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형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는데 가장 앞장선 악성 친일파 중 한 명으로
그는 흔히 독립운동 탄압하면 떠오르는 노덕술, 하판락같은 친일경찰도 아니었음
그의 젊은 시절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으며
1930년 만주로 건너가 '권수정'이라는 가명으로 의열단에 가입했음
그러나 그가 의열단에 가입한 이유는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해서가 아닌 탄압하기 위해서였는데
그는 일제의 밀정 노릇을 하며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였고
수백 명의 독립운동가들을 체포, 투옥시켰음
이들 가운데 사형을 선고받은 독립운동가들도 다수 있었는데, 기록이 미비해서 확실치 않지만 최소 17명 ~ 최대 70명으로 추정된다고 함
상기했듯이 그에 대한 기록이 부실하여 그의 악행에 대해 현재로는 알 수 있는 사실이 많지 않으나
만보산사건 오보사건을 보도한 김이삼을 납치해서 살해했다거나, 독립운동가들을 직접 암살했다는 설도 존재함
심지어 그는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42년에는 직접 친일 단체 '총진회'를 조직해 기독교 친일인사들을 포섭, 신사참배를 독려하는 활동을 하기도 했음
광복 이후 그는 뻔뻔하게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가입 의사를 표명했지만 당연하게도 거부당했고, 미군정기에는 극우 인사로 전향해 활동함
이때 그는 여운형을 노골적으로 증오, 비방했는데 그의 건준위 가입을 반려한 게 몽양 여운형이었기 때문이라고 함
그는 이승만과 커넥션이 있었으며, 이승만이 사주한 백색 테러에 가담했다는 의혹을 받기도 했음
그러다가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고향인 강원도 정선에 출마, 당선되며 승승장구하는 듯했음
그러나 하늘은 이 인간 쓰레기가 천수를 누리도록 방관하지 않았는데
국회의원 임기중이었던 1954년 2월, 지프(소위 '찝차')를 타고 가던 중 차가 눈길에 미끄러지는 교통사고를 당했음
이때 그는 차에서 뛰어내렸다가 오히려 전복된 차에 깔렸고, 즉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얼마 안 가 숨을 거뒀음
친일파로서는 몇 안 되게 그나마 약소하게나마 죗값을 치렀다고 볼 수 있음
한편 그의 악행은 장인과 처남의 행보와 대비되며 더욱 빈축을 샀는데

그의 장인어른인 강병주 목사는 조선어학회 회원으로, 큰 사전 편찬에 참여하여 '한글 목사'로 칭송받았으며,
3.1 운동에 가담했다가 옥고를 치르거나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사유로 구속되기도 한 독립운동가임
그의 처남인 강신명은 연세대학교 이사장, 숭실대학교 총장, 대한기독교교육협회 회장, 서울장로회신학교 교장 등을 역임한 유능한 교육자였으며, 친일 행위에는 전혀 가담한 바가 없음
(아내는 끼리끼리, 부창부수였음. 활자가 아까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