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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영국 엘리자베스1세 여왕의 생애 (역모로 죽을뻔한 공주 시절, 결혼하라는 압박, 이웃나라의 라이벌 여왕, 사자의심장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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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1.29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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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를 낳은 어머니 앤 불린은 빼어난 미모와 총명한 머리로 왕비까지 올라간 입지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녀와 헨리8세 사이의 딸인 엘리자베스도 어머니를 쏙 빼닮은 비상한 두뇌를 물려받았습니다. 남편에 의해 처형당한 왕비가 세상에 남기고 간 어린 공주는 인형놀이 대신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고전을 탐독했습니다.

 

 

"내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면, 내 머릿속에 든 지식만이 나를 지켜줄 것이다."

 

 

열 살 무렵의 엘리자베스는 이미 성인 학자들과 대등하게 토론할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그럼에도 철저히 자신을 낮추며 누구에게도 자신의 속마음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부왕인 헨리 8세가 세상을 떠나고, 어린 남동생 에드워드 6세가 왕위에 올랐을때도 마치 그림자처럼 숨을 죽이며 살았습니다.

 

 

진짜 위기는 어머니 이전에 첫번째 왕비였던 캐서린의 소생인 이복 언니, '피의 메리(Mary I)'가 즉위하면서 찾아왔습니다. 메리 1세는 이복 동생의 혈관에 흐르는 앤 불린의 피를 증오했습니다.

 

 

"너도 네 어미처럼 요망한 말로 백성들을 홀리려 하느냐?

네가 반역자들과 결탁했다는 증거만 나오면, 네 목도 네 어미의 것 옆에 놓이게 될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언니의 서슬 퍼런 칼날 아래서도 아주 정중하고도 모호한 화법으로 빠져나갔습니다.

 

 

"저는 오직 전하의 충성스러운 신하입니다. 제 신앙은 오직 전하와 같습니다."

 

 

살아남기 위한 정치적 연기였습니다. 그녀는 야심을 숨긴 채, 거대한 폭풍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며 준비된 군주로서의 성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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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운명은 그녀를 기어이 어머니가 처형당했던 그 곳, 런던탑의 차가운 돌바닥으로 불러들이고 있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무장한 병사들에 둘러싸인 채 템스강의 좁은 배에 올랐습니다. 배가 향한 곳은 '반역자의 문(Traitors' Gate)'. 오직 죽어서만 나갈 수 있다는 런던탑의 악명 높은 입구였습니다. 배가 탑의 축축한 계단에 닿았을 때, 엘리자베스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빗물에 젖은 돌계단을 뚫어지게 노려보며 외쳤습니다.

 

 

"나는 반역자가 아니다! 나는 영국의 왕녀이며, 이 땅의 그 누구보다 충성스러운 신하일 뿐이다!"

 

 

18년 전, 어머니 앤 불린이 똑같은 문을 통해 들어와 다시는 나오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녀의 심장을 옥죄었습니다. 탑 내부의 공기는 얼음처럼 차가웠고, 이복 언니 메리 1세의 감시자들은 밤낮으로 그녀를 심문했습니다.

 

 

"와이엇의 반란군과 무슨 서신을 주고받았느냐? 네가 여왕이 되려 했다고 사실대로 자백해라!"

 

 

엘리자베스는 며칠을 굶고 잠을 자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결코 틈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예리한 법률적 지식을 동원해 증거가 없는 혐의들을 조목조목 반박했습니다. 그녀는 침묵과 모호함이라는 가장 강력한 방패를 휘둘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감옥의 좁은 창살 너머로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쳤습니다. 마찬가지로 반역 혐의로 갇혀 있던 어린 시절의 동창생, 로버트 더들리였습니다. 두 사람은 죽음의 문턱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무언의 약속을 나누었습니다. 차가운 돌담 너머로 전해지는 작은 온기, 그것은 엘리자베스가 평생 잊지 못할 단 하나의 사랑이자 지독한 고독의 시작이었습니다.

