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 윤태호의 2014년 작 <파인>은 (좋은 의미로) 피곤해지는 이야기다. 1970년대 중반, 전남 신안군 앞바다에서 유물이 발견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유물을 건져 큰돈을 벌려는 서울의 도굴꾼들이 목포로 향한다. 그러나 바다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공간이 아니다. 바다로 나갈 수 있는 배를 가진 선주가 있어야 하고, 유물의 위치를 아는 사람이 필요하며, 물속에 들어가 유물을 건져 올릴 사람도 있어야 한다. 사람은 곧 돈이다. 게다가 사람은 저마다 욕망으로 가득하다. 도굴에 참여하는 사람이 늘수록 서로 뒤통수치려는 계획도 복잡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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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광주와 부산에서 이름난 도굴꾼들이 각자의 팀을 꾸려 합류하면서 상황은 더 혼란스러워진다. 웹툰 <파인>은 이들 사이의 기싸움에 전체 분량의 절반 이상을 할애한다. 어떤 이에게는 지지부진한 전개처럼 보일 수 있지만, 수많은 캐릭터가 각자의 개성과 말맛으로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긴장감과 에너지는 <파인>의 가장 큰 매력이다. 누구 하나 마음을 줄 수 없는 인물들의 아귀다툼을 그리고 있으니, 보면서 피곤해지는 게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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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을 원작으로 한 디즈니+의 오리지널 시리즈 <파인: 촌뜨기들>은 원작을 거의 그대로 따라간다. 캐릭터 설정, 대사와 행동, 에피소드 순서까지 거의 그대로다. 공들여 재현한 1970년대 목포의 풍경은 원작 팬에게도 생생한 매력이 느껴지고, 원작의 말맛을 살리는 배우들의 호연 역시 흥미롭다. 물론 거대한 자본이 투입된 실사 프로젝트이고, 스타 배우들이 출연하는 만큼 원작에서 느껴지던 지리멸렬한 분위기는 어느 정도 순화되었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인물인 오관석과 오희동의 캐릭터만 봐도 그렇다. 원작의 오관석은 비정한 모습이 강하게 드러났지만, 류승룡이 연기한 오관석은 하루도 편할 날 없이 바쁘게 뛰어다니는 아버지의 이미지가 더 두드러진다. 양세종이 연기한 오희동도 원작과 달리 낭만적인 면모가 더 많이 드러난다. 특히 여성 캐릭터와 함께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원작에서는 상상하기 힘들었던 로맨틱한 음악까지 삽입되고 있다. 원작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를 가진 배우를 캐스팅한 덕분에 더 흥미로워진 캐릭터도 있다. 바로 배우 임수정이 연기한 양정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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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중 양정숙은 재벌 회장의 둘째 부인이다. 본래 회장의 회사에서 경리로 일하던 직원이었으나, 회장의 아내가 사망한 뒤 그의 눈에 들어 아내가 된 인물이다. 계산이 빠르고, 돈 냄새를 기막히게 맡으며, 의심도 많은 그녀는 큰 비밀까지 품고 있다. 원작의 양정숙은 외모부터 독기를 내뿜는 인물로, 돈을 향한 욕망과 젊은 남자에 대한 욕정, 새로운 미래를 위한 집착이 모두 뒤섞인 표정을 지니고 있었다. 작가는 그런 그녀가 남편에게 당하는 ‘더러운’ 수모까지 그려내며 양정숙을 <파인>이 뿜어내는 에너지의 한 축으로 만들었다. 그런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가 임수정이라니. 기존 이미지를 떠올리면 배우 본인에게 신선한 도전이었겠지만, 원작을 알고 보는 입장에서도 놀라운 캐스팅이다. 임수정이 연기한 양정숙은 원작의 그녀보다 더 궁금해지는 인물이다. 원작과는 다른 선택을 하거나 색다른 사연을 지닌 인물처럼 보인다고 할까? 향후 전개에서 이 인물이 어떤 변화를 보일지는 알 수 없지만, 시청자들이 배우 임수정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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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파인: 촌뜨기들>에서 주목할 수밖에 없는 또 한 명의 배우가 있다. 목포 토박이 건달을 연기하는 동방신기의 유노윤호(배우 활동명 정윤호)다. 연기가 다소 과장되어 보이지만, 상대에게 강하게 보이려 애쓰는 캐릭터의 성격과 맞물리며 그런 과잉조차 설득력이 있었다. 무엇보다 광주 출신 배우로서 구사하는 자연스러운 사투리도 매력을 더한다. 이미지 변신에 성공한 그는 이 드라마를 기점으로 배우로서 활동 반경을 넓혀갈 듯 보인다. <파인: 촌뜨기들>이 보여주는 여러 인물 중에서도 임수정과 정윤호의 얼굴은 유독 오래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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