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보면서 보통의 기회가 우리에게 온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왜 우리가 직접 만들지 못했나 안타까울 수도 있지만, 바꿔 생각하면 오히려 한국이 만든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영미권 시장이 그만큼 한국적인 것에 매혹되고 한국과 연결되고 싶어 한다는 걸 더 정확히 알게 해준 계기가 아닌가 싶어요. 물은 들어오는데 지금 당장 저을 노가 없으니 숟가락이라도 꺼내고 싶을 만큼 절박한 심정이 듭니다.”
케이(K)팝 소재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전세계를 강타하기 전, 더 큰 규모의 진동으로 케이콘텐츠의 경천동지를 보여준 건 ‘오징어 게임’이다. ‘오징어 게임’은 전세계 시청자들을 열광시키며 넷플릭스의 급성장을 이끌었고, 이는 오티티(OTT)가 극장을 압도하는 영상미디어 시장의 재편으로 이어졌다. ‘오징어 게임’ 제작자인 김지연 퍼스트맨 스튜디오 대표는 폭풍과도 같았던 그 변화를 한복판에서 경험한 이다. 전 시즌의 성공을 이끌며 성공한 제작자 반열에 오른 그가 절박함을 느끼는 이유는, 그 역시 최근 사막화된 한국 영화판에 돌아와 신작 준비에 난항을 겪고 있는 현장 영화인이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영화 ‘10억’(2009), ‘남한산성’(2017), ‘도굴’(2020) 등을 제작한 충무로 출신 제작자다. 지난달 서울 마포구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김 대표는 “정책적으로 국제 공동 제작을 활성화해 당장의 침체 국면을 돌파하고, 장기적으로는 한국 영화를 포함한 콘텐츠 업계가 국제 공동 제작의 허브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계획이 세워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 대표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세계가 케이컬처를 주목하는 지금의 분위기뿐 아니라 그의 실제 경험이 녹아 있다. “‘오징어 게임’을 하고 난 뒤 국외 영화인들에게서 공동 제작 제안을 많이 받았어요. 한국과는 멀어 보이는 북유럽 국가에서도 그 나라 사람과 한국인의 로맨스를 그리며 한국 로케이션 촬영을 하고 싶다거나 심지어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스토리를 들고 오는 제작사도 있었죠.” 그는 이런 제안을 받으면서 꼭 자신이 아니더라도 ‘어딘가 함께할 만한 제작사들이 있을 텐데, 이들을 연결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국내 투자가 얼어붙은 상황에서 외국과 공동 제작을 하면 조금씩이라도 업계의 활력을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매출 역시 국내 극장에만 의존하지 않아도 되고요. 영미권뿐 아니라 영화산업이 가파르게 성장하는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 최근 자금력을 가지고 공격적으로 문화산업을 키워가고 있는 아랍 국가들도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실제로 상당수 프로듀서가 이미 해외로 나가 이런 노력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나라 간 공동 제작은 유럽에서는 보편적인 제작 방식이 됐다. 전세계로 유통되는 유럽 영화 가운데 단일 국가 작품은 찾기 힘들 정도다. 김 대표 역시 공전 중인 신작 제작을 국제 공동 제작으로 추진하는 걸 검토 중이다.
하지만 손에 꼽을 정도의 일부 기업들을 제외하면 제작사들은 대부분 영세한 규모다. 국외로 나가 파트너를 찾기가 쉽지 않다. 파트너를 찾더라도 협업을 성사시키기까지 넘어야 할 벽이 많다. 현재 영화진흥위원회는 외국 영화가 한국에서 로케이션 촬영을 할 때 이에 대한 지원을 하고 있는데, 김 대표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공동 제작을 유도할 수 있는 다양한 인센티브 정책을 만들고 이를 효율적, 전략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국을 매력적인 투자처나 파트너로 알리고 실질적인 협업에 도움을 주는 글로벌 데이터베이스 구축이나 법률적 지원, 매칭 서비스 등도 필요하다. 영화계에서는 정부가 국제 공동 제작 펀드를 만들어 협업의 물꼬를 터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오징어 게임’은 드라마 시리즈이지만, 황동혁 감독을 비롯해 모든 스태프는 영화판에서 경력을 쌓은 인력이었다. 영화적 스케일의 상상력과 연출력, 기술력이 드라마 시리즈의 가능성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시리즈로 성공한 김 대표가 한국 영화산업의 붕괴를 근심하는 이유다.
“시대가 변하면 사라지는 사양 산업이 있죠. 영상 콘텐츠 플랫폼이 다양해진 시대에 영화도 그런 게 아니냐, 힘들다고 왜 지원을 해야 하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죠. 영화는 돈을 들이고 극장까지 찾아가는 수고를 들여 선택하는 콘텐츠예요. 그만큼 두시간에 강력한 스토리와 기술력의 첨단을 집약해야 하는 프리미엄 포맷이기 때문에 영화산업의 발전은 다른 영상 장르의 성장으로 이어집니다. 프랑스 등이 국책으로 영화산업을 보호하는 것도 영화를 이런 문화적 상징성을 가진 공공의 유산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점차 사라져가는 ‘시네마틱한 경험’이 지속돼야 하는 이유입니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8/0002759963?sid=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