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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차 드라마 촬영 노동자 박성균(가명)씨가 2019년 여름 야외 촬영을 진행하다 찍은 사진. 박성균 제공15년째 드라마 촬영장에서 일하고 있는 박성균(가명)씨에게 기록적인 폭염 상황에서 계속되는 올해 여름 야외 촬영은 어느 때보다 고되다. “1분 분량”을 위해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땡볕에 몸을 익혀야 하지만, 현장에는 냉수가 준비되지 않아 “한여름에 뜨거워진 물”을 마시기도 한다. 박씨는 한겨레에 “촬영 노동자들은 폭염에도 견디는 게 익숙해졌는데 그저 찬물이라도 제때 준비되면 좋을 것 같다”고 토로했다.
촬영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27일 들어보면, ‘폭염 휴식권’이 적용되는 법도, 규칙도 없는 촬영 현장에서 프리랜서 노동자들이 더워도 참고 일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체감온도 33도 이상인 장소에서 일할 경우 2시간마다 20분 휴식, 사업주는 소금과 음료수 등을 현장에 충분히 갖춰야 하는 내용을 의무화한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개정안이 지난 17일부터 시행되고 있지만, 촬영 노동자들에겐 먼 얘기다. 대부분 용역이나 프리랜서로 일하는 이들은 산업안전보건법의 근로자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를 제기하면 평판이 나빠져 일감을 구하기 어려워지는 업계 특성은 상황을 악화시킨다. 3년 차 드라마 촬영팀 노동자 윤민호(가명·25)씨는 “2년 전 여름 아침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그늘 없는 바닷가에서 촬영을 진행했는데 휴식시간은 당연히 없었고 물도 부족해서 갈증을 참아가며 일했다”며 “문제를 제기했다가 밉보이면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다음 작품에 못 들어갈 수도 있어서 여름엔 다들 그냥 참는다”고 했다.
김기영 공공운수노조 희망연대본부 방송스태프지부장은 “촬영 현장은 조명 때문에 더 뜨겁고, 실내에서 촬영하더라도 소음이 들어가면 안 돼 에어컨을 끈다. 열악한 상황이지만 ‘이게 잘못됐다’고 목소리 내는 노동자들은 현장에 남을 수 없다. 근로계약을 체결하지 않아 책임과 권한도 조각난 상태”라고 짚었다.
촬영 노동자들의 건강권을 보장하려는 시도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서울지방고용노동청은 2021년 휴식시간 등이 담긴 ‘폭염 대비 노동자 긴급 보호대책’을 주요 방송사와 드라마 제작사에 배포했지만, 강제성이 없는 권고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2023년 하반기 이후에는 중단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드라마제작협회 관계자는 “최근 촬영 현장에 쿨패치 등 폭염 대비 물품을 보급하고 응급의료 지원 사업 등을 하고 있지만 국내 200여개 드라마 제작사 중 회원사가 54개라 모든 드라마 촬영 현장을 통제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업계 특수성과 무관하게 노동자가 폭염 속에서 안전하게 일할 권리가 보장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다. 진재연 엔딩크레딧(방송·미디어 비정규직 단체) 집행위원장은 “촬영을 중간에 끊을 수 없다는 현장 특수성을 고려하다 보면 노동권은 밀릴 수밖에 없다”며 “계약 형태를 떠나 노동자들이 폭염 속에서 휴식 없이 장시간 노동하는 상황 자체가 개선돼야 한다”고 했다. 김영민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장은 “고용노동부 등 관련 정부 부처가 현장에 나가 상황을 파악하고, 제작사 역시 제작 일정 등에 폭염 대책을 고려해 계획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