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갓신라
"내가 듣건대 지금 민간에서는 기와로 덮고 짚으로 잇지 않으며, 숯으로 밥을 짓고 나무를 쓰지 않는다고 하니 사실인가?"라고 물었다. 민공이 "신도 역시 일찍이 그와 같이 들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강왕 6년(880) 9월 9일
중국 해안의 맞은편은 신라와 그 부속 도서들을 제외하곤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라크인과 기타 외국인들이 정착하여 그곳을 조국으로 삼았다. 그들은 깨끗한 물, 비옥한 토지, 이익과 수입의 증대, 광물질과 보석류의 풍부함 때문에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그곳을 떠난 자는 극소수다.
이라크인 마수디, 《황금 초원과 보석 광산》
신라는 유쾌한 나라다. 모함마드 자카리야 라지는 "누구나 이 땅에 들어가면 살기 좋으므로 정착해 떠나려 하지 않는데 그건 자원과 금이 풍부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오로지 하나님(알라)만이 그 진실을 안다.
자카리야 카즈위니, 《나라들이 남긴 발자취》
당시 서라벌은 국제도시였다. 처용 등으로 대표되는 페르시아나 기타 먼 지역 상인 집단이 거주한 흔적이 보이고, 원성왕릉 석상이나 중동에 지금도 남아있는 신라 관련 기록이나 지도, 쿠시나메 이야기 등에서 당시 신라가 외국과 활발히 교류한 무역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장보고가 한중일을 연결하는 허브 기지로서 청해진을 건설하여 동아시아의 해상교역을 장악한 시기도 이 때이다. 장보고나 신라삼최, 혜초 등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유학 등 국제 인적 교류도 상당히 활발했다.
신라 정부도 유학생의 책값과 체류비를 지원하고 유학 경력자가 귀국하면 관리로 특별 채용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 주변의 국제 정세가 당, 일본, 발해로 정립되어 자리잡고 있던 데다 신라 자체의 군사력도 상당했었기에 200여 년 동안 외적의 침입도 흔치 않았다.
경제적으로도 매우 융성하여 당시 기록에 따르면 수도 금성에서는 비가 오는 날 집들의 처마 밑만 따라 걸어도 비 한방울도 맞지 않고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다. 헌강왕 때에 이르면 민가는 모두 기와로 덮고 숯으로 밥을 지었다고 한다.
세계사적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당대 아랍인, 페르시아인들조차도 신라에 와 보고는 고향보다 더 살기 좋아서 영구 정착, 아예 눌러앉으려 했다고 그들의 지리서에 기록했다. 기록들에서 일관적으로 서술된 내용에 따르면 실제로 정착한 무슬림도 적지 않았던 모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