 

"여왕 폐하, 엘리자베스 공주를 죽이지 마십시오. 증거도 없이 왕녀를 처형한다면 백성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입니다."

 

 

측근들의 만류와 엘리자베스의 끈질긴 결백 주장 덕분에, 메리 1세는 결국 처형 서류에 서명하지 못했습니다. 두 달 뒤, 엘리자베스는 런던탑에서 풀려나 우드스톡 성에 연금되었습니다. 탑을 나서는 그녀의 등 뒤로 햇살이 비쳤지만, 그녀의 눈은 이미 예전의 소녀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죽음의 공포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인내'라는 무기를 완성했습니다. 상대가 누구든, 상황이 어떻든, 자신의 목에 칼날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절대 본심을 드러내지 않는 무서운 통치자의 기질이 깨어난 것입니다.

 

 

1558년 11월의 어느 날, 우드스톡의 정원에서 책을 읽고 있던 엘리자베스에게 한 무리의 기사들이 달려왔습니다. 그들은 말에서 내려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여왕 폐하께서 승하하셨습니다. 이제 당신이 영국의 새로운 여왕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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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는 라틴어로 나직하게 읊조렸습니다. "이것은 주께서 하신 일이니, 우리 눈에 경이롭도다." 엘리자베스는 황금빛 가운을 걸치고 왕좌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왕관의 무게는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선대 여왕 메리가 남긴 영국은 파산 직전이었고, 가톨릭과 개신교의 갈등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았습니다. 의회와 대신들은 입을 모아 여왕을 압박했습니다.

 

 

"폐하, 여자의 몸으로 이 거친 나라를 홀로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하루빨리 훌륭한 남편과 혼인하여 왕국을 물려 줄 후계자를 생산하셔야 합니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 프랑스의 왕족들, 오스트리아의 대공들... 유럽의 내로라하는 권력자들이 엘리자베스의 손을 잡기 위해 앞다투어 구혼장을 보냈습니다. 그들에게 영국은 여왕이라는 부록이 딸린 탐나는 영토일 뿐이었습니다.

 

가장 먼저 손을 내민 것은 형부였던 스페인의 펠리페 2세였습니다. 그는 가톨릭 제국을 지키기 위해 영국을 다시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려 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그를 '가장 소중한 형제'라 부르며 정중한 편지를 보냈지만, 정작 만남은 차일피일 미루었습니다.

 

 

"폐하, 스페인 왕이 답변을 재촉합니다."

 

 

비서관 윌리엄 세실의 말에 엘리자베스는 부채를 부치며 여유롭게 미소 지었습니다.

 

 

"세실, 기다림은 구혼자를 더 애타게 만드는 법이라오. 스페인을 붙잡아두어야 프랑스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것이고, 프랑스 왕족들과도 대화의 여지를 두어야 스페인이 영국을 무시하지 못하겠지."

 

 

프랑스 앙주 공작과 수년간 연애 편지를 주고받으며 결혼할 것처럼 굴다가도, 막판에는 의회의 반대를 핑계로 교묘하게 빠져나갔습니다. 결혼이라는 카드는 그녀에게 가장 강력한 외교적 무기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녀에게 구혼자들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영국의 안전을 보장하는 '외교적 인질'들이었습니다.

 

 

마침내 의회가 공식적으로 결혼을 종용하자, 엘리자베스는 대관식 때 받았던 금반지를 손가락에 끼운 채 그들 앞에 섰습니다. 그녀는 창백하지만 단호한 얼굴로 역사에 남을 선언을 던졌습니다.

 

 

"나는 이미 남편과 결혼했습니다. 나의 남편은 바로 '영국 왕국'입니다. 내가 죽었을 때 내 묘비에 '한 평생 여왕으로 살다 처녀로 죽었노라'라고 적힌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좌중은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여자가 국가를 남편으로 삼겠다는 선언은 전대미문의 사건이었습니다. 남자에게 권력을 나눠주는 대신, 영국 전체를 통치하는 군주로서의 힘을 독차지하겠다는 고도의 정치적 선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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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왕의 가슴 한구석에는 비밀스러운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런던탑에서 생사를 함께했던 로버트 더들리였습니다. 여왕은 그를 '나의 눈(Eyes)'이라 부르며 곁에 두었고, 무도회에서 오직 그와 춤을 추었습니다.

