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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 딸 죽음 27년 직접 추적한 '아버지의 전쟁' [정락인의 사건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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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14 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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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조씨(76)는 '대구 여대생 살인 사건'으로 알려진 정은희양의 아버지다. 1998년 10월16일 계명대학교 간호학과 1학년에 재학 중이던 딸 은희양은 학교 축제에 갔다가 이튿날 구마고속도로(현 중부내륙고속도로)에서 숨진 채 발견된다. 경찰은 단순 교통사고라고 결론 냈으나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았다. 은희양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면 다량의 출혈이 있어야 하지만 현장에는 혈흔이 없었다. 시신에는 속옷이 없어진 채 겉옷만 입혀져 있었고, 약 30m 떨어진 가드레일 아래에서 일부 속옷이 발견됐다.

이런 의문에도 경찰은 처음부터 수사 의지가 없었다. 딸의 죽음이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니라고 판단한 정씨는 생업을 접은 채 직접 증거를 모으고 사건 관련자들을 만나 진술을 들었다. 이때부터 딸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기 위한 아버지의 전쟁이 시작된다. 세월이 흘러 당시 40대이던 정씨는 이제 70대 중반의 노인이 됐다. 지난 27년간 딸을 죽이고 그 죽음을 은폐한 자들과 싸운 것이다. 

정씨는 최근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책 《아빠의 전쟁》(위트출판사)을 펴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지금이라도 재수사가 시작되고 다시 재판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대체 누가 왜 여대생 정은희양의 죽음을 덮으려고 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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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들이 사고 현장 인근에서 속옷 찾아내

대구 남구 대명시장에서 채소가게를 운영하던 정현조씨는 반찬가게도 내면서 1남3녀의 자녀들을 열심히 뒷바라지했다. 큰딸과 둘째 딸은 쌍둥이 자매였다. 그해 10월17일 아침 정씨는 가게문을 열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때 경찰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는데 큰딸인 은희양이 병원에 있다는 것이었다. 하던 일을 멈추고 아내와 함께 병원으로 달려가서 마주한 것은 딸의 싸늘한 주검이었다. 학교 축제에 간 줄 알았던 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가족들은 큰 충격을 받는다. 

은희양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23톤 덤프트럭 운전기사이자 사고 당사자인 최아무개씨(당시 52세)였다. 최씨에 따르면 17일 새벽 5시10분쯤 구마고속도로 하행선 7.7km 지점을 달리다 무단횡단하던 여성을 치었고, 곧바로 119에 신고를 접수했다. 119 구급대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경찰의 신원조사 결과 사망자는 은희양으로 확인됐다. 최씨는 경찰에서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차 앞에 뭔가 갑작스레 튀어나왔고, 급브레이크를 밟았으나 피할 수 없었다"고 진술했다.

그런데 경찰이 수상했다. 처음부터 수사에 소극적이었고, 범죄가 의심되는 점이 한둘이 아닌데도 단순 교통사고로 몰아갔다. 은희양이 덤프트럭에 부딪혀 사망했다면 출혈이 있어야 했지만 현장에서는 혈흔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부검 결과 이미 사망한 상태에서 자동차가 깔아뭉개고 지나갔을 수도 있다는 소견이 제시됐는데도 이를 무시했다. 또 시신에는 속옷이 모두 없어진 채 겉옷만 입혀져 있었다. 유족들이 은희양의 학교 동아리 친구들과 함께 사고 현장을 수색하다가 30m쯤 떨어진 가드레일 아래 도로 가장자리에서 속옷 중 팬티거들을 발견했다. 

담당 형사는 유족이 수거해 온 속옷을 보고 "젊은 아가씨들이 입는 팬티가 아니었고, 법의학 교수가 정액이 안 나왔다고 했다"며 감정을 미뤘다. 은희양의 쌍둥이 여동생은 언니와 똑같은 팬티를 같이 선물받았으므로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특히 사고가 난 곳은 학교에서 약 7km 떨어진 지점으로 주변에는 온통 공장뿐이었다. 은희양이 학교와 집에서도 먼 이곳에서 사고를 당한 것도 납득이 가지 않았으나 경찰은 은희양의 행적을 파악하지 않았다.

결국 경찰은 사건 발생 두 달 만에 은희양이 고속도로를 무단횡단하다가 일어난 단순 교통사고로 보고 서둘러 수사를 종결했다. 부검 감정서가 나오기도 전이었다.


정현조씨는 딸의 사망이 단순 교통사고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성폭행을 시도했거나 성폭행한 후 살해하고 사고사로 위장했다고 판단했다. 정씨는 이때부터 생업을 접고 딸의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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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만에 감정한 속옷에서 남성 정액 검출


정씨는 경찰 수사에 정식으로 이의신청을 제기했다. 그랬더니 경찰은 "교통사고가 아니라는 증거를 대보라"는 식의 답변을 했다. 부검 감정서를 요청했으나 "채소장사나 하면서 부검 감정서를 볼 줄이나 아느냐"면서 무시했다. 정씨는 경찰 수사의 문제점을 따져보면서 사건 당시 딸의 행적도 파악했다. 당시 계명대는 가을 축제가 한창이었다. 은희양은 10월16일 경찰행정학과가 주최한 '주막촌' 행사에 참석했다. 은희양은 학부생들과 어울려 술자리를 가졌다.

그때 경찰행정학부생으로 동아리 친구이자 남자친구였던 1학년 박아무개군(19)이 술에 취하자 은희양은 그를 집에 바래다주기 위해 밤 10시40분쯤 함께 교문을 나섰다. 20분 후인 11시쯤 박군은 학교 정문 건너 성서병원 앞에서 정신을 차렸지만 이때는 은희양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무선호출기로 은희양을 호출했으나 답이 없자 혼자 귀가한다.


