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팁/유용/추천 과거가 후회될 때 읽어보면 좋은 글.txt
49,232 338
2025.08.02 13:01
49,232 338

<이동진의 시네마레터 - 터널을 지나는 법>


 


그리스 신화에서 저승까지 찾아가 아내 에우뤼디케를 구해내는데 성공한 오르페우스에겐 반드시 지켜야 할 금기가 주어집니다. 그건 저승을 다 빠져나갈 때까지 절대로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지요. 그러나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속 설명에 따르면 “그녀를 보고 싶은 마음에, 그녀가 포기했을까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는 그만 뒤를 돌아보고 맙니다. 이로 인해 아내를 데려오는 일은 결국 마지막 순간에 수포로 돌아가고 말지요. 



구약 성서에서 롯의 아내도 그랬습니다. 죄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가 불로 심판 받을 때 이를 간신히 피해 떠나가다가 신의 명령을 어기고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소금 기둥이 되었으니까요. 금기를 깨고 뒤돌아보았다가 돌이나 소금 기둥이 되는 이야기는 전세계 도처에 널려 있지요. 우리의 경우도 탐욕스런 어느 부자의 집이 물로 심판 받을 때 뒤돌아본 그의 며느리가 바위가 되고 마는 충남 연기의 장자못 전설을 비롯해 조금씩 변형된 형태로 여러 지방에 전해져 내려오니까요. 



국내 개봉된 일본 영화 중 최고 흥행 성적을 기록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 역시 비슷한 상황에 놓입니다. 기상천외한 일들이 벌어지는 신들의 나라에서 돼지가 된 부모를 구출해 돌아가던 소녀 치히로는 바깥 세상으로 나가는 통로에 놓인 터널을 지나는 동안 결코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듣는 거지요. 



그런데 왜 허다한 이야기들에 이런 ‘돌아보지 말 것’에 대한 금기가 원형(原型)처럼 반복되는 걸까요. 그건 혹시 삶에서 지난(至難)했던 한 단계의 마무리는 결국 그 단계를 되짚어 생각하지 않을 때 비로소 완결된다는 것을, 사람들이 경험을 통해 체득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오르페우스처럼, 그리움 때문이든 두려움 때문이든, 지나온 단계를 되돌아볼 때 그 단계의 찌꺼기는 도돌이표처럼 지루하게 반복될 수 밖에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소금 기둥과 며느리 바위는 그 찌꺼기들이 퇴적해 남긴 과거의 퇴층(堆層) 같은 게 아닐까요. 



류시화 시인은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라는 시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더구나 나를 뒤돌아본다는 것이/싫었다, 언제나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나였다/다시는 세월에 대해 말하지 말자”고 했지요. 정해종 시인도 ‘엑스트라’에서 “그냥 지나가야 한다/말 걸지 말고/뒤돌아보지 말고/모든 필연을/우연으로 가장해야 한다”고 했고요. 



그런데 의미심장한 것은 치히로가 그 힘든 모험을 마치고 빠져 나오는 통로가 다리가 아닌 터널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두 개의 공간을 연결하는 통로엔 다리와 터널이 있겠지요. 다리는 텅 빈 공간에 ‘놓는’ 것이라면, 터널은 (이미 흙이나 암반으로) 꽉 차 있는 공간을 ‘뚫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리가 ‘더하기의 통로’라면 터널은 ‘빼기의 통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결국 삶의 단계들을 지날 때 중요한 것은 얻어낸 것들을 어떻게 한껏 지고 나가느냐가 아니라, 삭제해야 할 것들을 어떻게 훌훌 털어내느냐,인지도 모릅니다. 이제 막 어른이 되기 시작하는 초입을 터널로 지나면서 치히로는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들을 몸으로 익히면서 욕망과 집착을 조금 덜어내는 법을 배웠겠지요. 



박흥식 감독의 영화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에서 사랑이 잘 풀리지 않을 무렵, 윤주는 봉수를 등지고 계단을 오르면서 “뒤돌아보지 마라. 뒤돌아보면 돌이 된다”고 되뇌지만 결국 뒤를 돌아 보지요. 그러나 그렇게 해서 쓸쓸히 확인한 것은 봉수의 부재(不在) 뿐이었습니다. 



