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백문은 해방 전 평양신학교에 재학했었다.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평양신학교가 폐교되고, 1940년 4월 서울에 ‘조선신학원’이 강의소 형태로 개원했다. 김백문은 스승 백남주를 떠나 조선신학원에 입학을 하게 된다.
김백문은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신령회’ 사건으로 조선신학원의 교수 및 학생들과 함께 구속됐다. 그 이후 김백문은 신령운동에 몰입하면서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1945년 8월 해방 직후부터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섭절리에서 "예수교 이스라엘수도원"을 시작했다. 이 수도원은 초가 한 채와 밭을 포함하여 대지 1,800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당시 수 십 명이 모이는 집회가 자주 있었으며, 서울 일원의 추종자들을 위해서 한강 남쪽 상도동에 또 하나의 집회소를 두었다. 김백문은 1946년 3월 2일 평생 잊지 못할 사건를 체험하게 되는데, 그는 이 날이 하늘이 열리고 예수의 재림이 실현된 날로 인식하여 개천의 날로 기념하였으며, 그의 메시아 비전이 구체화된 날이다.
그리고 이 김백문의 전도사이며 제자를 자처한 인물이 문선명이다.

대체로 독실한 개신교신자이다가 직접 소통하다가 교주행
그리고 또 그 후임이 나타나는 방식이 한국사이비 방식이다.
신사참배 안 한다고 혹독한 고문 받았던 사람이었던 김백문은 자신의 제자라던 문선명이 저렇게 거대한 사이비종교를 만들어낼 줄은 몰랐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