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수군 판옥선 13척 (12척 + 통제사의 기함), 정찰 소형선 30여척
왜군 수군 세키부네 133척, 그외 아타케부네 등 200여척
조선 수군 최선두에 이순신 장군의 함선
그리고 저기 떨어져서 나머지 12척은 쫄아 있었고

“난중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좌선 1척을 제외한 12척들이 멀찍이 바라보고만 있었으며, 중군장 김응함은 대장선의 신호도 무시했고 안위는 멀리서 주저하고 있었다. 심지어 김억추는 배 한 척을 한 마장까지 뒤로 빼서 이 전투를 지켜보고만 있었다고 한다. 이순신이 초요기를 올려 아군에게 싸우러 오라고 신호를 보내기 전까지 이순신의 좌선은 홀로 울돌목의 거센 역류를 다 받아내면서 밀려들어오는 왜군 선단 수십 척에 맞서 물길을 틀어 막았다는 것이다.”
“결국 이순신은 중군장과 여러 전선들을 소집했다. 물론 평소라면 군령에 불복한 제장들을 군법으로 다스렸겠지만, 이 전투에서는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데다 전력 하나하나가 매우 아쉬운 상황이었다. 결국 초요기를 올려 부하들을 부르자 그제서야 장수들이 슬금슬금 하나둘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중 거제현령 안위가 탄 배가 좌선 근처에 가장 먼저 도착했고, 이순신은 안위를 향해 외쳤다.”


부하들이 쫄아버린 것도 어느 정도 이해할만한 게, 이순신 장군이 치른 해전 중 명량해전은 다른 전투와는 달리 특히 전력의 열세 조건에서 치러진 전투였다는 것.
보통 이순신 장군은 ‘이기는 조건을 만들어놓고’ 전투를 치르는 것을 선호하는 전략가였지만, 전력상 매우 열세였던 명량에서능 용맹하게 최선두에서 싸우며 부하들을 독려해야만 하는 상황
쫄아있던 부하들 최선두에서 독려하며 정신차리게 만들고 하루종일 격전을 치른 결과
조선 수군 피해 : 사상자 13명
왜군 피해 : 함선 최소 31척(난중일기) 최대 100여척(왜군 추정) 침몰, 사상자 최소 수백에서 천단위까지
그리고, 보급이 곤란해진 왜군 육군 후퇴라는 결과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