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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가 집에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갑다”는 말이 있습니다. 조부모에게 손자녀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예쁜 존재지만 종일 함께 있다 보면 체력적으로 지치기 마련입니다. 에너지를 무한 방출하는 작은 생명체와 몇 시간만 있어도 진이 다 빠지는데 육아를 전담하게 된다면 어떨까요? 치열하게 자식들 키워 시집 장가 다 보내고 이제야 자유의 몸이 된 부모님이 또다시 육아에 발이 묶이게 됩니다.
“아이고 날 죽여라.”
셋째를 임신했다는 친구 A의 고백에 그의 친정엄마가 내뱉은 첫마디였습니다. 딸이 새 생명을 갖게 됐다는 기쁜 소식에 어떻게 축하보다 한탄이 먼저 나왔을까요. A는 워킹맘이었고, 그가 회사에 출근한 내내 A의 엄마가 아이들을 돌봤습니다. 20~30대도 체력적으로 힘든 육아를 60대 할머니가 도맡았습니다. A가 퇴직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키워야 할 아이가 3명이 된 만큼 더더욱 회사를 그만둘 수는 없었습니다.
저희 엄마도 황혼육아의 대표 주자입니다. 엄마는 ‘신생아 킬러’라고 불릴 만큼 아기를 끔찍이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둘째인 제 동생에게서 첫 손주가 태어났을 때 엄마는 동생 집에서 지내며 함께 아기를 키웠고 둘째 손주가 태어났을 때도, 그리고 저에게서 셋째 손주가 태어났을 때도 모든 신생아 육아를 함께 했습니다. “몸은 힘들어도 예쁜 아기를 보면 엔도르핀이 나와서 정신이 몸을 이긴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엄마의 몸은 졌습니다. 엄마는 최근 이유 없이 급격한 체중 감소를 겪었고 자가면역 질환을 진단받았습니다.

최근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발표한 ‘가족 내 손자녀 돌봄 현황과 정책방안 연구’에 따르면 10세 미만 손자녀를 돌보는 만 55~74세 조부모 중 53%는 “손자녀 돌봄을 원하지 않는데 자녀 사정 때문에 거절하기 어려워 어쩔 수 없이 돌봄을 수행하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체력적으로 힘들다는 의견이 가장 많았고(72.1%) ▲자신을 위한 시간 부족(64.8%) ▲손자녀를 돌보다가 다치거나 병이 나거나(45.4%) ▲아파도 병원에 갈 시간이 없어서 못 간 경험(42.8%) 등이 뒤를 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46.8%가 ‘돌봄 중단’을 생각한 적이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조부모들이 자신들의 몸을 갈아가며 손주를 전담해 돌봐야 하는 이유는 ‘부모가 퇴근하기 전까지 아기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가 압도적입니다. 결국 맞벌이 가정이 늘어난 현실이 조부모를 육아에 끌어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해 말 방송된 KBS 2TV 예능 프로그램 ‘말자쇼’에서 개그맨 김영희는 황혼육아에 대한 고민을 방청객들과 함께 나눴습니다. 이날 ‘워킹맘’인 딸을 대신해 3살 손주를 돌보고 있다는 한 할머니는 “딸이 둘째도 맡아달라는데 이민이라도 가야 할까 고민”이라며 부담감을 호소했습니다.
김영희는 “차라리 밖에서 더 위험하고 힘든 일 하는 게 낫다. 육아는 열 번 잘해도 한 번 잘못하면 구박받는다. 그것만큼 서러운 게 없다”면서 “그렇기에 보수를 꼭 드려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조부모 절반은 무보수로 돌봄 노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월 단위로 정기적인 대가를 받는 노인은 34.6%, 비정기적으로 받는 노인은 17.3%에 불과했으며 월평균 77만 3000원을 받았습니다. 조부모가 적정하다고 생각하는 돌봄수당은 월평균 107만원입니다.
지자체에서 손자녀를 돌보는 조부모에게 지급하는 수당은 20만원에서 30만원 수준이고 이마저도 자격 요건이 되지 않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연구원은 “돌봄의 책임을 가족에게 전가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공적 돌봄 서비스의 양적·질적 수준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부모가 모두 일을 하면서도 육아가 가능한 사회가 만들어질 때 조부모도 손주를 웃으며 맞이할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