박군은 경찰 조사 때 "교문을 함께 나선 이후 병원 앞에서 정신을 차릴 때까지 20분 동안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진술했다. 이후 교통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은희양을 본 목격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것을 근거로 보면 은희양은 16일 밤 10시40분부터 다음 날 5시10분까지 6시간30분 정도의 행적이 불분명하다. 정씨는 이때 딸에게 무슨 일이 생겼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씨는 재수사를 요구하며 끈질긴 싸움을 벌였다. 이를 위해 청와대 등 정부기관에 60여 차례의 진정·탄원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2005년 국과수에서 은희양의 팬티거들에 대한 감정을 진행했는데, 은희양의 것이 맞을 뿐 아니라 남자의 정액 성분도 검출됐다는 결과가 나왔다. 

덤프트럭 운전자 최씨와 남자친구인 박군의 DNA와 대조했으나 두 사람과는 일치하지 않았다. 제3의 인물이 개입된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경찰은 은희양이 성폭행을 당했다는 근거가 부족하다며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사건 발생 15년 후인 2013년, 드디어 은희양의 속옷에서 발견된 DNA와 일치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피의자는 의외의 인물이었다. 사건 당시 대구 성서공단 외국인 노동자였던 스리랑카인 A씨(사건 당시 33세)였다. 그가 경찰에서 진술한 당시 상황은 이렇다.

사건 당일인 10월16일 산업연수생 신분으로 성서공단에서 일하던 A씨 등 외국인 노동자 3명은 밤 10시가 넘어 일을 마치고 귀가하고 있었다. 이때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은희양을 발견하고 욕정이 생겼다. 이들은 은희양을 납치한 후 자전거에 실은 다음 구마고속도로 굴다리 밑으로 끌고 가 집단 성폭행했다. 이후 은희양의 현금과 학생증 등을 빼앗은 후 사라진다. 

경찰은 A씨의 동료 외국인 노동자들로부터 "'술 많이 마신 여자가 길에 넘어져 있었다고 했고, 어디 다리 밑으로 데려가서 성폭행했다는 그런 얘기를 들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이후 공범 2명은 2003년과 2005년 불법체류자로 적발돼 강제 출국당했다. 주범 A씨는 한국 여성과 결혼해 국내에 체류하면서 스리랑카 식료품 수입사업을 했다. 자칫 A씨의 범행은 완전범죄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2011년과 2013년, 그가 아동 성범죄를 저지르면서 유전자(DNA)를 채취해 보관했고, 이것이 은희양의 속옷에서 검출된 DNA와 일치하면서 덜미가 잡혔던 것이다. A씨는 이전에도 성범죄 전과가 여럿 있었다. 청소년에게 성 매수를 권유해 벌금형을 받았고 강제추행으로 징역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경찰, 부실 초동수사에도 진심 어린 사과 없어

2013년 검찰은 A씨에 대해 특수강도강간 혐의로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당시 법률로 강간은 공소시효가 5년, 특수강간은 10년이어서 이미 공소시효가 만료된 상태였다. 이에 따라 검찰은 시효가 15년인 특수강도강간으로 기소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법원에서 제동이 걸렸다. 1심 재판부는 특수강도강간은 증거 부족으로 무죄, 특수강도·특수강간·강도강간 혐의에 대해 공소시효 경과로 면소 판결을 내렸다. 이듬해 8월 대구고등법원은 검찰의 항소를 기각하고 A씨에 대해 재차 무죄를 선고했다. 특수강도에 대한 혐의 입증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2017년 7월 대법원이 검찰의 상고를 기각하면서 A씨의 무죄가 확정했다. A씨는 이렇게 법망을 빠져나갔다. A씨는 대법원 판결 직후 스리랑카로 강제 출국했다. 그리고 1년3개월 만인 2018년 10월16일, 법무부는 스리랑카 검찰과 공조로 A씨를 다시 법정에 세웠는데, 이때는 한국이 아닌 스리랑카 법정이었다.

현지에서는 강간죄의 공소시효가 20년이다. 우리나라에선 처벌 시효가 만료됐지만 그쪽에선 시효가 남은 것을 이용해 현지에서라도 법의 처벌을 받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스리랑카 검찰은 A씨의 DNA가 피해자의 몸이 아닌 속옷에서 발견된 점과 당시 강압적인 성행위를 인정할 추가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성폭행이 아닌 '성추행'으로 기소했다. 스리랑카 법원에서도 증거불충분으로 무죄가 선고됐다. 


은희양의 유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수사기관의 부실한 초동수사로 인한 정신적 손해를 배상하라며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고, 2021년 4월 재판부는 "부모에게 각각 2000만원, 형제 3명에게 각각 500만원씩 총 55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손해가 발생한 1998년부터 연 5%로 계산되는 지연손해금을 포함하면 유족들이 받은 배상금은 1억3000만원 정도다.

이 사건으로 인한 새내기 여대생의 억울한 죽음은 끝내 한을 풀지 못했다. 유족들의 평범한 삶은 완전히 무너졌고,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당했다. 진범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은 채 오히려 면죄부를 받았다. 이 모든 것의 발단은 사고 직후 경찰의 부실 수사가 원인이었다. 그런데도 이 사건에 관여한 경찰관들은 유족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하지 않았고, 어떠한 처벌이나 불이익도 받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락인 탐사저널 사건전문기자 


https://n.news.naver.com/article/586/0000109128?sid=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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