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건의 시작은 2020년 1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명 예능 프로그램을 연출하며 주가를 높이던 PD B씨는 제작사 A의 예능 본부장으로 화려하게 이직했다. A사는 B씨를 영입하며 '방송집필계약'이라는 이름으로 프로그램 3편에 총 10억을 지급하는 파격적인 계약을 맺었다.
법원은 이 계약이 단순한 작가 계약이 아닌, B씨의 연출 능력과 스타성을 보고 지급한 일종의 '사이닝 보너스' 성격의 포괄적 연출료 계약이라고 판단했다.
장밋빛 미래를 그리던 양측의 관계는 2023년 9월, B씨가 경쟁사로 이직을 통보하며 파국을 맞았다. 설상가상으로 그를 따르던 예능본부 직원 11명 전원이 불과 석 달 사이에 모두 사직서를 내고 경쟁사로 둥지를 옮겼다. 한순간에 예능본부가 공중분해된 A사는 격분했다.
A사는 "B씨와 경쟁사가 공모해 조직적으로 핵심 인력을 유인했다"며 B씨와 그의 아내, B씨가 세운 회사, 그리고 경쟁사를 상대로 35억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A사는 B씨가 재직 중에 경쟁사를 위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회사의 영업비밀까지 빼돌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62부(재판장 이현석)는 A사의 주장을 모두 기각했다. 재판부는 직원들의 집단 이직이 피고들의 '불법적인 유인 행위'로 이뤄졌다는 증거가 없다고 선을 그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제작2본부 직원들은 자발적 선택에 따라 경쟁사에 이력서를 제출하고 각자 별도의 연봉협상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며 "직업 선택의 자유는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이라고 밝혔다. 공정거래위원회와 경찰 역시 앞서 같은 이유로 무혐의 처분을 내린 바 있다.
B씨가 재직 중 경쟁사 업무를 했다거나 영업비밀을 유출했다는 주장 역시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특히 재판부는 A사가 '영업비밀'이라고 주장한 자료들에 대해 "비밀이라고 볼 수 있는 표시를 하거나 접근을 제한하는 등 비밀로 유지·관리하고 있었다고 볼 만한 증거가 없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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