 

 

1560년 9월, 영국의 모든 시선이 더들리의 저택 '커너 홀'로 향했습니다. 더들리의 아내 에이미 롭사트가 계단 아래에서 목이 부러진 시체로 발견된 것입니다.

 

"더들리가 여왕과 결혼하려고 아내를 죽였다!"

"여왕이 그 살인을 묵인했을지도 몰라!"

 

추잡한 소문은 들불처럼 번졌습니다. 엘리자베스는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충직한 비서관 윌리엄 세실은 문밖에서 간청했습니다.

 

"폐하, 영국의 안녕을 저버리실 겁니까? 로버트 더들리와 거리를 두셔야 합니다. 그것만이 폐하의 명예를 지키는 길입니다."

 

 

엘리자베스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창백한 얼굴을 보았습니다. 어머니 앤 불린이 사랑 때문에 어떻게 파멸했는지, 아버지가 욕망을 채우기 위해 나라를 어떻게 뒤흔들었는지 그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문이 열리고 여왕이 나타났습니다. 그녀는 눈물을 닦아내고 그 어느 때보다 차가운 통치자의 눈빛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로버트 더들리에게 나직하지만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로버트, 내가 그대의 아내가 되는 순간, 나는 한 남자의 소유가 되어 그대에게 복종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영국의 여왕으로 남기로 결심했다. 그대를 사랑하지만, 영국을 더 사랑하노라."

 

 

그녀는 자신의 '처녀성'을 신비로운 통치 도구로 활용하며, 스스로를 성모 마리아에 대치되는 '지상의 여신, 글로리아나'로 보여지길 원했습니다. 이제 그녀는 사생활이 없는 여자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모든 말과 몸짓은 오직 영국의 안정을 위해서만 존재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북쪽 국경 너머, 또 다른 매혹적인 여왕이 그녀의 왕좌를 노리며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바로 북쪽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스튜어트였습니다. 메리는 엘리자베스와 정반대의 인물이었습니다. 훤칠한 키에 눈부신 미모를 가진 메리는 프랑스 왕비로 살다 귀국한 '적통 중의 적통'이었습니다. 가톨릭 세력은 사생아 엘리자베스 대신,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메리 스튜어트가 영국의 진정한 여왕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메리는 대담하게도 자신의 문장에 영국의 왕관을 그려 넣었습니다. 이는 엘리자베스에게 정면으로 도전하는 선전포고였습니다.

 

"스코틀랜드의 그 계집이 감히 내 왕관을 탐낸단 말이지?" 엘리자베스는 거울을 보며 자신의 붉은 머리카락을 정돈했습니다. "그녀는 아름답고 혈통도 고귀하지만, 단 하나가 부족하구나. '인내'라는 무기 말이다."

 

 

여왕은 메리에게 편지를 보내 "우리는 자매와 같다"며 다독였지만, 물밑으로는 스코틀랜드의 반란군을 지원하며 메리의 입지를 좁혔습니다. 그럼에도 메리 스튜어트라는 폭풍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결국 메리가 스코틀랜드에서 일어난 반란에 떠밀려 잉글랜드로 도망쳐 오던 날, 엘리자베스는 평생을 함께할 숙명의 라이벌을 자신의 영토 안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것은 영국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으나, 동시에 자신의 손에 피를 묻혀야만 하는 비극의 서막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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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8년, 스코틀랜드의 반란군을 피해 국경을 넘어온 메리 스튜어트는 엘리자베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자매여, 같은 여왕의 처지로서 나를 보호해 주시고 나의 왕좌를 되찾아 주소서."

