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서 추방되는 일본인들
- 일제강점기 시절 함경남도 원산에서 중학교를 다녔던 일본인 카사이 히사요시의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원산은 한반도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사는 원산부(길이 반듯반듯하고 발전된 구역)와 한국인 거주지역이던 원산리로 분리되어 있었다고 한다.
한국인들이 원산부로 들어오는 일은 없었기에, 원산부와 원산리는 지금의 남한과 북한 같은 괴리감을 가진 지역이었다고 한다. 나중에 해방 당시 자신의 거주지역에 많은 한국인들이 나와 만세를 부르는 것에 "이렇게 많은 조선인이 있다니!!!" 하면서 놀랐다고. 그곳이 본래 한국인들의 땅이란 사실 자체를 아예 몰랐다는 뜻이다.
- 해방이 되면서 일본인들은 하루빨리 고국으로 귀환하기 위해 분주했는데, 은행에서 그동안 모아놓은 돈을 빼가고 자신들이 모아둔 재산들 모두를 갖고 가기 위해 필사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군정에서 반출할 수 있는 개인 재산과 현금 반출액을 제한했다고 한다. 거기에다 전쟁 당시 많은 일본의 선박들이 파괴된 까닭에 배편도 별로 없어서 상당수의 귀환 일본인들이 밀수선을 이용했다고 한다. 이 밀수선은 비싸고 위험한 데다 믿을 수 없었다. 심지어 이들을 노리는 해적까지 횡행했다고.
- 일부 한반도 거주 일본인들은 일본 본토에 기반도 없을뿐더러 미군의 융단폭격으로 폐허가 된 일본으로 돌아가는 것을 꺼렸다. 한반도의 상황이 어느 정도 안정되는 것을 느끼자 더 이상 '일본인'이 아닌 '조선인'으로서 계속 잔류하기로 마음먹었다.
YMCA에서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개최한 한국어 수업에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희망자들이 정원을 초과, 학급을 하나 더 늘렸을 정도. 하지만 한국인들의 반일감정이 격화되고, 미군정의 일괄송환 방침이 확정되자 이들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 그래도 38선 이남의 일본인들은 그나마 처지가 나았다. 이북에서는 소련군의 강간이 무서워서 대부분의 일본 여성들은 머리를 빡빡 깎거나 숯을 얼굴에 문질렀다. 이 사람들의 행색은 귀환한 뒤에도 일본에서 한동안 이슈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식민지 시기 조선인들을 괴롭히거나 괴롭혔다고 여겨진 일본제국 경찰 출신 일본인들도 상당수 살해되었는데, 이는 남한 지역보다 훨씬 더 심했다고 한다.
- 소련군이 한반도 이북지역으로 입성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만주와 이북 주재 일본군 수뇌부는, 자신들과 군인 가족들을 즉시 대피시키고는 나머지 100만 명의 일본인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대피방송도 내보내지 않았다. 아울러 각 기관 수장들과 간부들은 이미 먼저 도망간 후였다. 이 결과로 졸지에 소련군이 이북에 입성하는 모습을 본 일본인들은 시베리아에 포로로 끌려가거나 소련군에게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빈 손으로 이남으로 내려오기도 했다.
- 다만 당시 일본인들 중에는 숙련된 고급 엔지니어가 많았기에 이를 탐낸 김일성은 이들에게 조선에 잔류한다면 보조금과 집, 각종 보너스 등의 혜택을 제공하겠다며 유혹했지만 이미 소련군에게 학을 뗀 이북지역 일본인들은 그 누구도 김일성의 제안에 응하는 사람은 거의 전무했다.
- 소련군은 일제강점기에 식민통치에 앞장서거나 조선인들에게 패악을 저질렀던 일본인들의 죄를 소급해서 처벌했는데, 일본인들은 이를 복수 차원의 보복재판이라 부르며 반발이 많았다. 처벌된 일본인들은 당시 법관이나 일본제국 경찰의 간부에서부터 3.1 운동 당시 조선인 시위대를 향해 물을 뿌린 소방대원과 조선인 학생을 차별했던 교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징역형을 선고받은 일본인들은 일제 하 조선이 입은 피해복구 작업에 동원되거나 시베리아 수용소로 압송되어 소련의 전후복구에 갈려나갔다.
- 정작 일제 식민지배의 가장 큰 피해자였던 한국인들은 도망자 신세가 된 이들 일본인들에게 친절했으며 온정을 베풀었다. 실제로 만주지역에서 중국인들이나 소련군이 일본인들에게 보복성 살인, 폭행, 강간 등은 셀 수 없이 많았지만, 정작 한국인들이 쫓겨나는 일본인들에게 이러한 린치를 가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이 만주로 밀려 내려오자 아버지는 26세였던 어머니께 5세, 2세, 그리고 생후 1개월 된 철부지 세 자식을 맡겨 귀국길에 오르게 하셨지요. 둘째가 바로 저였습니다.
어머니는 늘 ‘한국인들의 친절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때 죽은 목숨이었다’며 고마움을 표해 왔답니다. 부자들은 일부 차가운 태도였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느냐’며 슬쩍 밥 한 그릇이라도 나눠주려 했죠.
38선을 넘으면서 산중을 헤매던 어느 날, 굵은 비까지 내리자 체온이 떨어져 모두 빈사상태였지요. 어느 농가에서 거지 행색의 저희 식구를 맞아들여 헛간에 새 건초를 깔고 자게 해 줬답니다. 그날 밤 그 집에서 쫓겨났더라면 저희는 모두 죽었을 겁니다.
참고 출처 - <조선을 떠나며, 2012, 역사비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