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신, 정치가, 군인이었다. 집채만한 바위를 드는 용력과 술을 동이째 거푸 비우는 호방함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문과 급제까지 한 문무 겸전이었다. 한명회의 측근으로서 계유정난 때 공신으로 출세해 세조(조선) 즉위 때 공으로 좌익공신에 올랐고 예조판서를 거쳐 이시애의 난 때 무려 우의정, 영의정까지 지낸 세조의 총신이었다. 입버릇처럼 자신이 주상의 벗이라 말해도 왕이 허물하지 않고, 조선 법도로는 말도 안될 중혼을 해 정실을 둘이나 두고도 세조가 웃어 넘겼다고 한다. 인산부원군에 올라 위평공의 시호가 내려졌다.
홍윤성은 권세를 휘두르며 세간의 비난과 손가락질에도 불구하고 행패를 부렸고, 남이 베풀어준 호의는 아랑곳 않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패악질을 해댔다. 집 앞에 말을 타고 가는 것조차 용납하지 못해, 반드시 감시해 말 타고 지나가는 이를 두들겨 패 죽이게 했다. 참고로 홍윤성의 신분으로 보아 당시 홍윤성은 한양에서 살던 게 확실시되는데, 당시 한양도성 내에서 말을 타고 다닐 수 있는 사람은 양반밖에 없었다. 즉 같은 양반들에게도 패악질을 저지를 만큼 막나갔다는 것이다.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죽이고 논밭을 탈취해서, 야사에서는 홍윤성을 아예 살인마 정승이라 불렀을 정도.
한 행각들이 그야말로 찬란한데 키워준 숙부 죽이기, 양반 딸이어도 납치 강간하기, 재산 뺏기 등이 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조는 제대로 벌 준 적이 없음 이 사람이 공신들 끼고 돈 것중 최상이 이 홍윤성 끼고 돈 것일 정도...
위에 언급한 죄명은 양반이어도 큰 문제가 될 사안이었지만 싸랑하는 윤성이를 위해서 덮음
세조 사후 예종, 성종 때는 위세가 꺾이기는 했어도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만 50세에 병으로 죽었는데, 죽기 전에 의원들이 가망이 없다고 하자 의원들에게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니다"라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죽기 전 정신 차린다는 건 해당 안 되는 사람이었음
사후엔 그래도 죗값이 따라다녔는지 홍윤성의 핏줄은 끊겼으며 결국 자손을 1명도 남기지 못했다. 봉사손도 없었는데, 회인 홍씨 가문에서도 홍윤성의 악명과 숙부를 죽인 패륜 때문에 홍윤성의 봉사손을 배출하기를 꺼린 듯하다. 그래서 제사상 차려줄 양자자손도 없음
홍윤성이 쓴 글은 모조리 불태워졌으며 그나마 유일하게 남아있던 성주군 세조대왕태실비문도 세조와 홍윤성에 대해 원한을 품은 백성들이 비문을 돌로 찍고 갈면서 비문이 지워졌기 때문에 판독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다만 당시 비문의 내용 자체는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홍윤성에게 원한이 있던 사람들이 홍윤성의 무덤에 와서 비석을 깨부수고 침을 뱉었지만 아무도 제지하지 않고 내버려둬서 성종이 홍윤성을 치하하며 세운 묘비문이고 뭐고 남아있던 게 없었다고 한다. 정확히는 묘비문과 신도비는 마멸되어 해석이 불가능하게 된 데다 부인의 묘비는 깨져 있었다고 한다. 한참 뒤에야 조정에서 죽은 이에게 너무하다고 다시 묘비문을 세웠지만 그마저도 관리가 안 되었으며, 현재는 부여군 향토유적 제49호로 지정되어 있지만 무덤에 오줌을 눈 사람까지 나타났고, 2003년 3월 13일에는 무덤 앞에 있는 장명등 이 도난당하고 20년 넘게 행방불명 상태가 되는 등 홍윤성의 무덤은 오늘날에도 배척받는 상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