아무리 마음이 아파도 뒤돌아보지 마세요. 정말로 뒤돌아보고 싶다면 터널을 완전히 벗어난 뒤에야 돌아서서 보세요. 치히로가 마침내 부모와 함께 새로운 삶의 단계로 발을 디딜 수 있었던 것은 터널을 통과한 뒤에야 무표정한 얼굴로 그렇게 뒤돌아본 이후가 아니었던가요. 

목록 스크랩 (204)
댓글 338
댓글 더 보기
새 댓글 확인하기

번호 카테고리 제목 날짜 조회
이벤트 공지 💙니베아X더쿠💙 니베아 선 프로텍트 앤 라이트 필 선세럼 체험단 30인 모집 222 05.07 17,369
공지 [공지] 언금 공지 해제 24.12.06 5,147,716
공지 📢📢【매우중요】 비밀번호 변경 권장 (현재 팝업 알림중) 24.04.09 12,374,687
공지 공지가 길다면 한번씩 눌러서 읽어주시면 됩니다. 23.11.01 13,119,963
공지 ◤더쿠 이용 규칙◢ [스퀘어 정치글은 정치 카테고리에] 20.04.29 35,669,515
공지 정치 [스퀘어게시판 정치 카테고리 추가 및 정치 제외 기능 추가] 25.07.22 1,112,833
공지 정보 더쿠 모바일에서 유튜브 링크 올릴때 주의할 점 785 21.08.23 8,566,606
공지 정보 나는 더쿠에서 움짤을 한 번이라도 올려본 적이 있다 🙋‍♀️ 270 20.09.29 7,470,355
공지 팁/유용/추천 더쿠에 쉽게 동영상을 올려보자 ! 3620 20.05.17 8,681,118
공지 팁/유용/추천 슬기로운 더쿠생활 : 더쿠 이용팁 4021 20.04.30 8,572,150
공지 팁/유용/추천 ◤스퀘어 공지◢ [9. 스퀘어 저격판 사용 금지(무통보 차단임)] 1236 18.08.31 14,523,209
모든 공지 확인하기()
3061244 이슈 15주년 16년차에 대학축제 열심히 도는 여돌 02:44 0
3061243 이슈 실시간 외길장군 속출 중이라는 백상 김고은.gif 10 02:36 860
3061242 이슈 아이오아이가 정말 나가기 싫었지만 음방을 뚫기 위해 출연했었다는 프로그램 3 02:29 1,183
3061241 이슈 오은영이 생각하는 아이를 낳지 않는 진짜 이유 6 02:29 836
3061240 유머 조말론 각인 대참사 3 02:28 844
3061239 이슈 소낙비 맞은 새 9 02:27 411
3061238 이슈 조선 왕 두분이 상 받은 올해 백상 남자신인상.twt 1 02:26 506
3061237 유머 친구 필요없다는 뚱뚱까스 2 02:26 476
3061236 이슈 현대 오자마자 비혼선언하는 조선시대 여주 jpg. 17 02:26 1,320
3061235 이슈 투어 돌고나서 더 늘어서 온 엔믹스 애드립 근황 02:23 129
3061234 유머 미국사는 아시아인 트라우마 4 02:21 821
3061233 이슈 백상 김고은을 본 중국인 댓글 7 02:20 2,063
3061232 이슈 열일곱 딸을 잃은 엄마의 오열.... 3 02:16 1,198
3061231 이슈 BH 소속 배우들 백상 단체샷 (갓진영 & 김고은 & 박보영 & 전소영 & 이병헌) 12 02:12 1,131
3061230 이슈 그때 당시 패피들이 '유례없이 예쁘다'고 극찬했었던 브랜드 '구찌'...jpg 27 02:11 2,262
3061229 이슈 14년 전 오늘 발매된_ "Venus" 1 02:08 208
3061228 이슈 이게 진짜 브아걸의 정식 후계라는 4세대 여돌.twt 8 02:06 1,402
3061227 유머 팬들이 음방으로 꼭 보고싶다고 난리난 이채연 곡.jpg 02:05 306
3061226 유머 졸려~ 하게 생겨서 개찐한 사투리 팍팍 쓰는 여돌둘ㅋㅋㅋ 3 02:05 474
3061225 유머 오지콤, 오바콤은 있는데... 왜 외노자콤은 없는거에요? 13 01:57 1,6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