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잠깐 들러 일본을 흘끗 본 사람들은 다 감탄한다.
너무나 친절하고 상냥한 일본에 대해.
나 역시 처음 일본에서 생활을 시작할 때는
정말로 일본인들이 너무너무 야무지게 친절한 것에 대해 감동했었다.
음식점이나 백화점에서 손님에게 보여 주는 그 상냥함과 친절함은 대단한 것이었다.
내게 보여 주는 그들의 따뜻한 미소가 어찌나 인상 깊었던지
내게 어떤 특별한 호감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물건을 사고 셈을 치르고도
웬지 그토록 곰살궂고 정이 찰찰 넘치게 맞아주는 종업원이
내 뒷모습을 내내 지켜 볼 것 같아 뒤를 돌아다 본 적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물건값을 치르고 돌아선 뒤에는 칼로 무 자르듯
나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새 손님을 향해 미소짓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일본인들은 아무리 칭찬해도 부족할 정도의 장사꾼이다.
자본주의 상업 사회에서 일본이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활개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일본의 상거래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돈을 가진 사람이 왕이라는 점이다.
일본인들은 흔히 '손님은 왕'하는 데서 한술 더 떠 '손님은 하느님'이란 말을 쓴다.
서비스업종에 관한 한 일본인들을 따라갈 나라는 세계 어느 곳에도 없을 것이다.
일본 종업원들이 열과 성을 다해서 보여 주는 서비스는 한마디로 예술이다.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한 듯 돈을 지불하는 사람의 '시간제 종' 노릇을 마다하지 않는다.
연신 굽신거리면서 황공해하며 어쩔 줄을 모른다.
물론 어지간한 음식점도 일단 손님 앞에서는 대단히 공손하다.
사근사근하게 손님에게 말을 붙이는 것은 물론 말 그대도 손님을 떠받든다.
나는 서비스가 상품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또 우리 나라 호텔의 레스토랑이나 당연히 고급 서비스를 기대할 수 잇는
고급 음식점에서 무례하고 형편없는 서비스를 받고
개인적으로는 불쾌한 기분을 억누른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처음 일본의 서비스업과 일본인 종업원의 친절을 대하며
'우리 나라도 어서 이렇게 되어야지'라는 생각을 했다.
일본의 수많은 문제와 편견 그리고 비인간성에 부딪히면서도
다만 서비스업만은 우리가 배워야지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러한 나의 생각은 취재를 갔던 프랑스 파리에서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친구와 함께 식사했던 중급 정도의 레스토랑이었다.
분위기도 좋고 옆 사람 음식을 흘끗 보니
음식맛이 괜찮은 식당이라는 것을 곧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웬지 모르게 마음이 편치 않고 한마디로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결국 속에 있는 것을 담아 두질 못하는 나는 내 친구에게 결국 내 속마음에 있던 말을 내뱉고 말았다.
"이 집 종업원, 왜 이렇게 태도가 뻣뻣하니?
우리가 손님인데 전혀 공손하지도 않고 말이야."
나로서는 그냥 무심코 한 말이었다.
그러자 내 친구가 나를 놀라운 듯 쳐다보는 것이었다.
"너 일본에 한 2 년 있더니, 사람이 못쓰게 변했구나.
저 사람은 여기서 음식을 날라다 주는 사람이야.
자기 할 일만 잘하면 되지
왜 저 사람이 너한테 괜시리 황공한척하고 굽실거려야 되니?
저 사람도 한 사람의 당당한 인간이야.
아무리 팁 몇 푼 쥐어 주고 한다고 웃음을 강요할 수도 없고 살 수도 팔 수도 없는 것 아니니?
나는 여기서 팁을 뿌리는 일본인들을 경멸했는데
어떻게 네가 그들과 똑 같은 발상을 할 수 있니?"
무슨 이야기든지 서로 할 수 있는 친구였기에
솔직히 말해 준 그에게 나는 커다란 부끄러움과 가벼운 충격 그리고 고마움을 느꼈다.
어느새 내가 그렇게 변해서 좁은 생각을 하게 되었나 하는 부끄러움은
결국 일본에 오래 있어서는 안되겠구나 하는 결론을 맺게 만들었다.
식사를 끝내고 나자 우리 자리로 웨이터가 와서 식사가 맛있었느냐,
즐거웠느냐며 만나서 기쁘다고 악수를 청했다.
그의 서비스에 감사하며 식당을 나오면서
나는 오랜만에 일본에서 느껴 보지 못한 신선한 서비스가 주는 기쁨을,
그리고 동등한 인간과 인간의 교류가 주는 서비스에 대해 어렴풋하게 알 것만 같았다.
일본의 경우 나의 사무실이 있던 NHK 건물 안의 구내 식당조차 철저히 상업주의(?)에 물들어 있었다.
다 같이 한 식구이건만 밥을 먹으러 오는 사람에게 큰 소리로
"이럇사미마세!(어서 오십시오)"라든가
"도모 아리가토오 고자이마시타!(대단히 감사합니다.)"라고 일일이 인사를 했다.