 

 

엘리자베스는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메리를 스코틀랜드로 돌려보내자니 잉글랜드까지 밀고 내려올 반란군이 두려웠고, 그렇다고 그녀를 환대하자니 잉글랜드 내 가톨릭 반란의 구심점이 될 것이 뻔했습니다.

 

 

"메리를 성안에 가두되, 여왕의 예우를 해주어라. 하지만 결코 그녀가 런던 근처로 오게 해서는 안 된다."

 

 

메리 스튜어트는 이후 19년 동안 영국의 여러 성을 전전하며 유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두 여왕은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평생 단 한 번도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자베스는 메리가 가진 위태로운 정열을 경계했습니다.

 

"메리는 감정의 노예구나. 왕관을 쓴 자가 어찌 사랑 때문에 나라를 버린단 말인가?"

 

엘리자베스가 국가와 결혼하여 자신을 절제하는 동안, 메리는 끊임없이 비밀 서신을 보내며 반역을 꾀했습니다. 그녀는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 가톨릭 귀족들에게 "엘리자베스를 죽이고 나를 왕위에 올려달라"고 호소했습니다.

 

 

엘리자베스의 충직한 눈과 귀였던 프랜시스 월싱엄은 여왕의 침실 머리맡까지 파고드는 암살 음모를 낱낱이 파헤쳤습니다.

 

"폐하, 메리 스튜어트가 살아있는 한 폐하의 목숨은 매일 위협받을 것입니다. 저 독사를 처단해야 합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망설였습니다.

 

"그녀는 나의 친척이자, 한 나라를 다스렸던 왕이다. 여왕이 여왕의 목을 치는 전례를 만든다면, 훗날 내 목 또한 안전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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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는 메리를 미워하면서도, 그녀를 죽임으로써 발생할 정치적 파장과 도덕적 비난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월싱엄은 끈질겼습니다. 그는 메리가 반역 모의에 직접 가담했다는 결정적인 증거, 이른바 '바빙턴 음모'의 서신을 가로채 여왕의 책상 위에 올려두었습니다. 그 서신에는 엘리자베스의 암살을 승인하는 메리 스튜어트의 친필 서명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제 선택의 여지는 없었습니다. 메리가 살아있는 한 영국 내부의 가톨릭 반란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냉혹한 현실 때문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덮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고독한 방에서 중얼거렸습니다.

 

 

"자매여, 그대는 왜 나에게 이토록 잔인한 결정을 내리게 만드는가."

 

 

2월 8일, 포더링게이 성에서 메리 스튜어트의 목이 떨어졌습니다. 처형 소식이 런던에 전해지자 엘리자베스는 예상 밖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녀는 기뻐하기는커녕 검은 상복을 입고 사흘 동안 통곡하며 식사를 거부했습니다. 그것이 진심 어린 슬픔이었는지, 아니면 '여왕을 죽인 여왕'이라는 도덕적 비난을 피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연출이었는지는 오직 그녀 자신만이 알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슬퍼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메리 스튜어트의 처형은 잠자던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격이었습니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격노했습니다.

 

 

"사생아 여왕이 가톨릭의 성녀를 죽였다! 이제 영국을 정벌하고 가톨릭의 깃발을 꽂을 정당한 명분이 생겼다."

 

 

유럽 최강의 국력을 자랑하던 당시 최강대국 스페인의 함대들이 영국을 지도에서 지워버리기 위해 리스본 항구를 떠났습니다. 130척의 거대 군함과 수만 명의 정예 병사들은 당시 영국의 국력으로는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거대한 재앙이기도 했습니다. 유럽을 호령하던 펠리페 2세의 '무적함대'가 수평선을 가득 메우며 다가왔을 때, 영국인들은 그것이 세상의 종말이라 믿었습니다.

