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운동으로 옥고 뒤 현실정치 투신
'무패의 7선'·'실세 총리'·'민주 진영 20년 집권론' 명성
DJ부터 이재명까지 4번의 민주당 정권 출범 '키맨'

25일 별세한 이해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은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최전선에서 시작해 국무총리와 7선 국회의원을 지내기까지, 한국 민주 진영의 굴곡진 현대사를 몸으로 관통한 인물이었다. 유신체제에 맞선 학생운동가에서 여권의 핵심 전략가이자 당 대표에 이르기까지 그의 정치 여정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성장 과정과 궤를 같이했다.
이 수석부의장은 1973년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며 정치적 삶을 시작했다. 서울대 사회학과 재학 중 학생운동에 투신한 그는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돼 1년 가까이 옥고를 치렀다. 1980년에는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기소돼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당시 재판정에서 그는 "이 목숨 다 바쳐 이 땅이 민주화될 때까지 싸워나가겠다. 당신들이 저지르고 있는 역사적 범죄를 결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외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혹독한 고문과 수감 생활 속에서도 그의 민주화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육군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시절 김대중 전 대통령, 문익환 목사 등 재야 인사들과 교류하며 민주화에 대한 확신을 더욱 굳혔고, 1982년 성탄절 특사로 풀려난 뒤에도 재야 운동을 이어갔다.
1987년 6월 항쟁 당시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황실장을 맡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내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그는 훗날 "1987년까지는 민주화의 꿈을 좇았고, 그 이후에는 민주적 국민정당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고 회고했다.
같은 해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낙선한 뒤 평화민주당에 입당한 그는 1988년 13대 총선에서 서울 관악을에서 민주정의당 김종인 후보를 꺾고 국회에 입성했다. 이후 관악을에서만 17대 총선까지 내리 5선을 지냈다.
1988년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청문회에서는 계엄군의 민간인 학살을 집요하게 추궁하며 '면도날'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노동 입법에도 적극 나서 노무현 전 대통령, 이상수 전 의원과 함께 '노동위 3총사'로 불렸다. 1995년에는 민선 1기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1998년에는 김대중 정부 초대 교육부 장관을 맡았다.
고교 평준화 확대 등 교육 정상화 정책을 추진했다는 평가와 함께, 야간 자율학습 폐지에 따른 학력 저하 논란도 동시에 뒤따랐다. 이 시기 '이해찬 세대'라는 말이 회자되기도 했다.
2002년 대선에서는 새천년민주당 중앙선대위 기획본부장을 맡아 노무현 후보의 당선을 뒷받침했고, 2003년에는 열린우리당 창당을 주도했다.
이듬해 고건 전 총리에 이어 노무현 정부의 두 번째 국무총리로 임명됐다. 노 전 대통령과 '맞담배'를 피울 정도로 가까운 사이로 알려지며 '실세 총리'로 불렸다. 노 전 대통령은 그를 두고 "천생연분", "정말 유능하다"고 평가한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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