이를 돌아다니며 직접 골라담는 '셀프서비스' 방식을 도입하고 있었다.

동네 모퉁이마다 A&P 같은 체인형 식료품점이 들어섰고, 소비자들은 입구에서 나무와 철사로 엮은 바구니를 집어 들고 진열대 사이사이를 자유롭게 거닐며 원하는 물건을 직접 만져보고 고를 수 있는 신개념 쇼핑방식을 맛보았다. 더 이상 점원과 입씨름하며 흥정할 필요도 없이 정찰제 가격표가 반듯하게 붙어있는 제품들을 바구니에 담기만 하면 되었다.
이 새로운 형태의 매장 선반에 줄지어 진열된 것은 대량생산 시대가 낳은 통조림 제국이었다. 어머니 세대가 하루종일 뜨거운 불 앞에서 과일과 채소를 졸이고 끓여 유리병에 밀봉하던 그 결과물들이 이제는 공장에서 무한정 찍혀 나와 끝없이 도열해 있었다. 하인즈의 피클과 케첩이 찬장에 놓여 있었고, 캠벨 수프의 빨간 통조림이 뚜껑만 따면 곧바로 식탁에 오르는 현대적인 편리함을 선사하고 있었다.
빵은 아직 동네 베이커리에서 덩어리로 사서 집에서 잘라 먹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1928년부터 공장제 슬라이스 빵(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의 식빵)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오늘날까지도 미국인들이 놀라운걸 볼 때마다 슬라이스 빵 이후 최고의 발명(The greatest thing since sliced bread)이라고 비유할만큼 이 균일하고 네모반듯한 빵 조각은, 더없이 간편하고 효율적인 미국의 1920년대를 상징하는 완벽한 상징물이었다.

1920년대에는 가전제품의 보급이 폭발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전기는 이미 대부분의 가정에 들어와 있었고, 벽에 붙은 스위치만 딸깍 누르면 대낮같이 환해지는 전등은 미국인들에게는 마치 숨 쉬듯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생활이었다.
얼음 배달부가 채워주고 가던 아이스박스는 여전히 서민가정 부엌의 표준이었지만, 냉장고가 서민들도 감당가능한 범위에 슬슬 들어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물론 그 커다란 철제 캐비닛을 부엌에 들여놓기 위해서는 다달이 빚을 쪼개서 갚아야하는 할부의 짐을 짊어지고서라도, 더 이상 매일매일 장을 보러갈 필요가 없다는 유혹은 소시민들에게 너무나 강렬했다.
진공청소기도 퍼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특히 업계의 선두 주자였던 후버(Hoover)의 맹렬한 광고 공세는 신문광고와 잡지의 지면을 가득 채웠다. "후버를 돌린다"가 청소의 동의어가 되어 가고 있었을 정도였으니...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고 커다란 청소기 가방을 든 후버 외판원들이 동네 골목마다 진을 쳤다. 이들은 집집마다 초인종을 누르고 들어가서는 일부러 카펫 위에 베이킹소다나 흙먼지를 왈칵 쏟아부었다.
주부가 경악하며 소리를 지르려는 그 순간에, 진공청소기 전원을 켜고 순식간에 먼지를 빨아들여 카펫을 새것처럼 만들어버리는 극적인 마술 쇼를 선보였다. 이 마법같은 광경을 넋을 잃고 지켜보던 주부들의 손에는 결국 할부 계약서가 쥐어져 있었다.

그 시절 주부들에게 있어 가장 두려운 날은 바로 산더미 같은 빨랫감과 씨름해야 하는 세탁일(보통 월요일이었음), 이른바 블루 먼데이(Blue Monday)였다. 전동 모터가 달리고 롤러로 물기를 짜내는 초창기 세탁기들이 보급되기 시작했지만, 서민들에게는 아직은 너무 비싼 사치품이었다.
그 대신 동네 세탁소에 골칫거리인 빨랫감을 한 보따리씩 맡기는 집이 늘어나고 있었다. '중국인 세탁소'는 1920년대 미국 대도시 어디에서나 마주칠 수 있는 가장 흔하고도 필수적인 풍경이었다. 중국인 이민자들은 부지런하고 솜씨가 좋다는 평을 받으며 인기가 많았고(미국에서 동양인=세탁소 이미지가 강했던 이유), 빳빳하게 풀을 먹인 남편의 셔츠와 함께, 붉은 잉크로 한자가 휘갈겨진 종이 영수증을 주고받았다.
그 대신 전기다리미는 이미 서민층에도 상당히 퍼져 있었고, 숯다리미의 시대는 지나가고 있었다. 세탁기와 달리 가격의 문턱이 낮았던 전기다리미는 가사 노동을 획기적으로 덜어주는 작고 확실한 구원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벽면의 콘센트에 플러그만 꽂으면 그을림이나 매캐한 연기도 없이 면직물 위를 미끄러지듯 오가며 마법처럼 주름을 쫙쫙 펴내는 신세계였다.

