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관 가야 왕인 구형왕은
나라가 신라에게 정복당하면서
신라의 진골 귀족으로 편입된다.
이후 그 아들인 김무력은
미친 수준의 무력으로 이름값 제대로 하며
당대 최고의 장군으로 이름을 날리며
신라 사회의 주류 귀족층으로 편입에 성공한다.

그러나 신라 서라벌의 주류 귀족계인 경주 김씨 카르텔에게
김무력의 가야왕실 김해 김씨 가문은
어디서 굴러들어온 돌이자
근본도 없는 개뼉다구 취급만을 받을 뿐이었다.
그냥 이름만 명예 진골 수준으로,
그 누구도 이 가문을 신라 귀족으로 취급해주지도 않는다
그 와중에 김무력에게 아들이 태어나니
그가 바로 신라의 금태양 김서현이다.
(이 스토리의 남자주인공)

한편 진흥왕의 동생이자 신라의 왕자였던
김숙흘종 역시 딸이 있었으니
바로 만명공주이다.
(신라는 왕의 딸이 아니라 조카딸도 공주라고 불렀다.)
김만명은 그야말로 다이아수저라
신라의 왕족이자,
왕비도 될 수도 있는 골든 블러드였다.
정리하면 김만명은 이전 왕인 진흥왕의 조카이자,
현재 왕인 진평왕의 여동생이라는 지체높은 공주님
게다가 왕자인 김숙흘종 일가는 성골로서
골품제에 따르면 김해 김씨의 진골보다 격이 한단계 높은 집안이었다.

만명공주는 왕자인 아버지와 함께 당연히 서라벌에 사는 특권을 누렸고
김서현도 아버지 김무력을 따라 서라벌로 올라오게 된다.
군인출신 집안인 김해 김씨 가문답게
김서현 역시 말을 잘타고 풍채가 건장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공주님 김만명은
거친 야전에서 단련된 금태양 김서현을 보고 뻑이 가게 된다.
자 근데 여기서 문제가 있다.
1. 고대에는 귀족층간의 연애결혼은 전무하고, 가문간의 이익에 맞는 정략 결혼이 다수
2. 김만명은 성골로서 여자이지만 신라 왕통까지도 계승할 수 있는 신분
3. 김서현은 망국의 왕손이며, 전쟁 영웅 일가이지만, 그 누구도 이들을 신라 정통 귀족으로 취급 X
4. 즉 김서현과 김만명은 큰 신분 차이가 나는 가문
5. 성골은 성골 끼리, 진골은 진골끼리만 결혼이 가능
즉 이 둘의 만남은 법적으로도, 신라 귀족계의 분위기적으로
절대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것이다.
김서현과 김만명은 귀족계 결혼의 필수인 중매도 서지 않고
서로 연애를 시작하고 심지어 선을 넘는데
기록에서는 둘이 야합했다고 순화했는데
음.... 아시겠죠...?
그것도 결혼도 하기 전에!!!

신라 귀족계의 어르신이자
왕위를 계승할 수도 있는 김숙흘종은
딸이 족보도 없는 망국의 자손과
붙어먹었다는 걸 알고는 기가 차게 된다.
즉 전근대 신분사회에서 정복국의 공주님이
망국의 왕손과 야합(...)했다는 게 신라 귀족계에 알려지면
가문까지도 ㅈ될 판국
그래서 김숙흘종은 딸인 김만명을 집 별채에 감금하고
김무력을 불러 아들 간수좀 똑바로 하라고 한다
이에 김무력은 아들 김서현을 만노군
현재의 충북 진천으로 보내버린다.