 

 

영국 전체가 공포에 질렸고 대신들은 여왕에게 안전한 내륙으로 피신할 것을 권했으나 8월 9일, 틸버리 해안에 집결한 영국군 앞에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화려한 가운을 벗어던진 엘리자베스가 눈부신 은빛 갑옷을 입고 백마를 탄 채 나타난 것입니다. 그녀는 떨고 있는 병사들 사이를 누비며 사자를 닮은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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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충성스러운 백성들이여! 누군가는 내가 여자이기에 안전한 곳으로 피하라고 충고했소. 하지만 나는 여러분과 함께 살고, 함께 죽기 위해 이 자리에 왔소.

나는 비록 연약한 여자의 몸을 가졌으나, 나의 심장만큼은 사자의 것과 같소!"

 

 

여왕의 연설은 병사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습니다. "글로리아나! 여왕 폐하 만세!"라는 함성이 해안가를 뒤흔들었습니다. 바다 위에서는 영국의 운명을 건 도박이 시작되었습니다. 영국의 배들은 스페인의 거대 전함에 비해 턱없이 작았지만, 훨씬 빠르고 영리했습니다.

 

 

해적 출신의 제독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어둠을 틈타 기름을 가득 채운 배에 불을 붙여 스페인 함대 사이로 흘려보내는 '화선(火船) 전술'을 펼쳤습니다. 전쟁의 결과는 기적이었습니다.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처참하게 궤멸했고, 작은 섬나라 영국은 단숨에 바다의 새로운 주인으로 떠올랐습니다.

 

 

승전보를 들은 엘리자베스는 무릎을 꿇고 신께 감사 기도를 올렸습니다. "신께서 바람을 보내셨고, 적들은 흩어졌도다." 그녀는 이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여인이 되었고, 영국은 대항해 시대를 주도하는 황금기로 진입했습니다. 하지만 세월의 화살은 여왕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거울 속의 여왕은 점차 야위어갔고, 그녀는 자신의 노쇠함을 감추기 위해 더욱 두꺼운 흰 화장을 하고 화려한 가발을 썼습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여전히 '영원한 처녀 여왕, 글로리아나'라 칭송했지만, 그녀의 주변은 그 어느 때보다 적막했습니다.

 

 

평생의 동료들이 하나둘 그녀 곁을 떠났습니다. 충직한 조언자 윌리엄 세실이 눈을 감았고, 무엇보다 그녀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남자 로버트 더들리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더들리가 죽기 직전 보내온 마지막 편지를 엘리자베스는 보석함에 넣고 '그의 마지막 편지(His last letter)'라고 적어두었습니다. 평생 국가를 위해 사랑을 희생했던 여인이 간직한 유일한 사치였습니다.

 

"나의 몸은 늙어가나, 영국은 더욱 젊어지고 있구나. 그것으로 되었다."

 

노년의 엘리자베스는 여전히 위엄이 넘쳤습니다. 그녀는 의회에서 자신의 마지막을 예감한 듯 전설적인 연설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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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러분의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해 왕관을 쓴 것이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을 보호하고 사랑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있었습니다. 나보다 더 여러분을 사랑할 군주는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1603년 3월, 여왕은 마침내 자리에 누웠습니다. 그녀는 침대에 눕기를 거부하고 며칠 동안 쿠션 위에 앉아 버텼습니다. 마치 자신이 잠드는 순간 영국의 운명이 멈추기라도 할 것처럼 말입니다. 대신들이 조심스럽게 후계자를 물었을 때, 여왕은 기력이 다한 목소리로 스코틀랜드의 제임스(자신의 라이벌이었던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를 지목했습니다. 자신의 숙적이었던 여인의 아들에게 왕좌를 물려주는 이 기묘한 역사의 아이러니를, 여왕은 초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1603년 3월 24일 새벽, 영국의 위대한 별이 졌습니다. 그녀가 남기고 간 영국은 셰익스피어의 문학이 꽃피고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기틀이 마련된 '황금시대'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그녀는 이복언니 메리 1세와 같은 묘소에 잠들었습니다. 묘비에는 이런 글귀가 적혔습니다.

 

"권좌에서도, 무덤에서도 함께하는 두 자매, 부활의 희망 속에 여기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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