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남들이나 다른 가족 구성원한테는 그러지 않으면서 유독 딸에게만 일방적 '공감 능력'을 요구한다고 힘들어하는 딸들이 많다. 다른 곳에서는 똑부러지는 모습을 보이던 딸들도 가족 내 최고 권위자이자 '효' 사상이라는 한국 최고의 윤리적 당위를 등에 업은 부모들의 비난이나 실망에는 예민해져 부모의 리액션 셔틀이 되어버리곤 한다. 막상 딸들 입장에서는 전혀 반갑지 않은 이런 한국식 '딸 선호' 트렌드의 문제는 크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 번째로는 이 '공감'이 건강한 범주가 아니라는 것이다. 건강한 종류의 공감은 명백히 서로 독립성을 인정하는 두 개인이 상대방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공감 능력이 높은 딸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부모는 대개 강한 나르시시즘을 가지며, 나르시시스트가 원하는 공감이란 상대방이 자신의 부속품이 되는 것을 말한다.
공감은 상대방의 의견에 덮어놓고 찬성하고 복종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그 둘을 동일시한다. 자식이 부모에게 공감한다면 부모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다 해 줄 것이라고,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은 낮은 자율성, 학습된 무기력, 착한아이 증후군, 노예 근성 등을 높은 공감 능력으로 사기 포장해놓은 것에 불과하다.
두 번째로는 '공감 능력' 때문에 딸을 선호하는 이들은 딸의 기능을 좋아할 뿐이지 딸의 존재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의 기성세대 부모의 딸 상찬에는 대개 딸이 공감 능력이 높아 자신들을 잘 보살펴 준다는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예전 시대의 남아 선호 사상에도 아들이 부모의 노후를 책임져 줄 것이라는 현실적 기대가 포함되어 있기는 했으나, 그래도 남아 선호 사상에는 아들이 '대를 잇는다', '그저 든든하다'는 존재론적 이유 역시 상당한 지분을 차지했다. 여아 선호와 남아 선호의 결정적 차이가 여기에 있다. 여아 선호에는 남아 선호처럼 존재 자체에 대한 선호가 없다.
다시 말해 현재 한국 중장년층 이상이 '딸이 좋다'고 말할 때, 그것은 딸의 '기능'이 좋다는 것이지 딸의 '존재'가 좋다는 것이 아니다. 기능은 존재와 달리 대체 가능한 것이며, 혹여나 대체가 쉽지 않다고 해도 존재에 대한 애정과 그 성질이 같을 수는 없다. 우리가 냉장고의 기능에만 관심이 있지 냉장고의 행복에는 관심이 없는 것과 같다. 남들에게는 딸을 자랑하기 바쁜 부모가 막상 딸에게는 함부로 하는 이유도 이것이다. 무뚝뚝해서, 표현을 못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딸의 기능만 좋을 뿐 딸이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호감이 없기 때문에 잘해주고 싶은 생각이 안 드는 것이다.
밖에서는 전혀 씨알도 안 먹힐 자기만의 세계관을 가장 만만한 자식에게, 특히 딸에게만 세뇌시키는 경우도 많다. 밖에서 무시당하니까 필사적으로 한 명이라도 자신의 수족으로 만들기 위해 더 그러기도 한다. 이런 세상의 일부가 된다는 것은 사이비 종교 조직에 들어가는 것과 비슷하다. 가까운 사이라는 이유로 이런 이상한 종교의 1인 신도가 되어주면 시간이 갈수록 본인의 정체성과 사고방식이 망가지고 나아가 사회 생활도 망가진다.
환경이란 무서운 것이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 되지' 하면서 아무리 분별력을 가지려고 해도 수십 년에 걸쳐 끊임 없이 틀린 말을 듣다 보면 세뇌당하는 경우가 많다. 도움 되는 짓만 하고 살아도 쉽지 않은 인생에서 왜 그런 손해 나는 짓을 하고 사는가? 본인이 환경 영향 안 받는답시고 꾸역꾸역 역풍을 견디는 것은 숭고한 노력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을 내면화한 노예근성이다. 그러니까 가족이든 누구든 억지로, 일방적으로 공감해주려고 할 필요는 없다. 사람의 감정도 엄연히 개인의 귀중한 자산이자 권리이며 함부로 요구하는 것은 선을 넘는 짓이다.
(공감의 자매품으로 리액션 역시 마찬가지로 함부로 해주지 말아야 한다. 영혼 없는 리액션도 마찬가지. 누군가가 당신의 감정을 손쉽게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그때부터 당신은 셔틀 노릇이 당연한 존재가 되며 존중받을 수 없다.)
출처: https://dirtmentalist.tistory.com/177 [흙멘탈리스트:티스토리]
2023년에 포스팅한 글인데 지금 읽어도 유의미해보여 가지고 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