전화기는 아직은 '좀 있는 집'에서나 볼 수 있는 물건이었지만, 서민층에까지 점점 내려오고는 있었다. 이미 사무실에서는 전화가 너무나 필수적이고 당연한 업무기기가 되어가고 있는 나라가 미국이었다. 하지만 전화를 일반 가정집에서까지 들여놓는 것은 은행가나 변호사, 의사와 같은 상위중산층 가정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대량생산의 거대한 톱니바퀴는 점점 평범한 샐러리맨, 서민 가정의 거실에까지 전화벨 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럼에도 평범한 소시민 가정에서 전화기를 단독으로 개통해 쓴다는 것은 여전히 경제적으로 버거운 일이었기에, 서민 아파트에서는 보통 서너 가구가 하나의 전화선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파티 라인(공동 전화선)'을 신청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 파티 라인 비용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가난한 이민자나 말단 샐러리맨들은 외투를 챙겨입고 길거리로 뛰쳐나와 동네의 드럭스토어나 캔디스토어의 전화를 급하게 사용했다. (급하게 의사를 불러야 할 때, 멀리 떨어진 고향에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할때 등)

1920년대 소시민의 거실을 가장 폭발적으로 장악한 진정한 챔피언은 역시 라디오였다. 1920년에 KDKA가 최초의 상업 방송을 시작한 이래 라디오 붐이 일고 있었고, 서민들은 '할부'를 적극 활용해서 너도나도 라디오를 집에 들여다놓는 열풍이 일어났다.
192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이 비싼 마법 상자를 도저히 감당할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은 저녁마다 동네 유일의 '라디오 있는 집' 거실로 우르르 몰려가 숨을 죽였다. 이웃집 소파에 다닥다닥 걸터앉아, 타닥거리는 잡음 사이로 흘러나오는 멀리 떨어진 대도시의 재즈 선율이나 야구 중계에 경이로움을 금치 못하며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기술의 보급은 눈부시게 빨랐다. 1920년대 후반에 이르자 집집마다 온 가족이 거실에 둘러앉는것이 미국인들의 표준적인 저녁 풍경이 되어가고 있었다. 몇년전만 해도 염치 불구하고 남의 집에 우르르 몰려가서 라디오를 얻어 듣던 집들조차도, 1920년대 후반에는 라디오 없는 가정이라는 것이 오히려 신기하고 예외적인 케이스가 되어가고 있었다.

빠듯한 소시민들의 생활에도 여가는 있었다. 타임스퀘어를 걷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달라졌을 것이고, 브로드웨이의 극장가에 뮤지컬과 연극의 간판이 줄지어 네온사인의 불빛이 밤을 낮처럼 만들고 있었다. 5번가의 고급 상점들이나 백화점은 쇼윈도 너머 공짜 구경으로 만족해야 했고, 실제 쇼핑은 동네의 잡화점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울워스가 그 제왕이었는데, 무엇이든 5센트와 10센트에 살 수 있었고, 사탕과 장난감과 학용품과 가정용품이 한 매장 안에 다 있었다.
날이 좋으면 비좁고 답답한 벽돌 아파트를 벗어나 센트럴 파크나 브루클린의 프로스펙트 파크로 향하는 것은 서민들에게 허락된 소박한 사치였다. 평일 내내 작업복과 앞치마에 찌들어 있던 사람들도 일요일만큼은 빳빳하게 다려 둔 외출복과 모자를 챙겨 쓰고 나섰다.
잔디에서 아이들이 뛰어다녔고, 아버지는 벤치에 앉아 신문을 읽었고, 어머니가 피크닉 바구니를 꺼내면 차가운 햄과 치즈, 곱게 으깬 달걀 샐러드가 듬뿍 들어간 샌드위치가 훌륭한 자태를 드러냈다. 온 가족이 잔디밭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샌드위치를 나눠 먹으며 달콤한 레모네이드를 들이키는 그 순간만큼은, 저 멀리 롱아일랜드에 사는 백만장자들의 진수성찬이 부럽지 않았다.
푹푹 찌는 무더운 여름이 되면 코니 아일랜드가 뉴욕 노동자 가족들의 천국이었다. 지하철 개찰구에 단돈 5센트짜리 니켈 동전 하나만 밀어 넣으면 갈 수 있는 '니켈 파라다이스'로 불리는 곳이었다. 해변가에서 파는 새콤달콤한 핫도그를 입에 물고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파도소리를 듣고, 아찔한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이 최고의 가족 나들이였다. 일요일이 되면 코니 아일랜드에는 수십만명의 인파가 몰렸고, 모래사장에는 발 디딜 틈도 없었다고 한다.