나는 처음 그 철저한 서비스 정신에 감동하였다.
그러나 2 년 반이 되도록 그 식당을 이용했지만 내가 들은 말은 위에 열거한 단 두 마디뿐이었다.
일본의 서비스는 완벽하다. 철저하다. 그리고 대단히 전문적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서비스는 철저하고 완벽하게 차갑고 비인간적이며 마음이 담겨 있지 않다.
식당의 일회용 서비스. 마치 기계같이 말하는 엘리베이터 걸의 서비스,
허리를 90도 씩 굽혀 마치 태엽 감긴 자동 인형처럼 하는 백화점의 인사는 참으로 일본적이다.
그리고 비인간적이다. 인간을 기계 취급하고 노예처럼 부리는 일본의 서비스.
일본에서 돌아올 무렵 나는 서비스가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좋은 서비스는 마음을 담는 것. 어떤 인간도 동등한 위치에서 보살핌을 받는 것.
그래서 나는 감히 일본의 서비스를 결코 최고의 서비스라고
정말로 친절한 서비스라고 말하지 않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1987년에 취재 때문에 싱가포르에 갔었다.
좀 무드 있는 곳에 가서 한잔 하자고 의기투합해,
싱가포르에 사는 교포의 안내로 찾아 간 곳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샹그리라 호텔 라운지였다.
온몸을 폭 감싸는 듯한 폭신한 소파, 호화로운 장식, 두툼하고 기분좋게 밟히는 카페트가
더위와 스트레스에 찌든 우리 취재팀을 위로하기에 충분했다.
우리에게 주문받으러 온 아기씨는
요철이 분명한 몸매를 차이나 드레스로 휘감은 미니사이즈의 팔등신 아가씨였다.
미인을 본다는 것은 여자인 나에게도 기분좋은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아가씨가 음료를 가져온 순간이었다.
그녀는 소파에 앉은 우리 앞에 무릎을 꿇고, 카페트에서 기듯이
한 사람 한 사람 앞에 술잔을 가져다 놓는 것이었다.
기가 막히고 기분이 나빴다.
우리를 안내한 그 교포는 워낙 일본 여행객이 많아서
일본식으로 서비스를 했더니 이곳이 싱가포르의 명소가 되었다고 설명했다.
서양인들에게도 이 호텔의 일본식 서비스가 대인기라고 한다.
무릎 꿇고 서비스를 하는 동양 여자를 보며
온갖 상상과 자만을 할 서양인들의 눈이 싫었고,
더욱 싫은 것은 바로 그런 가학적인 악취미의 서비스를 이 싱가포르까지 전파시킨 일본인들이었다.
기분이 잡친 것은 나뿐만 아니었던 듯,
같이 갔던 선배는 그 여자가 음료를 치우러 왔을 때
"무릎 꿇지 말고 서서 해요."라고 말해
나와 그녀를 기쁘게 했다.
나의 이러한 어렴풋한 기억이 일본에서 생활을 하면서
현실과 강한 고리를 연결시켜 주었다.
설마 했지만 무릎 꿇는 서비스가 현실인 것이 아직도 오늘, 일본의 현실이다.
술집은 물론 음식점, 하다 못해 우리 사무실에 복사기를 대여한 회사 직원들도
돈을 받으러 올 때 비서 아가씨에게 무릎을 꿇는 자세로 돈을 받아가는 것이었다.
내가 더욱 놀란 것은 일본 기자 클럽의 커피숍에서였다.
처음 그 커피숍에 일본 신문사의 정경부장들과 갔다.
일본기자 클럽은 각종 시설이 일본에서 드물게 부티가 나는 곳이었다.
주위를 둘러 본 순간 나는 대여섯 명의 제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아가씨들이
손님 앞에 무릎을 꿇고 차를 놓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순간 눈을 의심할 만큼 놀랐다.
일본의 술집에는 익숙해졌지만 어떻게 인간의 평등과 존엄을 위해
어쩌구저쩌구하는 기자들이 이런 서비스를 받으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나는 같이 온 기자에게 왜 이렇게 굳이 무릎까지 꿇어가며
서비스를 받아야 하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손님에 대해 예의를 나타내는 것이며 그렇게 무릎을 꿇어
더욱 더 공손하고 정중한 뜻을 나타내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였다.
원래 일본에서 무릎 꿇기는 '히자마즈리'라고 하여 일상 생활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행동이다.
그러나 그들의 일상 생활에서 서로 함께 무릎을 끓고 예의를 차리는 것과
술집, 음식점 그리고 찾집에서의 무릎 꿇기 서비스는
아무리 보아도 또 아무리 좋게 생각해봐도 인간에 대한 경시요,
유린이라고 밖에 달리 생각되지 않았다.
더구나 무릎을 꿇고 서비스를 하는 것은 언제나 여성이라는 점이
내게는 일본 땅에서 여자의 존재가
얼마나 무시되고 있는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