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시간 20분 43초. 지난 22일 대구 도심을 달린 국내 남자 엘리트 마라톤 풀코스(42.195㎞) 1위 기록이다. 함께 출발한 국제부 1위 탄자니아 선수(2시간 8분 11초)와는 12분 넘게 뒤처졌고, 국제부 여자 1위 케냐 선수도 2시간 19분 35초를 찍었다. 마라톤이 직업인 한국 남자 엘리트 선수 중 가장 빠른 기록이 외국 여자 선수보다 느렸다. 국제부 여자 2위인 에티오피아 선수도 한국 남자 선수들보다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다.
이 장면은 한국 마라톤이 세계 무대에서 경쟁력을 완전히 상실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국이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황영조)과 2001 보스턴 마라톤(이봉주) 우승자를 배출했다는 게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다. 남자 마라톤 한국 최고 기록은 2000년 세운 2시간 7분 20초인데 무려 26년 동안 깨지지 않고 있다. 기록 경신은커녕 최근엔 2시간 10분 이내에 완주하는 선수도 찾기 어렵다. 한때 아시아 마라톤 강국 자리를 놓고 경쟁하던 일본은 거침없이 기록을 단축해 최근 5년 새 2시간 4분대 기록까지 나왔다.
문제는 마라톤 저변이 약해서가 아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마라톤 공화국’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일반인의 관심이 높다. 전국 곳곳에서 매년 수백 개의 마라톤 대회가 열리고, 풀코스 출전자가 1만명을 넘는 대회도 적지 않다. 1990년대 10여 개에 불과했던 실업팀은 현재 90개 안팎으로 폭증했다. 선수들의 체격과 훈련법, 러닝화 같은 장비도 이전과는 몰라보게 좋아졌다. 그런데 기록은 왜 후퇴만 하는가?
엘리트 선수들의 경쟁 구조가 망가진 것이 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시즌마다 상위권 선수들이 ‘A 대회는 누구, B 대회는 누구’ 식으로 ‘교통정리’하듯 출전할 대회를 정한다. 국내 상위 기록 보유자들이 치열하게 경합하는 장면을 보기 어려운 이유다. 당연히 레이스의 긴장감은 떨어지고, 기록 향상의 동기도 사라진다. 마라톤 대회마다 1·2위 선수가 바뀌지만 경쟁으로 새 얼굴이 등장하는 게 아니라 우승 나눠 먹기만 반복되는 식이다.
보상 체계는 더 심각하다. 전국체전과 국내 대회 입상이 실업팀 입단과 연봉 계약을 좌우하는 까닭에 국제 기록 개선은 뒷전이다. 선수들은 세계 무대에 어울리는 기록을 내기보다 고만고만한 국내 대회에서 선방하고 생존하는 데만 급급하다. 이게 무슨 엘리트 선수인가. ‘육상직 공무원’으로 조롱당해도 싸다.
한국 마라톤 선수들의 기량이 갈수록 퇴보하다 보니 이제는 엘리트와 마스터스(일반인)의 구분 없이 한 무대에서 경쟁해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실제로 작년 춘천마라톤에서 남자 엘리트 우승자와 마스터스 우승자의 기록 차이는 1분 37초에 불과했다. 엘리트가 마스터스의 추격을 체감하고, 마스터스가 엘리트의 등을 보며 달리는 이 구조가 서로에게 긍정적인 자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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