김만명은 별채에서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는 소식을 듣자
울면서 히키모코리가 된다.
그러던 어느날 폭풍우가 일어나서 별채 문이 박살나는 사건이 생긴다.
이 틈을 노려 김만명은 말을 타고 충북 진천까지 도망가
김서현과 재회한다.
▶골치 덩어리
종일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항아리로 퍼 붇는 것 같은 비는 그칠 기색이 없다. 숙흘종(肅訖宗)은 요즘 딸 만명(萬明) 때문에 근심이 그칠 날이 없었다.
하인들이 전하는 바로는 딸이 금관가야 왕족 출신 김서현(金舒玄)과 은밀히 만나며, 함께 잠자리까지 하는 것 같다는 소문이다.
김서현은 금관가야 왕족출신으로 신라에 투항해 신분을 보장받은 ‘준’ 귀족집안의 자식이긴 하지만 신라의 정통귀족들은 이를 은근히 차별했다.
정치적 배려와 정략적 계산으로 그들에게 ‘진골’ 타이틀을 달아주었으나 사실상 그 아래 등급인 6두품 취급을 했다.
숙흘종은 불미스런 소문이 계속되자 화를 참지 못하고 딸을 창고에 가두어 버렸다.
몰래 먹을 것을 넣어주다 주인에게 들킨 하녀는 “물만 넣어주고 다른 건 일체 주지도 말어”라며 버럭 소리치는 숙흘종의 고함에 그만 엉덩방아까지 찢고 말았다.
▶“우리 도망가요”
‘번쩍’ ‘번쩍’ ‘우르릉 쿵쾅’...
새벽녘에는 천둥번개가 어찌나 울려대던지 숙흘종은 은근히 딸이 걱정됐다.
“아침에는 눈물이 쏙 빠지도록 단단히 야단치고 꺼내 주어야겠다”
이렇게 마음먹고 잠이 들었다. 그런데.....
“큰일 났습니다. 아가씨가 없어졌습니다”
창고 문을 열었던 하인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한 달음에 달려 간 숙흘종의 눈에 조그만 개구멍이 보였다.
큰 비로 약해진 지반 때문에 벽 밑에 생긴 틈을 무엇으로 파냈는지 구멍을 내고 ‘앙큼한 딸년’이 도망을 가버린 것이다.
그 시각…
겁 없는 연인들은 이미 서슬 퍼런 숙흘종의 눈을 피해 경주에서 멀리 벗어나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소?” 근심이 가득한 김서현이 물었다.
“뭘 어떻게 해요? 그냥 멀리 도망가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당돌한 대답이 돌아온다.
‘나 참! 내가 만나는 여인이지만 이렇게 당차고 겁이 없을 수가 있나?’
김서현은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공주님과 낮은 계급의 망국의 왕손간의 결혼, 즉 귀천상혼으로
신라 서라벌 귀족계는 큰 파장이 인다.
김숙흘종은 딸 김만명을 호적에서 파내 절연했고
갈 곳이 없던 김만명은 김서현과 정식으로 결혼한다.
지금으로 치면 웬 대기업 계열사 아들과
대기업 재벌 총수 딸이 중매도 없이 야반도주해서 동거하다가 결혼한 셈
▶금빛 갑옷의 동자
충북 진천은 지금은 우리나라 중남부에 속하지만 당시(서기 590년) 신라로서는 위험한 북쪽 국경지대였다.
진흥왕 시절 확보했던 많은 영토를 다시 빼앗겨 고구려와 국경을 맞대고 작은 전투가 끊이지 않던 접경지대였던 것이다.
경주에 비하면 시골이요, 변방이었으나 만명은 김서현과 함께라는 사실만으로 너무나 행복했다.
어느 날 아침, 만명은 간밤에 꾼 태몽을 남편에게 들려주었다.
“어제 밤 금빛 갑옷을 입은 아이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와 품안에 안기는 꿈을 꾸었습니다. 하늘이 귀한 자식을 주시려 나 봅니다”
만명은 신라 진평왕 17년(서기 595년) 진천에서 아들을 낳았다.
부부는 첫 아들의 이름을 '유신'이라고 지었다.
▶준엄한 어머니 만명
유신이 태어난 후, 아버지의 마음도 많이 누그러졌다.
아버지는 외손자를 그렇게 귀여워 할 수 없었다.
결국 용서를 받은 만명과 김서현은 진천에서 다시 서라벌(경주)로 돌아왔다.

아무튼 김서현과 김만명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니
바로 신라 최고의 전쟁기계이자 삼한일통의 주역인 김유신이다.
거기에 어쨌든 신라 중앙귀족계와 장인어른에게 인정받기 위해
김서현은 백제와 여러 번 싸워 승리해
서라벌로 개선 행진까지 하게 된다.
김서현은 김숙흘종의 집으로
김유신과 김만명을 데리고 가서, 용서와 인정을 구한다.
어쨌든 전공을 세워 당당히 서라벌에 개선가를 올린 사위와
귀여운 손자 얼굴을 보고 화가 풀렸는지
김서현을 사위로 인정하게 된다.
나중에는 김서현의 정치적 뒷배가 되어주는 등
진짜 아침 드라마급 전개가 이어지는 실화이다.
김서현은 아들만큼은 아니지만 꽤 굵직한 공을 많이 세웠고
그로 인해 드디어 신라 중앙 귀족계에 정식으로 편입되게 된다.
그리고 아들인 김유신도 엄마가 성골이라 왕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데
아버지 피가 어디 안가는 지
나중에 김춘추와 혼인사기극 찍을 때도 아버지 김서현 유전자가 여지 없이 드러난다ㅋㅋㅋㅋ

결국 해피엔딩으로 끝나긴 했지만
딸내미 문희 역시 자신처럼 금지된 사랑을 나누다가
화형당해서 죽을 뻔한 일까지 겪었던걸 생각하면
만명공주의 삶도 참 공교롭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도 문희도 결국 엄마처럼 사랑을 이뤄내고
결국 왕후까지 올라가는 해피엔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