영화는 가장 강력한 대중 오락이었다. 어두컴컴한 상영관에 앉아 빛줄기가 쏘아 올린 환상적인 실버스크린을 바라보는 순간만큼은, 밀린 집세나 잔돈 몇 푼에 쪼들리는 현실을 완벽하게 잊어버릴 수 있었다. 기후가 온난하고 맑아서 촬영 및 필름 보관에 용이한 LA의 할리우드가 영화 산업의 메카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1920년대는 무성영화의 황금기였고,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찰리 채플린은 과장된 몸짓과 극적인 표정만으로 관객을 울고 웃기는 달인이었다. 몇천 석의 좌석에 화려한 로비를 갖춘 무비팰리스가 동네마다 들어서고 있었다. 궁전(Palace)라는 이름 그대로, 평소라면 감히 문턱조차 넘지 못할 오페라 하우스나 베르사유 궁전을 통째로 옮겨놓은 듯한 화려함 그 자체였다.
입장료 10센트를 내고 회전문 안으로 들어서면, 커다란 샹들리에가 눈부시게 쏟아지는 대리석 로비를 지나, 각 잡힌 제복을 차려입은 안내원의 정중한 호위를 받으며 레드카펫을 밟고 들어가는 길은 마법의 성에 초대받은 귀족이 된 것만 같은 완벽한 착각을 선사했다.
은막 위로 쏟아지는 스펙터클을 올려다보는 두 시간 동안은 고단한 현실을 잊게 하는 환상의 세계가 황홀하게 펼쳐졌다. 더글러스 페어뱅크스가 모험활극에서 칼을 휘둘렀고, 영화 '십계'가 1923년에 나와서 성경 속 이야기들이 스펙터클로 스크린 위에 펼쳐졌다.

야구는 미국인들의 종교였다. 양키스타디움이 1923년 4월에 문을 열었고, 베이브 루스가 홈런을 때려 올릴 때마다 온 나라가 열광했다. 평일 내내 팍팍한 노동과 쥐꼬리만 한 월급에 시달리던 평범한 소시민 남성들도 양키스타디움에 가서 베이브 루스의 경기를 보는것은 충분히 실현 가능한 사치였다. 포수 뒤편의 좌석은 부자들의 몫이었을지 몰라도, 외야석 저 멀리 지붕도 등받이도 없는 블리처석은 단돈 50센트에서 1달러 남짓이면 충분했기 때문이다.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일요일 오후, 아버지가 아들과 함께 덜컹거리는 지하철에 올라 야구를 보러가는 것은 1920년대 미국의 부자지간에 나눌 수 있는 유대감이자 공감대였다. 홈런이 터지는 바로 그 순간, 수만 명의 관중과 함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그 짜릿한 전율은 소년들의 가슴에 평생 잊을 수 없는 유년기의 각인으로 남았다.
야구장에 직접 가지 못하는 날에는 신문의 박스 스코어를 들여다보며 경기 결과를 확인하거나 라디오 중계를 들었다. 라디오는 외야석 티켓을 살 돈이나 시간조차 없는 수많은 빈민층과 이민자들을 미국식 엔터테인먼트의 한복판으로 강력하게 끌어당겼다.


음악에서는 재즈라는 흑인들의 장르가 새로운 시대의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있었다. 토요일 밤이면 담배 연기로 가득 찬 동네의 작은 무허가 술집에서조차 흑인 재즈 밴드가 뜨거운 연주를 쏟아냈다. 코르셋의 굴레를 팽개친 채 단발머리를 흩날리는 신세대 여성들과,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헤친 말단 샐러리맨 청년들은 숨 막히는 색소폰 소리에 완전히 몸을 맡겼다. 무릎을 격렬하게 교차하며 추는 찰스턴(Charleston) 춤판이 벌어지면, 일주일 내내 공장과 사무실에서 켜켜이 쌓였던 서민들의 고단한 스트레스는 밤새도록 남김없이 부서져 내렸다.
뉴욕의 할렘이 화려하고 세련된 르네상스를 꽃피우고 있었다면, 중서부의 거대한 철도 교차로인 시카고는 훨씬 더 거칠고 노골적인 욕망이 들끓는 재즈 문화의 최전선이었다. 심장을 때리는 색소폰 소리에 맞춰 밤새도록 찰스턴 춤을 추는 젊은이들의 구두 굽 소리가 시카고의 지하 술집을 가득 채웠다.
뮤지컬과 영화로도 너무나도 유명한 작품 '시카고'는 딱 100년전 이 시기, 화려하게 피어나던 재즈 문화와 미국식 쇼 엔터테인먼트의 태동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https://www.youtube.com/shorts/cqNOGySi55c?feature=share
루이 암스트롱이 재즈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었고, 클래식과 재즈의 경계를 허물었던 조지 거슈윈의 음반은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축음기가 이미 서민 가정에까지 상당히 보급되어 있었기 때문에, 음반 산업은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미국 남부에서 올라온 재즈의 리듬이 저 멀리 뉴욕이나 시카고의 아파트 곳곳에서 축음기를 타고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다만 라디오 붐이 일어나면서 슬슬 축음기를 거실에서 밀어내기 시작했고, 전파를 타고 들어오는 음악과 드라마와 뉴스와 교양 프로그램이 거실의 공기를 바꾸고 있었다. 할부로 들여놓은 커다란 목재 케이스의 진공관 라디오 안테나를 통해 재즈 밴드의 연주를 듣는 것은 가족 모두를 하나로 묶는 마법이었다.

