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성 | 논설위원
‘인간 김건희’에 관한 가장 큰 오해는 한때 ‘쥴리’라는 가명으로 활동했던 술집 종업원 출신이라는 의심이다. 그는 2022년 대선 전 인터뷰에서 “쥴리를 하고 싶어도 (바빠서) 시간이 없었다”고 했는데, 아무리 습관성 거짓말쟁이라 해도 이 말만은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김건희가 쥴리라고 폭로하는 인터뷰와 기사를 면밀히 보면, 오히려 그가 술집 종업원 출신이 아니라고 확신하게 된다.
조남욱 당시 삼부토건 회장이 베푼 연회에서 ‘쥴리’를 만났다고 주장한 안해욱 전 대한초등학교태권도연맹 회장은 조 회장이 김건희를 ‘김 교수’라고 불렀다고 증언한다. ‘쥴리’라는 예명을 사용했다고 해서 유흥업계 종사자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조남욱과 김건희는 각자의 필요(접대보조·인맥확장)에 따라 연회를 주최하고 참석하는 호혜적 관계였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논문을 표절해 학력을 세탁하고, 경력을 위조해 교수 행세를 한 이유 역시 상류사회 네트워크 진입을 위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김건희는 실제로 바빴을 것이다.
김건희가 윤석열 이전에 사귄 남자로 알려진 ‘고위급 검사’의 경우, 검사가 김씨의 스폰서가 아니라, 반대로 김씨가 검사의 스폰서였다는 증거가 있다. 김건희는 해외 유학 중인 검사의 처자식에게 돈을 보냈고, 엄마 최은순을 대동해 셋이 함께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송금과 여행 모두 2004년에 있었던 일로, 최은순과 동업을 했다가 수익금 배분은커녕 무고죄 누명을 쓰고 징역을 살아야 했던 정대택과 한창 소송전을 벌일 때다. 검사를 상대로 로비를 하고 대가를 지급한 것으로 봐야 한다. 김건희는 접대부가 아니라 가족 비즈니스의 로비스트이자 법조 브로커였다.
사법피해자 정대택 사건의 본질은 김건희가 쥴리냐 아니냐가 아니라,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뀐 법조비리였다는 데 있다. 하지만 ‘쥴리 의혹’에 성형수술 논란이 얹히면서 ‘여성혐오’ 프레임에 갇혀버렸고, 말초적인 이슈로 소비되면서 공적 의제가 되지 못했다. 정대택의 피눈물 나는 사연은 유튜브 기반의 신생 매체와 인터넷 언론의 취재로 세상에 알려졌다. 기성 언론은 사실상 침묵했다. 그 대가는 윤석열의 대통령 당선이었다. 기성 언론이 적극적으로 사실을 검증하고, 방향을 제대로 잡았다면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김건희 일가가 법조 권력을 활용해 축재에 성공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만, 검사에 비해 판사가 한 일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정대택을 무고죄로 법정구속 했던 판사가 최은순씨와 밀접한 관계로 알려진 동업자 김아무개와 공동으로 토지를 사들인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기도 했다. 최은순이 불법 요양병원 운영 혐의로 1심에서 법정구속 됐다가 2심에서 무죄로 뒤집힐 당시의 판사와 변호인이 모두 윤석열의 사법연수원 동기였고, 특히 판사와 변호인은 서로 같은 대학을 나와 근무연도 여러번 겹치는 특수 관계였다. 윤석열의 그림자가 느껴지는 전관비리 의혹이다.
이와 관련하여 최은순의 유명한 어록이 있다. “돈 싫어하는 판사 보셨습니까?” 정대택의 중학교 친구였지만, 큰돈을 주겠다는 최은순에게 속아 정대택을 배신하고 허위 증언을 했던 고 백윤복 법무사가 죽기 전 검찰에 제출한 범죄자수서에 나와 있는 말이다. 정대택을 포함해 최은순의 사법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세명의 사건에 등장하는 검사와 판사만 수십명이다. 가히 조직범죄 수준이다. 정대택씨가 재심을 준비하고 있다는데, 재심에서 이긴다 해도 20여년 동안 받은 고통을 무엇으로 보상할 수 있을 것인가.
12일 영장심사에서 김건희는 구속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드러난 증거로 보아 범죄의 소명 정도가 상당하고, 혐의 하나하나가 위중하다. 거짓과 말 바꾸기로 일관해 증거인멸의 우려 또한 높다. 지귀연 판사 같은 ‘확신범’이 아니라면 영장을 발부하지 않을 수 없다.
박근혜 국정농단에 견줘 규모와 죄질이 압도적인데도 윤석열-김건희 부부 단죄가 힘겹고 더딘 이유는 이들이 수십년을 갈고닦은 법 기술로 무장한 부패 법조권력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법은 공동체가 쓰러지지 않도록 떠받치는 골격인데, 체제의 골수까지 바이러스가 퍼져 있다. 지금도 어디선가 또 다른 최은순·김건희가 제2, 제3의 정대택을 만들고 있을지 모른다. 진정한 내란 청산은 법을 다시 공정하게 세우는 작업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반칙과 협잡이 불가능하도록 투명한 공개와 시민의 참여를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판결문 공개부터 배심제까지, 이름하여 사법민주화의 길이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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