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벨기에의 귀족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1958년 가톨릭 사제가 된 그는 당시 가난한 나라였던 대한민국에 해외선교사제로 파견갈 결심을 하고, 그 이듬해 부산항에 발을 디뎠다.
천주교 전주교구에 배속된 그는 전주시 전동성당의 보좌신부로 발령받았다. 그러다 1961년 7월, 인사이동으로 부안성당 주임신부가 되어 부안군으로 떠나게 되었다. 거기서 그는 형편이 어려운 농민들을 돕고자 30만 평에 이르는 땅을 간척하게 하고 간척에 참여한 농민들에게 그 땅을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어렵게 일구어 낸 땅들은 고리대와 노름을 통해 부자들에게 넘어가고 말았고, 이를 보며 지 신부는 분통이 터져 '다시는 한국인들의 삶에 개입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고 한다.
그러나 1964년 척박한 산골 동네 임실군에 위치한 임실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한 뒤, 다시 농민들을 대면하자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서 조금만 개입할 생각으로 풀밭이 많은 임실에서 자라기 쉬울 산양을 길러 산양유를 생산하였으나, 당시 한국에서 산양유란 낯선 식재료였기에 잘 팔리지 않고 남은 것이 버려지자 그 젖으로 산양유 치즈를 만들 생각을 하였다. 곧 이를 더 크게 벌여 군민들의 삶을 돕자는 생각을 떠올렸고, 벨기에 본가의 부모로부터 2천 달러를 받아 허름한 치즈 공장을 세웠다.
1968년 까망베르 치즈[를 만들고, 1970년 체다치즈를 만들다가, 70년대 서울에 피자가게가 생기면서 1972년 모짜렐라 치즈를 만들게 되었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제대로 된 치즈 공장도 없던 시절에 임실 치즈는 서울의 특급 호텔에 납품될 정도로 유통망을 넓혀갔다. 후에 지 신부는 이 치즈 공장의 운영권, 소유권을 모두 주민협동조합에 넘겼다.
지 신부는 한국의 민주화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970년대 박정희 정부의 유신체제에 항거하여, 다른 외국인 선교사들과 함께 저항운동을 하였다. 이 때문에 인민혁명당 사건 관련 시위 중에 체포되어 국외 추방 위기까지 갔으나, 당시 외신의 눈과 치즈 산업 육성에 이바지한 그의 공적을 인정했는지 추방 명령은 집행되지 않고 경찰에게 감시받으며 사는 정도로 끝났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때는 시민군과 광주시민들에 제공할 우유를 차에 싣고 홀로 광주에 갔다가 참상을 목격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피로 누적 탓인지 1970년대부터 지 신부의 오른쪽 다리에 다발경화증이 발병했다. 몸의 신경을 조금씩 마비시키는 병 탓에 결국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되었다. 3년간 고국 벨기에로 돌아가 휴양 겸 치료를 받고, 1984년에 한국으로 돌아와 중증 장애인을 위한 재활센터인 '무지개 가족'을 전주 인후동에 설립하였다. 지 신부는 "내가 아프게 되었으니 이제 그들의 고통을 함께 짊어질 수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
2004년 일선 사목에서 은퇴해 후임 신부에게 물려준 후 '무지개장학재단'을 설립해 선종 때까지 운영하였다. 2016년에는 한국의 치즈 산업 발전과 민주화 기여 등 그간의 공로를 인정하여 정부가 대한민국 국적을 특별 부여했다.
이후 2019년 4월 13일 오전에 숙환으로 선종했다. 향년 87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