해가 지고 남편이 집으로 돌아오면, 저녁 식사는 가정의 에스닉 배경에 따라 달랐다. 이탈리아 가정이라면 파스타에 토마토 소스와 미트볼이 저녁이었고, 유대인 가정이라면 치킨 수프와 브리스킷, 독일계 가정이라면 소시지와 사워크라우트가 식탁에 올랐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용광로가 이 식탁들을 서서히 섞고 있었다. 아이리시 가정의 아들이 친구네 집에서 스파게티를 먹어 보고, 이탈리아 가정의 딸이 학교에서 피넛버터앤젤리 샌드위치를 처음 접하고, 모든 아이가 핫도그와 햄버거와 아이스크림을 좋아했다.


거실의 풍경은 서서히 라디오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었다. NBC와 CBS의 프로그램이 저녁 시간대를 채우고 있었고, 코미디와 드라마와 음악과 뉴스가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전파를 타고 들어왔다. 온 가족이 라디오 앞에 모여앉아 같은 프로그램을 듣는 것이 저녁의 의식이 되어 있었다.
남편은 라디오를 들으며 신문을 펼쳤을 것이다. '뉴욕 데일리 뉴스'가 타블로이드 시장의 왕이었고, 선정적인 기사와 사진으로 독자를 끌고 있었다. 타블로이드 전쟁의 시대였고, 범죄와 스캔들과 스포츠와 연예인들의 가십이 지면을 채우고 있었다.
19세기만해도 부르주아 가정의 상징물이었던 피아노가 이젠 대량생산 시대를 맞이하며 서민층에까지 내려와 있었다. 저녁 식사 후 딸아이를 피아노 앞에 앉히고 레슨으로 연습시킨 체르니를 연주하게 하는 것은, 당시 소시민들이 일종의 로망으로 품고 있던 문화적 허영이기도 했다. 실제 피아노 뚜껑이 열리는 날이 일주일에 단 하루뿐일지라도 상관없었다. 그 육중하고 우아한 악기가 우리 집 거실에도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체면이 서는 것이었다.
솜이나 스프링이 두툼하게 들어가 푹신한 오버스터프드(Overstuffed) 소파도 이 시기 미국의 거실에 놓여있는 단골 손님으로서 퇴근 후의 고단한 육체를 달래주었다. 이 거대한 안락함이 미국 전역의 평범한 아파트마다 보급될 수 있었던 것은 1920년대를 강타한 '우편 주문 카탈로그' 열풍 덕분이었다.
전화번호부 두께의 거대한 카탈로그는 서민들에게 마치 '꿈의 책'과도 같았다. 저녁이 되면 주부들은 소파에 앉아 카탈로그의 빳빳한 종이를 한 장씩 넘기며 황홀경에 빠졌다. 화려한 백화점 쇼윈도 너머로 구경만 해야 했던 잡지 속의 똑같은 거실 가구들을, 이제는 주문서 한장과 함께 할부계약서만 우편으로 부치면 며칠 뒤 집 앞까지 완벽하게 배달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온 가족이 다들 잠자리에 들 시간이 되어 전등을 끄면 집 안이 조용해졌다. 중앙난방을 갖춘 건물이 늘어나고 있었고, 지하실의 보일러에서 스팀이 올라와 라디에이터를 데우는 시스템이 미국 가정의 겨울을 바꾸고 있었다. 오히려 너무 더워서 한겨울에 창문을 여는 집도 있었다.
아직 석탄 난로에 의지하는 오래된 건물이라면 밤사이 불이 약해지면서 방이 식어 갔고, 이불을 끌어올리고 몸을 웅크리는 것이 새벽의 일이었다. 창밖에서는 가끔 울리는 경찰차와 앰뷸런스의 사이렌, 취객의 고함, 방음이 되지 않아 옆집에서 축음기 음악소리가 얇은 벽 너머로 새어들었다.
다음날 아침이면 모닝커피 한 잔으로 다시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었다. 개츠비의 화려한 파티장 뒤편에서 묵묵히 시대를 굴려가던 100년 전 소시민들의 고단하지만 활기찬 삶의 리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