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이스피싱으로 신고를 당했는데 도와주세요."
처음에는 '또 어떤 분이 엉뚱하게 전화를 걸었나' 했다. 일하는 직장이 충북 '음성노동인권센터'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보니, 이웃과의 민사 소송 과정 인권 침해를 당했다는 전화부터 일용직 노동자 안 구하냐는 전화까지 온갖 도움 요청이 쏟아진다.
저번 주 목요일(17일) 걸려온 전화도 그런 줄 알았다. 보이스피싱은 경찰이나 은행에 신고할 일 아닌가. 그런데 "사장이 월급 통장을 보이스피싱 계좌로 신고를 했어요"라는 말을 듣는 순간, 이건 엉뚱한 전화도, 일반적인 노동 사건도 아님을 직감했다.
빼앗긴 통장 가지고 도망가자... 보이스피싱으로 신고한 회사
필리핀에서 온 에릭(가명)씨를 직접 만나 얘기를 들어봤다.
2023년 8월부터 올해 5월까지 강원도 동해시의 한 업체에서 일한 그의 주장은 이랬다. 수술비가 필요한 가족에게 월급을 모아놓은 본인 명의 통장에 있는 돈을 송금하려고 하니, 사장이 '본국 가족에 송금해서 어느 세월에 돈을 모으겠냐'는 이유를 들며 여권과 통장을 압류했다. '5년 동안 일하면 돌려주겠다'는 사장의 말에 에릭씨는 결국 지난 5월 23일 사장이 숨겨둔 여권과 통장을 찾아 일터에서 나왔다.
그런데 수술비를 송금하려고 하니 송금이 불가한 통장이라는 알람만 떴다. 필리핀어로 상담이 가능한 은행 지점을 찾아가자, 2년 가까이 모은 월급 통장이 보이스피싱 연루 계좌로 신고당해 지급정지 상태라는 충격적인 설명을 들었다.
범인은 다름 아닌 회사였다. 에릭씨가 일터를 빠져나온 다음 날, 직원 명의로 에릭씨 계좌에 30만 원을 입급한 뒤, 은행에 '보이스피싱에 속아 돈을 입금했으니 지급정지를 해달라'고 신고한 것이다.
당장 수술비가 급한 에릭씨는 사장을 만나 지급정지를 풀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사장은 지금껏 준 임금의 세금을 떼어야 한다며 모은 돈의 절반 가까이를 요구했다. 퇴직금 포기 각서에도 서명하라고 했다.
서명하지 않으면 경찰에 불법체류자로 신고하겠다는 사장의 협박에 퇴직금 포기 각서에는 서명했지만 수술비가 달린 월급만은 못 주겠다고 에릭씨가 버티자, 사장은 경찰에 신고하겠다며 전화기를 들었다. 결국 에릭씨는 아무런 소득 없이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고, 알음알음 필리핀 이주민 커뮤니티에 도움을 요청해 강원도 동해에서 충북 음성까지 오게 됐다는 것.
사실관계 확인을 위해 사장에게 연락해봤다. 사장은 "얘(에릭씨)가 도망갔으니 잡을 방법이 없지 않나. 그러니 지급정지를 요청했다", "돈 받으려고 (보이스피싱으로) 신고한 것"이라며 허위 신고임을 자백했다. 금융범죄 피해자를 위한 구제 제도를 악용한 셈이다. 다행히도 사장이 은행에 허위 신고 이후 피해구제신청서를 제출하지 않아, 지급정지 상황은 풀려났다.
https://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3151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