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이비에 일본신이 뜬금없이 등장하는게 아님
일본 신화에서 아마테라스(해) 츠쿠요미(달) 스사노오(바다와 폭풍)가 삼남매인데
한일병합의 거부감을 줄이려고
단군=스사노오, 마고=츠쿠요미 로 설정해서
한국의 조상신이 사실 일본 조상신의 동생이나 자식이었다.
원래부터 혈연이니 거부감 가질 필요없다.
일본 조선은 한몸이라는 내선일체에 이용함
에도시대부터 시작된 정한론의 근거였고
그래서 그게 친일파로 이어져 사이비에 여지껏 남아있는 것
- 정한론의 근거: 단군이 일본신의 동생이라고?
https://www.donga.com/news/amp/all/20151105/74605310/1
일본이 한반도 침략을 본격화하기 직전 메이지시대에 작성한 한반도 지도에 단군묘(檀君墓)와 기자전(箕子殿)을 표기한 사실이 밝혀졌다. 단군을 일본의 조상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의 동생으로 간주한 당시 정한론(征韓論)자들의 침략 논리가 지도에 반영된 것이라는 해석이다.
일본이 민감한 군사지도에 굳이 단군묘와 기자전을 표시한 이유는 무엇일까. 박 학예사는 에도시대와 메이지 초기에 걸쳐 단군을 조상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동생 ‘스사노오노미코토(素殘嗚尊)’라고 강변한 정한론자들의 거짓된 신화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그는 “이 신화는 일선동조론, 임나일본부설과 더불어 한반도 침략의 역사적 명분을 제공했다”며 “단군묘와 기자전을 표시한 군사지도는 일본이 이미 메이지시대부터 한반도 침략 논리를 준비한 사실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 일선동조론에 이용
일선 동조론은 멀리는 에도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처음 학술적으로 제기된 것은 도쿄제국대학 교수 시게노 야스쯔구(重野安繹), 구메 구니타케(久米邦武) 등이 『국사안(國史眼)』(1890)을 간행한 이후부터였다. 이 책에서는 일본 일왕의 조상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의 동생 스사노오노미코토(素戔鳴尊)가 그의 아들과 조선에 갔으며, 조선의 금은을 취하기 위해 배를 만들었고, 신라와도 교류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일선 동조론은 일제의 강제 병합 전후로 일본인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고, 병합 이후에는 친일 조선인들 사이에도 통용되었다. 가나자와 쇼자부로(金澤庄三郞)는 1929년 『일선 동조론』을 출간해 일선 동조론을 학문적으로 확산시켰다. 가나자와는 이 책에서 1902년 자신의 도쿄제국대학 박사 학위 논문에서 주장한 일본어와 한국어가 같은 계통이라는 학설을 확장시켰고, 스사노오가 신라국에 강림했으며, 한국인의 일본 귀화가 많았다는 사실 등을 열거했다.
이러한 이론은 민간사학자들과 대중들에게도 유통되면서 여러 형태의 변종이 등장했다. 예를 들어 스사노오가 단군이라는 궤변이 확산되어 조선의 신사에 스사노오를 합사해야 한다거나 스사노오의 신사를 설립하려는 운동도 진행되었다

- 일제가 남긴 단군 초상, 조선 강제병합 밑그림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437000
책에는 한국사의 아픈 구석이 담겨 있다. 한국을 병합하려는 일제의 치밀한 계략을 엿볼 수 있다. 단군 그림이 들어간 책은 1910년 간행된 『신궁건축지(神宮建築誌)』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 외교권을 빼앗은 일제는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강조하려고 서울 안암동에 조선 신궁을 지으려 했다. 새로 지을 신궁에 고조선의 시조 단군과 일왕(日王)의 조상신으로 알려진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 그리고 조선왕조를 세운 이태조의 위패를 봉안하려 했다.
- 민족 정기의 상징인 단군 친일파가 중히 여긴 이유
https://m.mk.co.kr/economy/view.php?sc=50000001&year=2016&no=691588
대체 일제와 친일파가 민족의 구심점인 단군을 식민통치에 이용했다는 게 무슨 말인가 싶을 것이다. 그런데 단군을 보는 일제의 관점은 부정론 한 가지가 아니었다. 일제에는 단군을 자신들의 조상신인 아마테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의 동생 스사노 노미코토 혹은 스사노의 아들로 보는 관점이 있었다. 아마테라스와 단군이 혈연이라는 것은 일본인과 한국인이 혈연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내선 - 일본과 조선은 일체 - 하나라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가령 신궁봉경회 같은 단체는 박영효, 민영휘와 같은 친일파들이 주도하면서 아마테라스와 단군을 함께 제사 지낼 신궁을 건설하고자 했다. 중앙에는 아마테라스가 있고 좌우에 단군과 조선 태조를 놓을 작정이었다. 대표적인 친일파인 민영휘는 단군신전봉찬회 고문을 맡기도 했다.