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 에이머리 (1912 - 1945)
1912년 영국 런던에서 금수저로 태어났는데 이 사람 아버지가 보수당의 유력한 정치인이었던 레오 에이머리라는 사람이었어.

레오 에이머리 (1873 - 1955)
해로우 스쿨 (명문 학교로 유명함) 수년간 전교 1등을 차지했고 힌디어 포함 9개의 언어를 구사함. (여기서 처칠이랑 알게됨)
옥스포드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타임즈지에서 기자로 일 하다가 정치에 입문.
해군성 장관, 식민지 국무장관, 인도와 버마의 장관등을 역임하기도 함.
보다시피 아빠였던 레오 에이머리는 엄친아였는데 장남인 존 에이머리는 어렸을적부터 개노답이었는지 개인 교사들도 하나같이 "가르치는게 불가능하다"같은 평을 남김. 이렇게도 노답이었지만 아빠찬스로 해로우 스쿨에 진학하지만 교장한테도 "무슨 이런게 다 있나" 같은 평을 들으며 일년만에 학교를 떠남.

시간이 흘러 21살이 된 존은 우나 윙이라는 전직 창녀와 결혼함. 당연히 부모 허락 따위는 구한 적이 없기 때문에 부모들은 뒷목 잡고 난리남.
학교도 안 나온 한량이라서 항상 부모에게 재정적 지원을 요구했고 받은 돈으로 영화 제작사도 몇번 차렸지만 딱히 재능이 있지는 않았는지 모두 망하고 본인도 파산신청을 하게 됨.
그리고 파산한것도 모자란데 파시즘과 나치즘에 빠져버려서 아예 1936년에는 유럽 대륙으로 건너가서 스페인 내전때는 프랑코쪽에 자원해버림. 거기서 훈장도 받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프랑스에 정착함.
1939년에 결국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1년 뒤엔 프랑스도 나치 독일에 침공 당함. 애초에 나치빠였던 "영국인" 존 에이머리는 좋다고 나치 부역자가 되겠다고 함.
(같은 시기에 아빠 레오 에이머리는 같은 보수당의 체임벌린 총리의 나치 독일에 대한 유화책을 극렬하게 반대했고 1940년 노르웨이가 독일에게 넘어갈때도 소극적으로 대응한 체임벌린에게 "당신은 하는 일에 비해 그 자리에 너무 오래 있었다. 이제 제발 물러가라!" 라고 올리버 크롬웰이 한 말까지 인용하며 결국은 재신임 투표까지 끌어낸 강경론자였어)
아빠가 뭘 하든 말든 아들은 개노답이었기 때문에 좋다고 나치한테 찬동하면서 영국군 포로들이 있던 수용소에서 독일군 입대를 권유하며 투어도 돌았지만 군인들한테 거의 무시당함.
전쟁중에도 나치의 프로파간다를 영어로 라디오로 송신하거나 팜플렛을 쓰기도 함.

하지만 시간이 흘러 1945년 4월 결국 이탈리아에서 파르티잔들에게 잡혀 영국군에 넘겨짐.
영국으로 송환된 존은 반역죄로 기소당함.
재판 준비 기일에는 자신은 영국을 공격한적이 없고 자신은 나치가 아니라고 변명했어. 변호사와 아빠는 심신미약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음.
1945년 11월 재판 첫날에 본인의 주장을 바꿔서 반역죄를 저지른것을 인정한다고 말 함. 판사가 죄를 인정하면 사형밖에 없다는것을 알고있느냐라고 묻자 알고있다고 대답하자 8분만에 재판은 끝나고 사형 판결을 받음.
3주 뒤인 1945년 12월에 교수형 집행으로 사망함.
존의 사망 후 영국의 유명인 백과사전에서 레오 에이머리는 자신의 항목에서 아들 2명이 있다는 부분을 1명으로 고쳐달라고 했다고 함.
그리고 레오 에이머리의 모친 (존 에이머리의 할머니)는 헝가리 출신의 유태인이었음. 존 에이머리는 할머니가 유태인이었다는걸 몰랐다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