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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유신정권 당시 \'통일혁명당 재건위 사건’에 연루돼 17년간 옥살이를 한 고 박기래씨의 유족들이 2023년 5월18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박씨 재심 상고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뒤 만세를 외치고 있다. 왼쪽부터 고 박기래씨의 손녀 정지연, 사위 정한주, 부인 서순자, 장남 박창선, 차남 박형남씨. 연합뉴스
박정희 유신정권의 대표적 공안조작 사건인 ‘통일혁명당(통혁당) 재건위 사건’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수사기관의 수사내용 유포로 피해자가 간첩으로 보도돼 유족들의 명예가 훼손됐다’며 위자료를 대폭 증액해야 한다는 항소심 판단이 나왔다. 피해자의 불법 구금과 고문 등으로 유족이 입은 직접적 피해뿐만 아니라 ‘간첩의 가족’으로 낙인 찍은 국가의 명예훼손 행위도 위자료 산정에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고법 민사17-3부(재판장 안승훈)는 통혁당 재건위 사건 주범으로 몰려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된 고 박기래씨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 항소심에서 “국가가 박씨 유족에게 총 13억2000만원의 위자료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고 23일 밝혔다. 판결이 선고된 지난 20일에는 아흔이 넘은 몸으로 휠체어를 탄 박씨의 부인 서순자씨와 장남 박창선씨가 직접 법정에 나왔다.
박씨는 1974년 북한 지령을 받고 통혁당을 재건하려 했다는 혐의로 보안사령부에 강제 연행돼 불법 구금과 고문, 허위 자백 강요 등 가혹 행위를 받다가 기소돼 이듬해 사형을 선고받았다. 17년 동안 수감됐다가 감형돼 1991년 출소한 박씨는 2012년 세상을 떠났다. 박씨 유족은 2018년 12월 서울고법에 재심을 청구했고, 2023년 5월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박씨에게 사형이 선고된 지 48년 만이었다.
재심 무죄 확정 뒤 박씨 유족은 “서씨에게 11억, 자녀 3명에게 각 3억원씩을 배상하라”며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14부(재판장 정하정)는 지난 4월 아내 서씨에게 약 4억원, 자녀 3명에게 각각 1억6400여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박씨 유족은 이에 ‘국가의 명예훼손으로 인한 배상 책임도 추가로 인정돼야 한다’며 항소했다. 당시 국방부가 발행한 일간지 ‘전우신문’에는 박씨와 부인 서씨의 사진과 함께 ‘박씨가 간첩활동을 하다가 검거됐고, 서씨는 이를 인지하고도 당국에 알리지 않은 간첩 불고지 혐의로 검거됐다’는 내용이 나왔다. 이는 일간지 두 곳에도 보도됐다.
항소심 재판부는 유족 주장을 받아들여 서씨의 배상액은 1심보다 2억원을, 자녀 3명은 각 8000만원씩을 증액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해당 기사는 수사 내용을 유포해 보도된 것으로 볼 수 있고 혐의자를 특정한 혐의사실 기재와 사진, 구체적인 인적사항까지 포함하고 있어 명예를 훼손했다고 인정하기에 충분하다”며 “정신적 손해를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자녀 3명의 직접적인 명예훼손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당시 미성년자에 불과했던 원고들이 본인 의지와 무관하게 지역사회에서 ‘간첩의 자녀’로 낙인찍힐 수밖에 없었으므로 손해배상액 산정에 참작한다”고 밝혔다.
서씨 등 유족들은 판결 직후 한겨레와 만나 “원 사건 당시 군 보안사뿐 아니라 대한민국 검찰이 합작해 고문·폭행·가혹행위에 의한 허위자백으로 조작 기소해 잘못된 판결을 만들었다”며 “재판부는 사과와 위로를 했지만 피고 대한민국은 한번도 반성이나 사과 없이 재판 과정에서도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다시는 국가의 이런 행태가 반복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